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한계 지점에서 확인되는 선과 악의 가능성
헤겔 관념론 통해 자고하는 독단성과 교만을 목격
헛된 교만 속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마음' 때문에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 행위 접근조차 못하는 불행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세워진 본회퍼의 석상. ⓒhistorytoday.com 캡처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세워진 본회퍼의 석상. ⓒhistorytoday.com 캡처

◈신학과 인식: 칸트에 의해 해명된 인간의 두 가능성

인간 본성에 대한 본회퍼의 이해는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인간의 삶이 하나님의 계시 행위에 열려질 수 있는 선(善)의 가능태(potentiality)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고 자기 내부의 고독으로 파고 들어가는 악(惡)의 가능태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이 두 가지 가능성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따라 실제적인 개개인 안에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는 선의 가능태를 현실화하기 전에, 우선 악의 가능태를 현실화한다. 본회퍼는 여기서 인간의 원죄적 죄성을 발견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파고들어간다.

왜 인간은 선과 악의 가능성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실존하는데, 현실에서는 먼저 항상 악의 가능태를 현실화시키는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무수한 방식의 답변이 제기될 수 있다. 본회퍼는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한 물음을 놓고 우선 인간 인식의 실제를 파고든다. 당시까지 인식론을 주도했던 것은 철학 분과였다.

그리고 본회퍼 당대의 기독교 신학은 그 어느 때보다도 거세게 철학적 인식론과 존재론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본회퍼는 인간이 세계와 타자(他者)를 인식하는 방법을 펼쳐낸다.

본회퍼가 지목한 근대 철학계의 총아(寵兒)는 칸트였다. 칸트의 주관주의 선험론과 구성설은 인간 인식의 특성들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설명해 냈다.

칸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주관적 직관을 근거로 인식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주관주의). 그리고 감성의 직관, 지성의 종합, 그리고 이성의 추론으로 이어지는 인식의 과정 전체는 모든 인류에게 동등하게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선험론).

따라서 인간의 인식이란 물자체에 그대로 대응하는 진리를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과 지성이 물자체를 직관하고서 스스로의 방식대로 새롭게 구성해낸 대상을 만들어내는 일로 밝혀진다(구성설).

그러므로 칸트는 감각적으로 만나게 되는 세계와 타자 전체는 사실상 완전한 인식이 절대로 불가능한 비밀, 신비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칸트
▲근대 철학계의 총아, 프로이센 출신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the-tls.co.uk 캡처

본회퍼는 물자체의 이 절대적인 불가지성을 피조물의 존재가 지닌 시간적 역동성을 통해 재차 논증한다. 인간이 삶의 현실에서 체험하는 인간 자신과 세계, 그리고 그 세계 안에 있는 타자의 존재 전체는 시간적이다. 다시 말해 한시도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한다.

그런데 운동과 변화는 곧 순간들의 생성과 소멸인 동시에, 그 순간들을 채우는 현상들의 생성과 소멸이기도 하다. 즉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순간순간 존재하면서 사라져 간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이러한 존재적 원리를 "만물은 유전(流轉, flux)한다"는 말로 집약해 설명했는데, 본회퍼 또한 이러한 존재론적 깨달음에 십분 동의하는 입장이다.

인간의 직관은 이렇게 생멸이 교차하는 역동적인 존재를 즉각적으로 따라가지 못한다. 존재가 생기(生起)한 직후 인간의 의식은 그것을 자의적으로 표상으로 만들지만, 의식이 그것을 표상으로 만들어놓은 그 순간에는 그 표상의 원본 실재인 존재는 이미 공허함 가운데로 들어가 사라져 있다.

따라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표상은 결코 세계와 사물 자체의 존재를 그대로 포착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사라져버린 순간적 존재의 잔영(殘影)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된다.

◈신학과 실존: 악의 가능성으로 기울어지는 삶의 현실

이렇게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로 둘러싸인 채 인간들만이 공유하는 방식으로 각자의 인식을 구성해가는 현실 앞에서, 인간은 두 가지 중 한 가지 태도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인간이 가진 인식 능력의 한계를 수긍하고, 겸손하고 주의깊게 세계와 타자를 맞이하는 길이다. 이는 인간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처분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외와 존중의 삶으로 이어진다.

강압과 폭력 없이 타자의 존재를 그 자체대로 보존하려는 윤리적 실천 또한 자신의 무지에 대한 수긍으로부터 나오게 된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가진 인식 능력의 한계를 고의적으로 외면하고서, 세계와 타자의 존재를 지적 대상으로 변환한 뒤 그것을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규정하는 길이다. 이는 인간이 자기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 이외의 모든 존재를 자기가 파악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지배와 독단의 삶으로 이어진다.

본회퍼는 칸트의 선험적 구성설 안에서 이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보았다. 그렇지만 칸트 이후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론으로 넘어오면서, 독일 사상계는 이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유독 지배와 독단의 삶을 신-인 관계의 핵심으로 부각시킨다.

헤겔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 게오르크 헤겔. ⓒthewisdomdaily.com 캡처

헤겔의 인간과 세계 이해는 정신의 유한성을 출발점 삼는다. 다시 말해 헤라클레이토스와 칸트에 의해 밝혀진 인간 인식의 빈약함과 한계에 대한 수긍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에다가 계몽주의 특유의 낙관론을 가미했다. 인간 의식 혹은 정신이, 결국에는 자력으로 진리를 파악하고 절대선을 이루리라는 낙관론이 헤겔 정신현상학을 관통한다.

헤겔식 지양의 변증법은 이 낙관론이 가장 집약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인간이해 방식이다. 헤겔은 인간의 의식이 비록 과거에는 열등했고 진리에 전혀 다가설 수 없는 한계 앞에 좌절하고 있었지만, 역사를 통해 실현되는 정신의 변증법적 고양을 통해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절대지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예언했다.

본회퍼는 칸트의 인식적 한계 비판이 헤겔의 독일 관념론에 의해 이처럼 번복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절대 알지 못할 것을 마치 확실하게 알아낸 것처럼 자고하는 인간 의식의 독단성과 교만을 목격한다.

인간이 자기 의식 바깥으로, 삶의 현실로 눈을 돌리는 즉시 깨닫고 말게 될 스스로의 한계를 일부러 간과한 채, 자기가 만들어낸 잔영을 진리로 떠받들고 스스로를 진리의 근거로 옹립하는 인간의 자기신격화 욕망을 간파해내고 있는 것이다.

본회퍼는 모든 인간 안에 내재된 이런 헛된 교만의 심성을 루터의 진단을 빌려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마음(cor curvum in se)'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 때문에 인간은 자기보다 크고, 위대하고, 온전한 존재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 행위에 접근조차 못하는 불행에 빠져 있다고 경고한다.

애초 의식 외부에 존재하는 피조계와 그 안의 타자조차 제대로 돌아보려 하지 않는, 독단적이고 폭력적인 파악과 판단 행위로 가득한 인간의 마음 가운데서, 어떻게 피조계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행위를 온유하게 맞이해 들이려는 겸비의 심성을 찾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계속>

루터
▲인간의 죄성을 '자기 안으로 구부러진 마음'으로 규정했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 ⓒvision.org 캡처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