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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믿음생활 하는 것이 얼마나 시대를 거슬려 사는 몸부림인지 알게 되길 바란다. 그러나 바른 부활관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 쪽으로는 굉장히 자유롭게 되는 일임을 생각하길 바란다.


컬럼버스에서 애틀랜타로 올라오면 애틀랜타 공항을 지나다니게 된다. 가끔 한번씩 기대하는 게 있다. 그 길을 지나갈 때 큰 비행기가 착륙하는 그 배 아래를 보던가 올라갈 때 비행기 모습을 보면 좋겠다. 굉장히 가깝다. 옛날 같으면 그렇게 무거운 쇳덩어리가 공중을 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도 비행기를 타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 만일 사람들이 비행기를 생각할 때 저기에 내가 타고 모든 물건을 실어도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믿으니까 타지 믿지 않으면 타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무거운 쇳덩어리가 어떻게 공중을 뜨겠느냐, 이 비행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일일이 다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도대체 믿을 수 없고 탈 수 없다는 사람은 비행기를 탈 수 없다. 그 많은 부속 하나 하나를 다 확인해본 다음에 비로소, 그 비행기 공학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 다음 확신을 갖고 비로소 비행기 타겠다는 사람이 없다. 비행기가 뜨니까, 다른 사람도 타니까 타도 되겠다 믿을 만하다고 해서 행동을 한다.

우리가 이야기 할 때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그런 뜻에서 누구든지 믿음을 갖고 산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믿는 것에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의 예를 들어보자.

베드로 후서 3장 10-14절.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980년대 이장림 사건을 알고 있나?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해서 한국에서 큰 혼란이 있었다. 그걸 믿은 사람들이 어땠나? 자기들 가진걸 다 교회에 바치고, 예수님이 오신다는 날을 마음에 두고 준비하느냐고 대단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할 때 예수님의 나타나심과 더불어서 우리도 주님과 같은 몸으로 부활하고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13절) 다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죄와는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주는 나라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다는 것은 죄로부터 자유한 삶으로 하나님의 의가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 역사함을 믿는 것과 같은 말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의를 옷 입고 사는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주님과 같이 부활한 몸을 갖고 하나님이 의도하신 의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삶을 산다는 것이 부활사건이다.

크게 대전제를 띄워 놓고 유인물의 큰 아웃라인을 따라가면서 성경이 부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는가 살펴보자.

부활의 정의.
부활은 무엇인가. 부활을 믿는데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도 부활한다는 말이 우리의 몸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을 갖고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간단하게 몸의 부활을 믿는 것. 다른 하나는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 어떤 모양으로 이야기 하든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것. 몸의 부활이 없다고 하는 말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말과 같다. 부활한다고 하는 말은 우리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몸을 다시 사는 것을 믿지 않는 다는 것은 어떤 모양으로 이야기 하든지 부활은 없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부활은 몸의 부활이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부활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바라보는 부활이 실제로 우리 몸의 부활임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개혁주의 신학을 갖고 계신 분들. 굉장히 중요한 부분.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은 확실하게 몸의 부활을 이야기 한다.

사도행전 2장 말씀을 살펴보자. 오순절 사건 이후에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그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 약속하신 보혜사을 보내셨다는 사건을 설명하면서 예수님 부활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사도행전 2장 22-33절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22-23절) 예수님이 죽은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한다.
(24-33절) 이미 시편에 있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윗의 입을 의탁해서 메시아가 오면 그 메시아는 무덤에 묻혀도 썩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오순절날 성령이 임했을 때에 그 성령 부어주신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는 사도 베드로가 그 말씀을 인용하면서 오늘 우리가 성령을 받은 이 사건은 사실은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주신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부활시키셨다. 그 예수, 영어로는 Master, the Lord and Savior
(36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께서 정말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고 우리의 매스터, 로드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자. 예수님이 무덤 가운데서 썩지 않고 몸으로 다시 부활했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고 하나님이라고 하는 뜻의 '주'라는 증명하는 일이라는 것. 이것이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 어떤 관계가 있나. 큰 질문이다. 이걸 염두해 두고 지나가자. 뒤에 설명한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보지 않고 부활하셔서 몸으로 다시 살아서 승천하시고 다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신 이 사건이 오늘날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사건, 내가 예수님과 같이 부활의 몸을 갖고 부활할 사람이라는 믿음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궁금하게 생각하길 바란다. 지금 이 시간은 이 본문 말씀을 통해 보는 예수님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다. 육체의 부활이었다. 이것만 확실히 기억하자.

