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세계로교회 임지석 목사
(Photo : 기독일보) 나성세계로교회 임지석 목사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다스리시되 통제하시는 분이 아니다. 세상은 우리를 때로는 법으로 구속하고 억압하지만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좇아 살아갈 수 있도록 자유를 허락하셨다. 세상에서 한번 법의 제재를 받으면 삶이 불편하고 자유를 억압당하지만 하나님 주시는 법 안에 있으면 그만큼 인생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땅에서는 자유를 누릴수록 법의 통제를 피할 수 없지만 성령의 법으로 구속을 받으면 오히려 얽매이기 쉬운 죄에서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그리스도인이 누릴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법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신앙인의 삶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성경이 말씀하는 자유의 의미

먼저 그리스도께서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값을 지불하고 사신 자유를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유의 결과는 인류가 죄를 범하는 일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을 시켜주신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은 디도서 2:14에서 말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한 사실은 갈라디아서 3:13에도 구체적으로 증거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나아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은 자유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써 그분에게 거저 나아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는데 로마서 5: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리스도인이 누릴 자유의 특징은 하나님께 순종 하되 노예와 같은 두려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와 같은 사랑과 즐거움으로 하는 것임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특별히 신약에서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보다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당시 유대교가 지켜야 했던 의식법의 멍에에서 해방을 받는 엄청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은혜의 보좌에 더욱 담대히 나아감을 얻는 것이나 예전보다 더욱 충만한 성령의 교제를 이루었던 사실은 그들이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자유라 할 수 있다. 고린도후서 3:17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주는 영이시기에 그분의 영이 계시는 곳마다 자유함이 있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자유를 주신 목적

성경에서는 죄와 사망의 법과 대별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증거하고 있는데 로마서 8장은 이를 보다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로 이것은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자유를 주신 분명한 목적인데 성령이 주시는 법으로 인하여 그들을 억압하던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자유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리스도인이 누릴 자유는 무엇이며 그들이 누릴 자유는 어디까지인가? 그들이 자유를 누린다는 이유로 상습적으로 죄를 짓거나 개인적인 욕정을 채우려 한다면 주어진 자유를 파괴하는 일이 된다. 믿는 사람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목적은 원수의 손에서 구원을 얻어 주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갈 5:13에 나오는 바울의 권면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나아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를 주신 데에는 무엇보다도 서로 덕을 세우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누릴 자유는 주님께 거저 받은 선물이지만 그분은 이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는 톡톡한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러한 이유로 믿는 사람들은 받은 자유를 결코 헛되이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덕을 세우고 보존하게 하려는데 힘써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11에 교훈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그들이 하는 것 같이 하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회복하라

믿는 사람들 가운데 세상에서 누리는 자유에 대해서 오해를 하는 경우를 가끔씩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유라는 구실로 합법적인 권세를 대적하거나 합법적인 권리 행사를 가로막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것은 세상이나 교회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제도에 대해 저항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성경은 이와 같이 가르치고 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국가나 공권력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볼 수 있다. 한 예로 코로나 전염병으로 위중한 시기에 정부의 방역지침을 따르지 않고 배타적으로 행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반하는 행동으로 비판 받아 마땅한 일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세상이 말하는 자유와 성경이 가르치는 자유에 극명한 차이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주의주장이나 신념을 고집하는 일은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평강과 질서를 파괴하는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합법적인 책임을 지게 됨은 물론이고 국가나 공권력의 권세로부터 처벌을 받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양심의 주인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서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양심을 따라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는 이에 합당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일이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 일행이 유대인 관원들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했던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이는 관원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말로서 그들이 하나님 주시는 양심으로 돌아가 깨닫기를 원했던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은 물론 그분이 주시는 양심을 따르되 이에 합당한 진정한 자유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