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신학실천센터 류준영목사
(Photo : 기독일보) 공적신학실천센터 류준영 목사

세상은 Covid-19 바이러스로 인해 팬데믹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팬데믹 사태 이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교회는 필수적(essential)"이라며, 비필수 범주에 넣으려 했던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지난 10월 1일, 트럼프 대통령 부부 마저 양성 판정을 받고 군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후 3일 만에 퇴원해 백악관으로 복귀했지만 언론의 논쟁을 더욱 키운 양상입니다.

10월 5일 WHO는 "세계 인구 중 10%가 Covid-19에 감염됐을 수 있다"고 추정하며, "세계적으로 위험에 놓여 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9월 30일 통계에서는 Covid-19으로 인한 전세계 사망자 수가 100만 명을 넘어 섰습니다(corona board.com). 역사적으로 지난 100년간 전 세계적 팬데믹은 스페인 독감(1918-1919년), 아시아 독감(1950년대), 홍콩 독감(1960년대), 신종 플루(2009년) 4번 있었고, 이중에 신종 플루를 제외한 3번의 독감에서 1500만-150만의 사망자를 냈습니다(신종 플루 당시는 20-30만의 사망자 후, 집계가 중단됐지만 최소 50-100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 여기서 우리를 긴장시키는 것은 이 모든 팬데믹의 패턴이 1, 2, 3차에 걸쳐서 진행되었고, 바로 2차 확산에서 가장 큰 피해가 났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이번 경우, 2차 확산의 시작이 10월말에서 11월초가 될 것으로 예측합니다. 철저한 대비가 필요합니다.

지난 20일간(8월29일~9월20일)간 LA카운티 내에서 Covid-19 보건 규정 위반으로 적발된 업체 또는 기관 총 71개에 티켓(citation)이 발부되었는데, 적발된 시설 중 대부분은 피트니스(fitness)와 교회였습니다(전체 적발 건수의 86%). 최근 법원은 실내 예배를 강행해 논란인 LA 인근 대표적인 미국 대형교회(Grace Community Church)에 3차례 티켓을 발부하자 교회 측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 말라" 또 법원 쪽의 "커뮤니티의 피해가 우려된다"는 입장이 심각하게 부딪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LA카운티의 확진자는 다시 증가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이 시점에 교회의 역할과 책임에 관해 숙고하게 됩니다. 지금은 Covid-19이 교회에 큰 위협이 되지만, 실추된 개신교회의 사회적 신뢰 지수 회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오히려 교회가 변화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신자이고 그들의 모임(성도들의 공동체)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새로운 환경 속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교회의 공공성'입니다. 교회는 서로를 향하여 열린 교회가 되기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팬데믹이 불러온 큰 위기 속에서 현재 교회의 회복을 넘어, 미래 교회의 진정한 부흥의 꿈을 향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가 대사회적 책임에 민감하여 '교회의 공공성'에 응답해야 합니다.

19세기 말 조선에 온 선교사들은 콜레라와 말라리아를 '귀신의 장난'이라 여겼던 조선인들에게 세균의 개념을 설명하고, 그들 곁에 함께하며 치료했고, 이 과정에서 기독교 복음은 전파되었습니다. 이렇게 초기 한국기독교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은 우리 초대교회는 비록 적은 소수였고 가난했지만, 살아있었으며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교회는 내적으로 침체와 외적으로는 신뢰도 하락은 물론이고, 교회가 정의⋅평화⋅사랑⋅화해라는 기독교적 기본 가치관을 지니고 있는지 의심받고 있습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교회가 큰 위기를 맞고 있는 현 시점에 교회의 공공성 문제를 절박한 심정으로 깊이 성찰해야합니다. 이를 위해서 '공공성 회복은 정체성 회복', '복음과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 '공공성 회복을 위한 과제'라는 틀에서 각각 숙고해 보겠습니다.