하나 더 생각한다면 요한복음 20장 24절-29절 말씀은 도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 보면 도마가 경험하고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몸으로 부활하신 것 같은가? 영으로 부활하신 것 같은가? 몸으로. 그것을 놓고 예수님이 이야기 하시기를 너는 나를 보고 난 다음에 비로소 믿는데 그 사실을 눈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은 복되다.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도마처럼 볼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어떻게 믿는가? 우리가 살펴본 두 가지 말씀만 가지고도 성경을 기록했던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성령 부어주심을 설명했던 베드로는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을 놓고 설명할 때에 예수님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라고 믿었다. 단순히 예수님의 몸의 부활만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 요한의 말, 도마의 말, 베드로의 말도 우리가 믿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의 말을 믿기 때문에 실제 눈으로 본 적이 없지만... 이들은 그 당시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서 살아계신 모습도 보고 죽은 모습도 보고 다시 살아났을 때에 그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도 본 사람이다. 그들이 증거한 말씀을 받을 때에 누가 또 우리에게 그렇다고 증거하시나. 우리 마음속에 성령께서 하나님 말씀이라고 증거하시니까 그대로 믿는 것이다. 도마는 만져보고 믿었지만 우리는 만져보지 않고도 믿는다. 우리는 눈으로 보지 않고도 예수님께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믿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말씀들이 예수님이 죽기 전에 말씀하신 그대로 죽어서 증명하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말씀들이 그대로 이뤄질 날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있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우리의 몸도 주님과 같이 부활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신앙이다. 우리의 몸도 주님이 부활하실 때 입으신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만 갖고도 충분히 예수님의 부활은 몸의 부활임을 믿어야 한다. 뒤에 나오는 여러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목격자들에 대한 성경 본문을 써놨다. 여기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 무덤에 갔다 부활한 사실 발견했고, 엠마오로 갔던 두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 만났다, 사도바울은 이야기 할 때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보이고 열 두 제자들, 오백 형제, 야고보,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삭되지 못하고 난 사람 같은 나에게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주셔서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를 만나주셨다. 예수님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AD30년 경에 돌아가셨다고 하면 성경이 기록된 50년부터 100년 사이, 20년에서 70년 사이 예수님과 직접 동시대를 살았던 제자들, 말씀을 전해 들었던 사람들, 따르던 제자들, 추종자들 가운데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만나주신 사건들, 목격자들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부활을 보았다. 부활하신 후에 40일을 거하셨다. 땅에 거하시면서 그 시대 제자들, 믿는 사람들, 성도들의 무리를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만나주심으로 그 사람들에게 나의 부활은 확실하게 몸의 부활임을 알리셨다.

몸의 부활이 아니라고 하는 무리도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부활을 이야기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성경처럼 부활을 믿지 않는다. 몸의 부활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자유주의 신학. 18세기 계몽주의 발전하면서 사람의 이성이 성경 위에 놓여졌던 시대. 이 사람들은 과학이라는 말로 성경을 분석하고 이해해야 하니 사람의 이성과 과학적인 방법에 맞지 않는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이 불합리한 성경의 기적을 다 걸러내야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말씀을 알 수 있다. 소위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모든 성경의 기록들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 그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거기 나오는 기적은 이성적으로 납득해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해야 한다.

