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A대표 강순영 목사
JAMA대표 강순영 목사

1904년 웨일스에서 일어났던 부흥의 불길은 부흥의 소식이 전해지자 자신들이 섬기는 나라와 사역지에도 같은 부흥을 주시도록 사모하며 기도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유럽으로, 호주로, 인도로, 미국으로, 한국으로 그리고 한국의 부흥의 현장을 직접 와서 목격했던 조나단 고포스 선교사를 통해 만주와 중국으로 번져 조용했던 중국교회가 역사상 주목할 만한 부흥이 일어나게 된다.

이번에는 조나단 고포스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일어났던 부흥운동을 소개하고 싶다.

조나단 고포스(Jonathan Goforth, 1859-1936)와 한국 부흥 현장 방문

조나단 고포스는 D.L.Moody 가 이끌었던 대학복음화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사역을 준비하던 중 허드슨 테일러의 책을 읽고 중국 선교에 헌신한다. 1886년 토론토대학교 낙스 칼리지 학생들이 갓 결혼한 고포스와 그의 아내 로잘린을 중국에 파송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전개했는데 당시 토론토대학은 제임스 게일과 로버트 하디도 한국에 파송했듯 선교의 영이 충만했었다.

고포스 부부는 중국에 들어와 하남성에 정착한다. 그는 미국의 부흥 운동가인 찰스 피니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책을 읽고 부흥을 간절히 사모하기 시작했다.

1900년까지 중국에는 아직 주목할 만한 부흥이 일어나지 않았었다. 1900년에는 중국에서 비윤리적인 유럽 사업가들의 학대에 반발하여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많은 외국인들이 추방당하고 189명의 개신교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 그리고 수천 명의 중국인 그리스도인들이 살해되었는데 고포스 부부는 이 기간에 피신했다가 1901년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다. 의화단 사건 이후 많은 중국인들은 기독교를 미개발 상태를 해결하는 열쇠로 보았고 1900년 이후에 기독교 공동체들이 부흥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중국으로 돌아온 고포스는 불붙지 못한 자신의 영적 상태와 선교현황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고 웨일즈의 부흥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자 웨일즈의 부흥에 관한 기록들과 찰스 피니의 글을 읽으면서 부흥에 대한 열망과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그런 가운데 1907년에는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의 소식이 그에게 전해졌다. 마침 하남성을 방문 중이던 캐나다 장로교 해외선교회 서기였던 로버트 맥케이는 고포스에게 자기와 함께 한국을 방문해 부흥 현장을 살펴보자고 제안함으로 함께 한국을 방문해 깊은 감명과 도전을 받게 된다.

수천 명의 한국인 남녀가 성령의 불을 받아 가슴이 뜨겁게 불타고 있었고, 예배 장소마다 사람들이 가득찼으며, 사람들은 다니는 곳마다 간증하며 다른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고 있었다. 어린 소년들도 어른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라고 간청은 모습들도 목격했다.

그들은 평양에 부흥이 임하기 전에 평양 주재 선교사들이 4개월 이상 매일 모여 부흥을 사모하며 정오기도회를 가졌던 사실과, 또 한국 성도들이 부흥을 사모하여 4개월 이상 동안 매일 새벽기도회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주에도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소서

중국으로 돌아온 조나단 고포스는 중국에도 이러한 부흥을 보내주시도록 본격적으로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만주 부흥은 이렇게 하여 시동이 걸리게 된다.

그는 만주와 중국 동북부 지역을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자 선교사들과 중국인들이 그들도 한국 같은 부흥을 갈망하게 되었고 그들은 고포스에게 와서 특별집회를 열어달라고 간청했다.

1908년 2월에 고포드는 만주의 수도인 심양에 초청받아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심양의 성도들이 합심해서 기도로 준비한다는 조건하에 집회를 수락했었는데 도착해보니 그동안 기도회를 전혀 갖지 않았고 그 지역에서 지도자로 일했던 선교사는 집회에 전혀 협력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3천 명의 성도들이 심양 집회를 위해 특별 중보기도회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한국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둘째 날 집회에 회개의 영을 충만히 보내셨고, 넷째 날에는 죄를 통회하면서 서로 찾아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지막 날에는 의화단 사건 전후로 하나님을 떠난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는데 그해에 하나님을 떠났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일이 일어났다.

