마치 하룻밤 사이에 달라진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하다. 뉴 노멀이 올드 노멀을 대체했고 모든 것은 유동적이게 됐다. 펜데믹 격리로 세상이 멈춘 듯하고, 우리는 전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2명 이상의 모임도 권장하질 않을 만큼 모든 것이 중단되기도 했다.

스포츠 게임을 즐기다가 하루 아침에 가족을 어떻게 먹여야 할지, 아픈 노인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를 고민하게 됐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 생명을 보장할 수 없으며, 우리의 미래나 호흡마저도 장담할 수 없음을 알게 됐다.

기도할 생각이 없던 사람들이 기도를 시작했고, 하나님을 주목하게 됐다. 육체적 관심은 영원에 대한 문제로 대체됐고,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었다. 세상의 질서와 하나님의 질서, 육체와 영혼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장님이 된 것은 그의 부모의 죄입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죄입니까?"라고 물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나태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한 복음 9 : 1-5)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소경이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셨다거나, 마귀가 했다"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또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도 하시지 않았다. 그대신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나태고자 하심이라"라는 말씀하심으로 치유를 나타내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가 소경이 된 것이 아니라, 그의 눈이 멀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계기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끔찍하게 지속될 것만 같은 삶의 고난이 주님의 영광을 높이 드러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것이 고난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와 해석이었다. 주께선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빛이다"(요한 복음 9 : 5)라고 말씀하셨다.

어둠이 있기에 빛은 더욱 밝을 수 있다. 현재의 위기는 교회가 일어나 더욱 밝게 빛을 비추게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순간을 붙들어야 한다. 이 기간 우리는 더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주님과 더욱 깊어지는 시간을 가지며, 한 발 물러나서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부모들은 어린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을 더 가져야 한다. 주님의 선물과도 같은 이 순간을 붙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아픔과 두려움 가운데 있다. 또한 불확실성 가운데 그들에게는 질문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답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다. 우리에게는 예배와 친밀한 언약 공동체가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 많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삶 가운데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이 순간이 자신의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았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급격한 변화 속에서 우리를 향한 부르심을 기억하며 복음을 나누고 위로와 희망을 가져다 줄 기회를 찾아야 한다. 

*본지는 최근 미국 크리스천포스트가 출간한 신간서적 어라이즈 투게더(Arise together)를 18회에 걸쳐 번역 게재해 드립니다. 미국 복음주의 목회자들의 외침을 통해 교회가 본질을 회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을 붙들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