오병이어.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입장으로 생각해보자.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만 5천 명 먹였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최소한 1만 명.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떼어 줘서 갖다 먹여라. 손에 있는 오병이어가 1만 명을 먹일 만큼 계속 늘어요? 말이 안되고 과학적이지 않다. 자유주의 신학 하는 사람들은 그 본문을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물질세계를 임의로 다스리는 분이다 설교 못한다. 그러니 어떻게 설교하나? 이것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나타내 보이신 기적적이고 놀라운 사건이 아니었고, 그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점심들 챙겨서 왔는데 아무도 자기 것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린 소년 하나가 자기 점심으로 챙긴 것을 예수님께 갖다 바치는 것을 보고 나머지 사람들도 아이가 저렇게 하는데 우리도 풀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래서 싸온 보따리를 여기서도 풀고 저기서도 풀고 하다 보니 넘치도록 배부르게 먹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개인주의 적이고 이기적인 생각 버리고 함께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내 것을 푸는 것이 믿음 생활을 잘하는 것이다. 주일학교 교재를 찾아보라.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도 있다. 설교 집에 설교를 더러 찾아보면 그렇게 쓰여진 설교집이 있다. 왜? 기적을 믿을 수 없다.

출애굽 사건. 홍해를 건넌다. 원래 홍해는 붉은 갈대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모세가 어떻게 이 바다를 가르는 게 됩니까. 이게 말이 안되니까 모세가 건넜다는 홍해는 갈대가 많이 자랐던 물 깊이가 무릎 정도 되는 습지, 늪지일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걸어서 건넜다. 그럴듯하다. 출애굽 사건을 보면 두 군데로 이야기 한다. 하나는 갈대밭이고 다른 하나는 깊은 물이다. 어떻게 바다가 갈라지느냐, 하나님께서 어떻게 동풍을 보내서 갈라지게 하나. 신학생 하나가 그렇게 이야기 했다. 교수님이 그렇게 이야기 하셔도 그것은 기적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릎밖에 안가는 늪지를 건넜다고 합시다. 그런데 뒤에 따라온 애굽 군대는 말을 몰고 온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그 속에 빠져서 죽었다고 하니, 몰살을 당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릎 깊이로 출애굽 한 것은 이성적으로 설명되지만 뒤에 따라온 애굽 군대가 수장된 것은 설명이 됩니까?

성경에 나오는 엄청난 기적들. 이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부활을 믿을 수 없다.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부활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합리적으로 납득이 되게 해야 한다. 그 일을 시도한 사람들이 6가지 정도 예가 있다. 자유주의 신학 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첫째 도둑설, 거짓부활절. 마28:11-15. 부활하신 후에 제사장들이 와서 군인들에게 돈을 주고 시체가 어디 있냐고 묻거든 제자들이 와서 훔쳐갔다고 이야기 하라. 레이 마르스라는 사람이 그 본문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만든 거짓말이었다. 감춰놓고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이야기 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까지는 먹고 살게 걱정이 없었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호구지책에 문제가 생긴다. 자기들의 먹고 사는 문제 해결 위해 시체를 훔쳐서 없애 버리고 부활했다고 해서 사람들을 미혹해서 예수님을 믿게 했다.

그런데 이게 말이 안된다. 사람은 자기가 한 거짓말 때문에 목숨에 위협을 당하게 되면 목숨에 위협을 받으면서까지도 자기가 한 거짓말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제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요한을 빼고 거의 다 순교 당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정말 부활했다고 하는 부활의 사건을 본인들이 이야기하는 목격자로서 주님의 역사를 따라 산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면 부활이 없는데 시체 훔쳐다 감춰놓고 사람들에게 와서 예수님 부활했다고 이야기 하는 게 힘이 있을까?

둘째는 기절설. 폴루스라는 사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었다고 생각할 때에 사실은 죽은 게 아니고 코마상태였다. 의식이 없는 무의식이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이 죽은 것처럼 보이니 묻은 것이다. 무덤에 장사했는데 복음서 기록에 보면 지진도 나고 향을 많이 발랐다. 습기도 차고 향 냄새도 나고 이거 저거 합쳐져서 코마상태에 있다 깨어 나셨다. 자기가 죽었고 부활했다고 하고 죽으면 안되니까 잠깐 보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말에 문제는 어디 있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고 죽었다고 할 때 로마 군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옆구리를 찔렀다. 대부분 심장이라고 생각한다. 찔렀다면 코마 상태였다고 한들 살기 어렵다.

셋째는 환각설. 스트러스. 예수님이 죽은 것은 정말 죽었다. 성경에 보니 안 죽었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부활한 것은 아니다. 단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예수님을 너무나 사모했던 제자들이 그만 너무 사모한 나머지 예수님을 환각 속에서 봤다. 비전 속에서 봤다. 그리고 나서 그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너무 사모하면 뭐가 보인다. 그러니 예수님을 그렇게 보고 믿던 사람들이 부활했다고 했다.