1. 공공성 회복은 정체성 회복

지금과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 교회의 공공성 회복은 곧 교회의 정체성 회복이라는 이해가 요구됩니다. 공공성의 사전적 의미는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니라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입니다. 따라서 공공성은 '국가에 관계된 공적(official)', '특정한 누군가가 아닌 모든 사람들과 관계된 공통적(common)',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open)'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미국의 기독교윤리학자 스택하우스(Max L. Stackhouse)는 '교회의 공공성'이란, 기독교 신앙의 사사화(privatization)와는 거리가 있으며, 공적 영역에 대한 기독인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촉구하는 윤리적 노력의 총칭이라고 봅니다. 사실 초대교회의 기독인들은 공공 영역이라는 근대적 개념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디아코니아(봉사/섬김)를 통해 그들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공동선(common good)을 추구했습니다. 이를 통해 가장 큰 유익을 받았던 사람들은 강도 만난 자, 곧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사적 단체가 아닌, 이웃의 유익을 위해 공적 책임을 감당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신흥종교였던 기독교는 윤리적 공동체로 인정받았고 이교도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는 큰 동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 활동하는 영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윤리학자, 올리버 오도노반(Oliver O'donovan)은 신학이 복음적(evangelical) 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강조와 함께 복음이 갖는 역동성으로 인해 세상을 향한 복음적 사명을 감당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오도노반이 말하는 교회의 교회됨은 공동체성의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인 동시에 단순한 교제의 개념을 넘어 실천적인 나눔 또 적극적 소통의 역동성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공적 영역을 대하는 자세를 재점검하고, 지역 주민들과의 공감과 소통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정체성 회복은 교회가 벽을 치고 복음을 개 교회 안에만 머물도록 함을 넘어서, 교회 담장 밖을 향해, 더 낮은 곳을 향해서 계속 흐르도록 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겔 47:1-12). 우리 기독교 신학은 본질적으로 공적(openness)이고, 또 주님의 교회도 본질적으로 공적(public body)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속의 모든 교회는 공적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즉, 나 자신을 넘어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고 닮아가는 공적인 삶으로의 부르심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공적교회로서 공적책임을 실천하고자 할 때, 자꾸 희미해져 만 가는 우리 개신교회의 정체성은 더욱 분명해 질 것입니다.

2. 복음과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

예수님의 복음은 개인 구원과 함께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라는 공적 나라에 대한 선포였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도 개인 구원을 위한 사적 신앙(private faith)과 공동체 전체를 위한 공적 신앙(public faith)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 선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서 모두에게 진정한 사랑과 정의 그리고 평화가 실현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회내 공공의 모든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현대 교회는 사적인 신앙의 영역을 위한 역할과 사명에 집중하는 만큼, 공적인 영역을 향한 책임에도 소홀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그저 나와 내 교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나와 우리의 상처 치유와 행복 그리고 구원이 중요한 만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그것도 같이 중요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이런 믿음의 소유자에 관해 "믿음의 사람은 그런 은혜를 보여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자기 의지로 기꺼이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 하고, 모든 이를 섬기려 하며, 온갖 고난을 겪으려 하지, 억지로 떼밀려 하는 법이 없다"(또,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는 것은 곧 불에서 열과 빛을 분리하는 것과 같이 불가능하다고 함)고 합니다.

교회는 그 시대의 이웃과 사회를 향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 같은 책임은 지금과 같은 펜데믹 상황에서 더욱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일이 됩니다. 지금 교회가 모이지 못해서 많이 힘들지만, 혹시라도 모이는 교회의 현장이 감염 확산의 진원지가 된다면, 우리의 신앙이 지니는 공적 증언은 약화됩니다. 때문에 우리 신자들은 각각의 삶의 자리에서 인류 공동체의 안전과 구원을 위해 어떻게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과 사회를 섬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요 4:23-24; 롬 12:1). 그 동안의 기독교 전통과 관행보다는 신앙의 본질에 충실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팬데믹 상황에서 모범적인 교회로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것입니다.

이 점은 초대 기독교 역사가 입증합니다.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The Rise of Christianity(기독교의 발흥, 1996)라는 책을 통해 당시 신흥종교였던 기독교가 어떻게 주요 종교로 성장했는지 보여줍니다. 주후 2세기부터 4세기 사이, 로마제국에는 심각한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당시 이교도들은 전염병으로부터 도피하기 바빴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전염병을 해석하고, 이웃 사랑의 규범을 실천하며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이것이 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0.07%에 불과했던 기독교 인구는 52.9%로 급증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좁은 의미의 신앙생활에 더 매진하기 보다는 팬데믹 때문에 고통당하고, 기본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이웃들을 향해 이웃사랑과 선행의 가르침을 실천 할 때 교회의 진정한 부흥의 꿈은 이루어집니다.

3. 공공성 회복을 위한 과제

지금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 모두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볼 수 있겠지만, 교회가 대사회적인 공적 책임을 소홀히 한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책임 혹은 공동선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고 실천하는 것이 성숙과 성화의 과정에서 필수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그 믿음이 진정 산 믿음인지 혹은 죽은 믿음인지 그 실천(열매)을 통해 입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현재의 교회를 성찰하고, 세 가지 측면에서 변화가 필요함을 제언합니다.

