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현 교수(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석사원 디렉터)
정우현 교수(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석사원 디렉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의 끔찍한 참상을 현실적으로 묘사했다. 특별 명령을 받은 특수소대가 존 밀러 대위(톰 행크스)의 지휘 아래 적진에 상륙한다. 폭탄이 터지고 병사들의 몸이 분리되고 피가 뿜어져 나오는 극한의 공포 상황이다. 밀러 대위는 순간 아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부하 병사가 한참을 소리를 질러 정신을 차린다. 사투 끝에 적군을 무력화했지만, 영화의 카메라는 피로 물든 긴 해변을 훑고 지나간다. 해변을 가득 채운 병사들의 주검들이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 뛰어든 군인들은 영웅이었다. 영화는 죽음의 공포와 희생자의 영광을 극명하게 대조한다.

생명이 아름다운 만큼 사망은 공포다. 사는 게 좋아서 죽기 싫고 죽기 싫어서 살고 싶다. 끔찍한사망이 생명의 가치를 방증한다. 하나님은 죽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아브람으로 하여금 코앞에서 보게 하셨다. 끔찍한 사망을 보여주신 이유가 놀라웠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생명을파괴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살리시는 하나님이라는 역설을 통찰한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생명의계약을 맺으신다. 아브람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이 끔찍이도 두려움을 주는 사망의 상태인지를 온종일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귀로 듣고 피부로 체감하게 하셨다.

온통 붉은 피가 사체와 땅바닥에 낭자했다. 피비린내가 난다. 동물 사체 주위로 파리들이 윙윙거린다. 아브람 주위에 끔찍한 사체들이 가득하다. 죽은 암소의 머리통이 쪼개져 있고 몸통도 꼬리까지 반으로 쪼개져 있다. 옆의 염소와 양도 마찬가지다. 온통 피범벅이다. 솔개는 사체 조각을뜯으려고 얼씬거린다. 종일 솔개 쫓는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시키시지? 애먼 짐승들을 잡아쪼개고 사체들 옆을 온종일 지키게 하셨다. 지쳐 누웠다. 순간 잠들었다. 잠시 눈을 붙였다 뜬 것같은데 어느새 캄캄한 밤이 되었다. '무섭다! 어두움이 두렵다. 죽음이 공포다!' 죽어 없어지는 것,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소멸의 상태, 육신의 죽음만큼이나 의식의 소멸도 두려운 일이다. '난 세상에있으나 마나 한 존재야!'라는 무존재감도 고통스러운 비극이다. 아브람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승리자의 존재감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느꼈다. 존재의 소멸에 대한 막연하지만 강렬한 불안이었다.

그는 승리자의 위치를 유지하고 싶었다. 소돔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개선장군으로서 다시 겁쟁이의 자리로 돌아갈까 두려웠다. 다시 전쟁이 벌어진다면 다시 이길 수 있을까 두려웠고, 영웅의 존재감을 잃을까 불안했다. 패배자로 돌아갈까 불안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상급이니라" (창15:1부분)고 말씀하셨지만 아브람은 보이는 증거가 필요했다. 자식이었다. 대를 이을 아들의 존재는 확실한 노후 연금이었고 든든한 보험이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창15:2-3)

하나님은 아브람의 불안의 핵심을 정확히 알고 계셨다. 그러나 아브람에게 상속자 아들을 주신다고 해도 그의 실존적 두려움을 해결할 근본적인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계셨다. 유일한 해법은 노후 연금도 아니고 보험도 아니었다. 하나님이었다. 창조주 여호와만이 존재 소멸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식을 약속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15:4-5)

부모는 어린아이가 사탕을 달라고 조르면 이가 썩을 수 있고 식사량이 줄을 수 있지만 허락한다. 긍휼이다. 긍휼의 이유는 두 가지다. 위로와 큰 계획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대를 이을 자식은자기 소멸의 두려움을 완화하는 진통제였고 또한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그의 자손들을 통해 인류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거시적 계획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개인 신앙 성숙 즉 하나님과한 개인의 친밀한 관계에 필연적 요인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인류 역사라는 큰 그림의 한부분을 드러내시는 일이다.

아브람은 약속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아, 신기하다. 내가 전쟁에서그렇게 승리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들이 있을 거라 약속하신 말씀이 믿어진다. 내 아들이 또 자식을 낳고 그들이 후손을 낳아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다는 약속이 믿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그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15:6)

그러고 보면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어 의로 여김을 받기까지 여러 사건이 필요했다. 그리고 여러 번그분의 약속을 확인 시켜 주셨고 결국 이 사건에서 상속자 아들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믿게 된 점은 하나님께서 아브람 안에 지속해서 변화를 일으키고 계셨다는 점을 알려준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의로 여기신 아브람의 믿음에 대해 말하며 성장했다는 의미의 "견고하여져서"라는 말을 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4:18-22)

처참한 사망의 현장은 아브람 마음속에 숨어있던 두려움의 실체가 마음 밖으로 튀어나와 앞에 놓고 객관적으로 보게 된 통찰의 장이었다. 하나님은 마치 트라우마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심리드라마를 진행하듯 아브람의 마음을 작업하셨다. 아브람은 자기 밖으로 튀어나온 끔찍한 사망의 실체를 눈으로 직접 보면서 사망과 자신을 분리하는 작업 중이었다. 그랬다. 새삼스럽지만 아브람은 죽음을 혐오하며 살아있음을 되새겼다.

그는 사망에 속한 자가 아니었다. 산 사람이었다. 죽은 것은 동물들이지 자기가 아니었다. 그래서그의 생각은 '나는 죽은 목숨이야!'가 아니라 '나는 살았다!'였다. 그때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인생의 방향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했다.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 살까?'로바뀌었다. 그동안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고정하고 있던 땅바닥 시선이 하늘을 향하게 되었고, 과거로부터 옮겨 영원한 미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