어떤 문제가 있나. 그게 한 두 사람의 이야기면 말이 된다. 한 두 사람은 미친 것처럼 예수님을 사모할 수 있다. 막달라 마리아가 환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보면 예수님 만난 증인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실 때 혼자 있을 때만 아니라 두 사람, 열 두 제자, 오백 명 모였을 때 보이셨다. 오백 명이 다 헛것을 볼 수 없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 아니었다고 해야 자연법이 어겨지지 않고 기적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넷째는 전보설. 칼미.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몸의 부활은 아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하면 영적인 부활이다. 영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신 것이다.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내가 영으로 하나님 나라 왔다고 제자들에게 이야기 하라, 영적으로 부활했다고 이야기 하라고 했다는 것. 전보 치면 짧은 문장 갖고 내용 전달한다. 영으로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내가 부활했다고 이야기 하라고 한 것.

다섯째는 잘못 찾아간 무덤설. 막달라 마리아가 너무 당황하고 당혹하고 정말 사모해서 예수님 무덤을 찾아가긴 했지만 시체가 없는 무덤에 잘못 찾아갔다. 다른 사람의 무덤을. 다른 사람의 매장을 위해 빈 무덤을 만든 곳을 찾아가서 예수님이 없으니까 부활했다고 착각했을 것.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말을 (예수께서 돌아가시지 전에) 들은 사람이다. 가서 보니 무덤이 비었으니 부활했다고 이야기 한 것.

여자들은 그랬다고 치자. 여자들의 말을 듣고 누가 따라가나. 베드로가 따라간다. 제자들이 뛰어간다. 가서 빈 무덤을 확인한다.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가 놓여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천사의 음성을 듣는다. 너희들이 찾는 예수 여기 계시지 않고 이미 살아나셔서 너희들 만나겠다고 하는 갈릴리로 가셨다. 그래서 그 말 듣고 갈릴리로 갔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 묻은 무덤을 잘못 찾을까? 여인들은 잘못 봤다고 할 수 있지만 날이 밝고 나서 제자들도?

마지막은 바뀐 시체설. 숀 필드. 지금도 이 책을 판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된 모든 일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있을 때 만든 각본에 따라 움직였다. 아리마대 요셉과 성경에 나타나지 않은 미스터 엑스 라는 사람이 짜고 사실 예수님이 죽지 않았지만 다른 시체를 갖고 예수님이라고 제자들에게 이야기 했다. 무덤이 아니라 시체가 바뀐 것.

어떤 모양으로던지 예수님께서 몸으로 부활한 사실을 부정한다. 믿을 수 없다. 어떻게 사람이 죽은 후에 부활할 수 있나. 예수님은 정말 죽었고 끝난 것이다.

자유주의신학을 반대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몸으로 부활한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이 전통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이야기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소위 발전된 신 자유주의 입장.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는 말은 안 한다. 역사적인 인물 = 예수. 요새 나오는 왠 만한 책들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신앙의 대상 = 그리스도. 쉽게 말해 인간역사는 예수를 이야기 하는 역사다. 예수는 실제적으로 역사를 살았던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역사는 이 역사 속에 들어오는 게 아니다. 이 역사 속에 들어오면 자연법칙이 무너진다. 자연 법칙 속에 초자연이 들어올 수는 없다. 기적이 있을 수 없다. 성경에 나타난 기적에 관한 이야기들은 인간 역사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영적인 역사, 구원의 역사를 이야기 한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몸으로 죽으셨다. 역사적인 인물이니까. 부활하신 것은 영으로 부활하셨다. 부활사건은 영적인 사건이라는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적인 사건은 영적인 사건에 속하는 것이지 자연 법칙에 들어오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영적으로 부활하셨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자유주의 신학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신(영)을 갖고 원수를 사랑하며 사는 사랑의 삶, 도덕적인 삶을 이야기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인 부활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도덕적인 사랑의 세계라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 나라의 계명을 정의할 때에 하나님 나라를 도덕적인 세계라고 이야기 한 사람이 슈바이처다. 아프리카로 간 사람. 그 사람은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믿은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은 영으로만 부활했다고 이야기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 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 구자유주의건 신자유주의건 둘 다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 구 자유주의 신학자 대표적인 사람들 책을 보다 이런 사람들 이름이 나오면 조심해라. 슈바이처, 카임, 하르나, 파스팀. 신 자유주의 신학자들 대표적인 사람들은 누구냐. 칼 바르트, 에밀 쿠르너, 루돌프 등. 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 할 때 영적인 부활만 이야기 한다.