고포드가 쾅닝에 초청받아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그곳 사람들은 대표기도를 인도할 때 외에는 소리 내어 기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자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자신들의 죄를 소리 내어 자백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평소에 서서 기도해 왔는데 온 회중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 장로가 다른 장로에게 가서 용서를 구했다. 곧이어 한 목사가 일어나더니 자신의 간음죄와 뇌물 수수죄를 고백하고 뇌물로 받았던 입고 있던 떨 외투를 찢어버렸다.

그 목사가 계속 회개하며 기도하자 어린 아이들까지 울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다. 불신자들도 구경왔다가 그들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용서를 구했다.

어느 교회 평신도 지도자는 집회에 오지 못했으나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해 주시자 교회 건축 시 자신이 어떻게 건축 자재들을 훔쳤는지 자백서를 작성했고 이를 고백하기 위해 교회에 나와 교인들 앞에서 읽으면서 죄를 고백하였다.

신민푸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기 7년 전 그들의 마을에서 기독교인 54명이 순교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데 가담했던 250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으면서 보복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자신의 가족을 죽였던 자들을 용서할 힘을 달라고 기도했고 250명을 공개적으로 용서한 다음 그 명단을 찢어버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회개와 죄의 공개적 고백과 용서와 화해가 고포드가 방문해 집회를 가졌던 도시마다 일어났다. 산서성의 태원에서도, 서주에서도, 고포드가 살고 있던 승덕에서도, 신앙초우에서도, 허난성의 개봉시에서도, 광주에서는 그리스도인이 2천 명이었는데 나흘 만에 8천 명으로 증가했고, 초우선에서도 가는 곳마다 교회와 학교들에서 죄들을 공개적으로 고백했고 죄를 자백하느라 수업이 중단되기가 일수였다.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니 울면서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하고 서로 잘못을 고백하며 화해하고 변상하는 역사들이 고포드가 가서 집회하는 곳마다 일어났다. 귀신이 쫓겨가고 질병들이 치유되는 역사들도 일어났고 성도들의 숫자가 수천 명씩 불어나는 일들이 여러 도시에서 일어났다.

조나단 고포스가 중국에서 일어난 부흥에 관해 기록한 책 '나의 신으로(By My Spirit)'의 끝 부분에서 그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라 원하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나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아주 강력하게 진술하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보면 성령께서는 단 하루라도 자신의 역사를 지연시키기 원하시는 것 같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충만히 임하시지 않을 때면 언제나 그것은 우리 사람들의 믿음과 순종이 부족한 탓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만약 성령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 세상에서 오순절 때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이다."

그런 다음 그는"우리는 성령께서 부흥을 일으키실 수 있도록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있는가?"라고 질문하고 하나님께서 부흥을 일으키실 수 있도록 길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인으로 다음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기도, 둘째 성경으로 돌아가기,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님으로 높이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910년 이후에 들어와서 비로소 중국인 부흥 운동가들이 세워져 어어지게 된다

1910년부터 '목회를 위한 중국학생자원선교운동'의 전임 사역자로 일했던 딩 리메이(Ding Limei)를 통해서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목회의 길로 들어섰고, 1910-1918년에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사람들은 딩 리메이를 '중국의 무디'라고 부르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지방을 돌면서 전도집회를 이끌었던 왕 밍따오(Wang Mingdao), 1930년대부터 토착적 중국 교파인 'Little Flock' 모임을 이끌면서 많은 책도 썼고 많은 추종자를 이끌었던 워치만 니(Watchman Nee), 부흥 설교가인 존 성(John Sung), 앤드류 기(Andrew Gih) 등에 의해 중국의 부흥운동이 계속 이어졌다.

1949년 공산정권이 들어서 모든 종교활동을 금지시킬 당시 기독교인의 수는 70만이었다고 한다.

기독교를 소멸시키려 했던 문화혁명(1966년부터) 기간을 통과했지만 현재는 1억의 그리스도인들이 중국에 있다고 한다.

최근에 시진핑 정권에 의해 문화혁명 이후 최고 수위의 기독교 박해가 진행 중인데, 중국 기독교가 이 위기 동안 더욱 순결해지고 강해져서 모슬렘 국가들 선교를 책임질 수 있는 교회들로 준비되도록 기도하자.

이 시대의 부흥을 사모하는 작은 종 강순영 목사(JAMA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