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세계로교회 임지석 목사
(Photo : 기독일보) 나성세계로교회 임지석 목사

교회가 사회의 움직임에 대해서 눈 감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의도적으로 세상에 분란을 일으키는 행위를 해서는 안될 일이다.  성경에 말씀하는 것처럼 교회는 세상에 대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서 세상을 섬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기독교인 각자는 천국의 시민임은 물론 이 땅의 자신이 속한 나라에 대해 시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사이 세상이 혼란스러운 이유를 보면 기독교 커뮤니티의 이런저런 운동이 그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이 때로는 정부나 공권력을 위협하는 위험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 기독교 운동의 흐름을 보면 크게 자유주의 신학 사상과 그 대척점에 있는 근본주의 신학 사상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신학 사상은 미국은 물론 신흥 기독교 국가라 할 수 있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지금도 사회운동으로 표면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기독교 운동의 실체를 몇 가지 살펴봄으로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더 나아가 국가와 사회에 온전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기독교 운동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자유주의 신학 사상

자유주의 신학 사상은 18세기 계몽주의와 경건주의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기독교 신학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의 특징은 진보적인 사상의 바탕위에 지나칠 정도로 인본주의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기적들에 대해서 인간의 이성이나 자연의 원리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다윈이 진화론을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진전되었는데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역사적인 기독교와 구분하여 신세계 기독교로 불리기도 한다. 

자유주의에 뿌리를 내린 사상의 속성을 몇 가지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 신앙의 초자연적 기초를 부정하는 가운데 세상의 합리성과 자연주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둘째,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경과 교리보다는 인간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과 깨달음에 더욱 관심을 가진다.  셋째, 기독교를 정의를 실현하고 성 평등과 세계 평화를 주장하며 사회의 부조리를 타파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서 도덕을 회복하고 윤리를 실천하는 도구로 이해한다.  이와 같은 속성 외에도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교리와 배치되는 문제로 인해서 정통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이단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근본주의 신학 사상

근본주의 신학 사상은 이러한 자유주의 사상의 흐름에 대응하여 흔들리지 않는 기독교의 토대를 세우려는 노력에서 20세기 초 미국에서 시작된 교리 수호 운동이다.  이 사상의 핵심적인 주장은 공산주의를 부정하고 반 이슬람을 표방하며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의 존재를 배척하는데 있다.  특별히 미국의 정가를 광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던 1950년대의 매카시즘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다.  이들은 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의 성경 읽기와 기도를 법으로 금지하던 1960년대부터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근본주의 이념이 세력화 되면서 정치집단과 연대를 하게 되었고 이들은 결국 우파적 성향을 지닌 이념집단으로 세상에 등장할 수 있었다.  언젠가 있었던 노르웨이의 연쇄테러를 통해서도 보듯이 이들은 정치세력과 결탁할 수 밖에 없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미국의 현실을 보더라도 이들이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이익집단으로 성장하여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 배타적이거나 도피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실제로 미국에서는 소수민족이나 이슬람, 유대교 등 다른 종교에 대한 적대감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  최근 한국의 일부 교회가 성소수자에 대해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고 종교 통합운동인 WCC를 반대하는 움직임도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에 영향 받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예수주의로 돌아가라

앞에 언급했던 두 가지 신학 사상을 생각하면서 조금은 어색하지만 예수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이러한 신학 사상들은 그 존재이유를 떠나서 사람들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진 신학 사상임에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시작한 사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에 우리는 이것이나 저것을 택하기에 앞에서 과연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혁명가요 개혁자의 삶을 사셨던 분이다.  그분은 철저한 율법주의로 무장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엘리트 집단과 수시로 부딪쳐야 했다.  당시 온갖 기득권을 누리던 유대 지도자들과 사사건건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이에 만일 주님이 또 다른 이념과 사상으로 그들과 맞섰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그분은 오히려 이들의 사상을 뛰어넘음으로서 그들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주님은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이나 총독 빌라도 앞이나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군중들 앞에서 침묵을 지킬 수 있었다는 말이다.  자신을 시험하는 사단의 궤계에 대해서도 '기록된 바와 같이'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압도해버렸던 것이다.

주님은 이처럼 호불호를 좇아서 편 가르기를 좋아했던 분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은 혼란이 아니라 질서를 원하시는 분임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리스도인들은 필요에 따라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지만 정당이나 정파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책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낙태나 동성애 또는 배아복제 실험 등 성경의 가르침을 배반하는 일에 대해 분연히 항거해야 함은 물론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본질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순종과 헌신을 다하되 비본질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다양성을 추구하고 포용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나아갈 길이 있는데 복음주의를 따르는 예수 중심주의 사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과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당을 지어 투쟁을 일삼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먼저 아버지의 뜻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시편 저자가 시 62편에서 말했듯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며 그분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