수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라는 뮤지컬. 본적은 없지만 평한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이는 정통 기독교 입장을 대변하는 가극은 아니다. 이 극은 예수님이 죽는 것으로 끝나고 부활이 없다. 거기까지 이야기 하면 역사적인 것에서 그친다. 몸의 부활을 이야기 하는 건 아니다.

예수님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의 믿음이 허망한 것을 좇는다는 말과 같다.

고전15:12-20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놓고 이야기 할 때에 그 부활과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연결시키나. 예수님의 몸의 부활이 없다고 하면 예수를 믿는 말이 헛것이다. 그만큼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몸의 부활을 어떤 방법으로든 왜곡하고 부인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믿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말 속에 소망은 뭐냐. 현세적이다. 왜? 부활이 없으니까.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도 부활한다는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한다.

(17-18, 20절) 지금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같은 부활소망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과 같이 부활의 소망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몸을 잘 가꾸셔야 한다.

몰몬교도들은 몸 관리와 건강에 신경 쓴다. 이 몸이 누구를 나타내는가. 하나님을 믿는 나를 이야기 한다. 그 사람들의 신앙은 체계가 다르지만, 몸에 대해서 의미부여 할 때에 이 몸이 결국은 나와 함께 하늘나라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물론 사도바울이 이야기 할 때 이 혈과 육을 갖고 하늘나라 가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혈과 육이 변화된 것을 이야기 한다. 그렇지 않다면 무덤 속에 혈과 육으로 된 몸이 그대로 있어야 한다. 이 몸이 변화될 때 부활의 몸이 될 "씨앗"이다.

요일 4:1-3.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할 때 왜 영으로 부활했다고 할까요. 합리적으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왜 부정하고, 믿지 않을까? 자유주의 신학을 한다는 말은 무슨 말 이냐면 예수님이 성육신한 하나님임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동정녀 탄생도 믿지 않는다. 성육신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인간 예수로서 죽은 예수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사도 요한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속하고, 믿지 않으면 적그리스도.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뭔가. 충격이다. 한번 와우! 하게 하는 말씀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몸의 부활을 이야기할 때에 몸의 부활이라는 것을 정말 나도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생활 하는가. 아니면 그저 예수의 정신으로 살면 되지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심을 믿지 않는다는 것, 부활하심을 믿지 않는 자들이 적그리스도라면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 믿는 사람들이라고 표방하면서 산다. 그만큼 부활신앙이 중요하다.

부활의 전제.
성경적인 인간관. 보통 사람을 이야기 할 때 영혼과 육체를 나눈다. 영혼과 육체를 나누는 것은 헬라적인 사고방식, 분석적. 사람을 이야기 할 때 보이지 않는 부분과 보이는 부분을 나눈다. 히브리적인 사고방식은 사람이라고 할 때 겉 사람과 속 사람이 같이 있어야 한다. 구약에 나오는 표현에 보면 '나'라는 말을 할 때 우리의 속 사람에 해당하는 표현보다는 지체로 표현할 때가 많다. 하박국에 보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내 장이 떨리고...의역한 분도 있지만, 위, 장, 장기들을 들어서 나를 이야기하는 것이 많다. 구약의 개념은 우리의 몸이나 영혼이 분리된 개념이 아니고 그게 다 '나'이다. 성경공부 할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나와 보이는 나를 구별하려고 애쓰는 것은 우리 몸이 죄를 짓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는 이원론적 생각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다 한 사람이다. 만일 겉 사람이 마음에 안 든다고 쓰레기통에 집어 넣으면 내가 쓰레기통에 들어간다. 그게 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할 때 부활의 대 전제는 우리 속 사람만 구원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겉 사람도 구원하셔야 온전한 사람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의 구속을 이야기할 때 몸을 포함하고 있다. 부활은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할 때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라 구원을 받는다는 말. 우리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하는 것. 그때 우리가 느끼는 하나님 나라의 좋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답고 선한 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우리 몸이 있다는 말은 오감이 있다는 말. 영과 혼이 분리된 것은 의식은 있지만 감각은 없다는 말. 몸이 부활하면 그 모든 것을 온 몸으로 느낀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그 완전한 모습은 우리 상상을 초월한다. 반대로 지옥의 형벌도 똑같다. 몸이 없는 상태에서 고통 당하는 것과 몸이 있을 때 고통은 다르다. 하나님 마지막 심판은 영적으로 괴로워하는 것뿐 아니라 몸으로 모든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게 무섭다.