첫째, 부와 번영의 신학입니다. 한국 교회는 사적⋅미시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동안 양적인 성장을 주요 목표로 삼다보니, 복음의 본질과 영성이 변질되는 형국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부를 향한 인간의 욕망을 신앙이란 이름으로 정당화시켜 주고, 부를 축복의 결과라고 강조함으로써 현실 안주적 성향의 기독교로 변모시켰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물질적 축복 지향적 신앙과 양적 성장추구의 성향이 지나칠 정도로 강한 모습들로 나타납니다. 여기에 부와 번영의 신학을 덧입혀 교회의 타락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교회 사역마저도 숫자상의 확장을 위한 목회공학이 대세를 이룹니다. 그간 한국 교회를 지배해온 물질만능과 성장지상주의는 멈추어야 합니다.

둘째, 개 교회주의입니다. 그 동안 교회는 살아남기 위한 생존을 교회 존립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 개 교회주의에 탐닉하였습니다. 교회에게 맡겨진 본질적인 사명보다 개교회의 생존과 양적 성장에 집중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기업적인 마인드나 접근법과 유사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교인들의 신앙의 열심과 하나님 나라까지도 개교회 안으로 가둬두게 되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개 교회주의는 신자들이 일하는 다양한 현장과 지역사회 그리고 구원해야할 저 세상과의 연결은커녕 오히려 소외와 고립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교회의 책임 있는 참여의 동력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됩니다. 오늘의 교회는 사회적 책임 수행을 통해 교회의 공공성을 회복해야 만 하는 절박한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셋째, 이분법적인 사고와 이성 경시 태도입니다. 특히, 한국 교회는 과거 소수의 가난했던 교회의 습성에서 벗어나, 현재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을 갖고, 그 사회 속에서 큰 사회적 책임까지 요구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풀러 신학교 총장을 역임한 마우 박사(Dr. Richard Mouw)는 "영적인"(spiritual)것과 "세속적인"(worldly)것을 분리하여 세속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정죄해야만 하는 이분법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문화와 일반 은총, 2012). 그 이유는, 유일한 하나님 안에서 삶을 단편적으로 나눌 수 없고, 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삶의 어떤 영역을 세속적인 것, 즉 하나님이 없는 곳으로 치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다양한 영역은 단지 교회 밖이란 개념이 아닌, 교회를 통해 이뤄 가야할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란 사실을 교회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과 속을 구분하는 잘못된 이분법적 신앙은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중대한 신학적 오류에서 시작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경건주의적인 기본 원칙은 지지하되, 세상으로부터 도피나 단절이 아닌, 신뢰를 얻어 복음전파의 기회를 얻는 방향이어야 합니다. 이분법적인 사고의 극복은 곧 이어 복음의 실천을 통한 사회적 책임 감당과 직결됩니다.

한편, 교회에 있어서 이원론적 사고는 이성을 경시하는 태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신앙과 이성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해서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성령의 선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 반면, 이성은 접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실은 이성은 인간이 짐승과 구분되어지는 중요한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창조를 통해서 주신 선물입니다. 때문에 신앙은 이성보다 우선하지만 서로 상반되지 않기에, 둘은 조화가 필요합니다. 신앙과 이성이 바르게 사용될 때, 우리 교회는 영적 분별력과 함께 윤리적 판단력을 보유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교회 안에서부터의 소통과 합의의 창출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공적영역에서의 공동선 추구의 가능성과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말씀과 함께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의 모습으로 체질 개선을 요구받고 있습니다(사 1:11-17). 신앙과 삶을 분리해서 신앙이 삶의 현장과 공공 영역에서 작동하지 못하는 모순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 같은 노력을 통해 교회가 대사회적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미래 교회의 복음전파(전도)는 어렵게 됩니다. 지금과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 교회 때문에 세상이 살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골 3:23)"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고, 오직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 한다면,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더욱 신뢰받는 공동체가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교회가 공적 공동체로서 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일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교회가 이제까지의 믿음의 철저함과 동시에 그 믿음의 실천을 통해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되게 하는 변화의 길을 찾아 나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류준영 목사
공적신학실천센터 대표/LA 충현선교교회 협동목사/미주장신대 교수
저서 <한국 초대교회 공공신학,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