그래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사소한 말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부활한 몸으로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소망인가. 거기 못 들어 가면 얼마나 절망적인가. 지옥을 우습게 생각하면 안된다. 세상은 아무리 힘들어도 휴식시간이 있고 방학도 있고 하지만 성경에 말하는 지옥은 넌스탑이다. 예수 잘 믿을 필요가 있다. 신앙생활 잘 할 이유가 있다. 왜냐면 부활은 온전한 사람을 전제하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보면 선악과와 생명과가 있다. 생명과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었다. 선악과는 죽음을 통과하면서 영생에 나가는 길이다. 그걸 곰곰히 생각해보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의 축복은 영생이라고 한다면 전체 흐름과 맞물려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고 축복이 뭐냐 할 때 모호하다. 진정한 축복은 영원한 생명의 축복이다. 영생을 소유할 뿐 아니라 몸으로도 소유한다. 그래야 영원한 하늘나라가 본향이 된다.

부활의 주체.
누가 부활하는가. 마지막 때에 부활한다고 하면 예수 믿고 죽은 사람만 부활하나. 요게 이제 많은 사람들이 헷갈린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활은 예수 믿는 사람들만 하고 안 믿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 부활은 믿는 사람하고 안 믿는 사람하고 한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을 얻었고' 예수를 믿는 게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하지 않고 얻었다고 하는 이유가 뭔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축복은 (이미) 영생을 얻은 것이다. 이 부활을 믿는 신앙이다. 부활을 믿어야 영생을 얻었고가 된다. 옮겼다.

요5:25-29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일어날 때 선한 일을 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 성경이 말하는 선과 악의 개념은 도덕적인 선과 악의 개념과 조금 다르다. 포함되지만 포괄적이다.

부활의 필요성.

타락한 자들은 겉 사람을 갖고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물려 받을 수 없다. 혈과 육은 뭔가. 피와 살. 몸, 육체다. 몸 이 상태를 갖고는 하나님 나라 갈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아담과 하와 죽는다고 했는데 왜 안 죽었냐고 했냐. 몸으로는 죽었나 안 죽었나. 나무가 있는데 가지를 잘라내면 그건 살은 것이냐 죽은 것이냐. 잘라진 그 순간에 보면 원래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와 잘라진 가지와 구별이 안된다. 잘라진 가지도 물 속에 꽂아 놓으면 오래 산다 그러니 살았다고 해야지 죽었다고 하냐. 그러나 잘리는 순간에 죽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도 먹으면 죽으리라 한 그 순간에 죽은 것이다. 몸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속의 계획 때문에 일정한 수명을, 그 기간 동안을 사는 것이지 결과적으로는 죽었다. 결과적으로 아담이 이브가 죽었다. 시간이 지나면 잘린 가지가 마르듯, 죽었다는 것이다. 그 몸으로 영원한 생명 얻지 못하기 때문에 죽지 않을 몸이 필요하다.

부활신앙의 비전. 어떤 몸으로 부활 할까.
고전15: 35-49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썩을 것으로 심고= 겉 사람,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욕된 것으로 심고. 부활의 몸은 훨씬 더 영광스러운 몸을 바라보게 한다. 약한 것으로 심고. 왜 우리 몸을 약한 것이라고 하나. 이 육체를 가진 동안에는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 몸은 약한 몸이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강한 것으로 다시 살 때 그 몸은 병들지 않고 늙지 않는다. 영원히 팽팽하다. 영원히 단단하고 강하다. 죽지 않는다.
(44절) 신령한 몸은 영적인 몸이다. 부활의 몸은 몸은 몸이지만 예수님의 몸 같은 영적인 몸이다. 그 몸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는 몸이다.
(45-49절) 흙에 속한 자는 아담, 하늘에 속한 자는 예수님. 그럼 우리가 부활할 때 누구의 몸과 같을까? 예수님이다. 부활하셨을 때 어떤 몸이었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고 사방이 잠겨 있었다. 도마가 눈으로 보기 전에 못 믿는다 할 때 예수님이 오셨다. 어떻게 오셨나? 홀연히 오신다. 문 열고 오신 게 아니라 그냥 나타나셨다. 가실 때도 홀연히 가셨다. 그 말 속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하나님의 나라가 얼만큼은 중복되어 있다는 말일 수 있다. 주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지만 들어왔다가 가셨다.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셨다. 그런 주님이 호숫가 옆에, 갈릴리 바다에 가서 베드로와 제자들이 고기 잡는다.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고기를 굽고 음식을 준비 하신다. 제자들보고 와서 먹으라고 하면서 자신도 먹는다.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에 황당하게 생각했다. 부활한 예수님을 볼 때 유령인가 생각한 제자들이 있어서 예수님이 먹을 것을 가져와라 하고 먹었다 유령은 몸이 없다. 홀연히 나왔다 가시는 분이 몸이 있나? 그게 과학적으로 설명되나. 먹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분이 부활이다. 왜 우리가 이 썩을 몸을 씨앗이라고 하나 이 몸으로 심고 거두는데...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게 그거다. 쌀 모양의 씨를 심지만 자라는 것은 모양이 다르다. 상상이 안 된다. 도토리 심는데 도토리 나무가 그려지나? 우리의 몸이 부활의 몸으로 부활한다고 할 때 얼마나 익사이팅하는가 하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부활한 몸 같은 것이다. 그게 얼마나 좋은 것 인가.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사는 것이다. 그 몸을 덧입기 원한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이야기 할 때 우리가 부활하는 것은 우리 몸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새로운 옷을 덧입는 것이라고 한다. 새로운 옷을 입는 것이다. 주님의 몸과 같은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날 때 이건 우리에게만 놀라운 일이 아니라 만물을 새롭게 하는 놀라운 소망이 함께 있다.

로마서 8:18-23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를 때 만물이 해방 받는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속의 역사가 이 속에, 부활이라고 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사 66장. 여호와의 증인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서 이뤄진다고 하지만 이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이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새로운 장소가 된다. 그것은 짐작을 할 수 없을 만큼 좋다. 부활의 몸이 우리 상상을 초월할 만큼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주님 오심을 고대하고,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살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하늘나라 못 가면 그 다음에는? 가는 사람들만 행복하다.

고전 15:20-26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3절) 부활의 첫 열매는 그리스도이고 다음에는 '그에게 붙은 자요' 즉, 믿는 자들.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다. 전 천년설을 믿는 사람들의 부활의 타이밍과 우리가 믿는 때와 다르다. 예수님이 첫 열매, 주님 오실 때 예수 믿는 사람, 심판 때에 안 믿는 사람들. 믿는 사람들이 부활하고 안 믿는 사람들이 부활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갈지 모르지만 순서적으로는 주님이 이미 부활하셨고 주님이 오실 때 우리가 부활하고 이후에 안 믿는 사람들이 부활해서 심판 받는다.

부활신앙의 유익
롬6장과 골2장
첫째는 내가 누구냐라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이야기 해준다.
롬6:3-5, 12-14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님이 죽을 때 우리가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했다. 부활할 때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다시 살아났다. 우리에게는 영적인 사건이다. 그러면 여기 나오는 세례가 물세례인가?

골2:11-12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리스도의 세례,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 성령세례. 우리가 세례를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이 사건이 영적이라고 하면 물세례가 아니라 성령세례다.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곧 예수님과 영적으로 연합해서 죽고 다시 살아난 것을 말한다. 진짜 중요한 것 물어본다. 여기 보면 이는 경험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안다. 왜 우리가 성령세례를 통해 중생한 사건을 이야기 할 때 경험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는가. 그 말은 우리가 영적으로는 부활했다는 말이다. 복음서를 읽을 때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했나? 얻었다고 했다. 어떻게 영생을 얻었다고 했나. 거듭나서 우리의 속사람. 부활할 때 영생을 가진 생명, 예수님과 같은 영원히 사는 생명의 본질, 씨앗이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씨가. 생명의 씨가 우리 속에 있다. 속 사람이 부활한 것을 믿는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이고 영생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었고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죽을 때 나도 죽고 살리실 때 나도 살리신 믿음을 갖고 내가 새사람이 된 것이다. 롬1장 뒷 부분에 너희가 죄의 종 노릇하지 말라고 할 때 이 몸은 실제 예수님과 연합해 죽고 부활하지 않았지만 이 몸도 실제로 죄에 대해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부활한 몸인 것처럼 의의 병기로 하나님을 위해서 써라.

부활신앙을 갖는다는 말은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때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다는 지 확실하게 믿게 해주는 말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정말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이 구원의 사건이 얼마나 자유함을 주는가.

(골2:8-23) 9절. 그 안에-그리스도 안에. 세상 사람들의 헛된 거짓말을 따라가지 말라. 10-너희도-믿는 자들은 골로세 교인들(그 당시). 골로세 교인들 전체인가 몇몇을 놓고 이야기 하는가?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골로세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차이가 별로 없었다고 생각하나. 골로세 교회 교인들은 오늘날과 달라서 다 성령충만, 그리스도 충만했을까. 여기 보면 그렇다고 했다. 너희도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졌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하게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해졌다. 예수님과 연합해서 죽고 부활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진 사람이라는 것을 믿길 바란다. 예수를 믿으면 충만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있으면 롬8장 10절처럼 그리스도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충만해진 사람이라고 선포해야 한다. 믿음으로 안다. 11-15절. 여기가 우리가 믿음생활 할 때 승리할 수 있는 담력을 갖게 해주는 선언이다. 죄와 싸워 승리할 수 있다. 왜냐면 더 이상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빚문서, 율법문서는 도말 해버렸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으셨다. 그 정세와 권세를 벗어버렸다는 것은 무장해제 시킨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의 인도를 따라 살려고 하면 살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의 몸을 부활하지 않았어도 죄의 병기로 사용하지 말고 의의 병기로 사용하라.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지만 아직도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뭔가 더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뭔가 더 신령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뭘 하느냐? 세가지. 16-17절 율법적인 말이다. 유대인 가운데 예수 믿는 자들은 그런걸 해야 더 믿음 생활을 잘 한다고 했지만 사도바울은 그런 것에 신경 꺼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율법주의자들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율법을 지킨다고 더 신령한 것은 아니다. 그 말이 하나님 말씀 지키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지고 구원받고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말씀을 즐겨서 사는 것이다. 두 번째는 18-19절 신비주의. 그 사람들은 뭔가 보고 경험하고 해야 믿음이 좋아진다고 생각. 더 신령해진다고 생각. 사도바울은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머리를 붙잡지 않는다. 머리는 그리스도다. 주님을 좇는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들의 신비한 경험과 이상적인 어떤 걸 추구하는 지 몰라도 예수를 붙잡지 않는다. 머리를 붙잡지 않으니 연합이 안 된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믿음 좋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교회가 시끄러워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거다. 진짜 믿음 좋은 사람이 머리인 그리스도를 붙잡으면 다 연합 되야 하고 자라고 성숙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야 하는데 신비한 걸 추구하고 좇아가니 다른 사람보다 항상 더 신령하고...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도움이 안 된다. 생명의 원천인 소스가 그리스도가 아니니까. 세 번째 20-23절 금욕주의. 금욕을 통해, 육체를 제어한다는 것 때문에 속 사람이 더 신령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믿으면 율법주의신비주의 금욕주의라고 하는 가르침에 유혹을 받을 이유가 없다. 그것들로부터 주는 자유함. 여기서 가장 우리 마음을 흔드는 말이 뭔가. 일부러 겸손한 것처럼(18절). 그것은 신앙생활 아니다. 오늘날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다.

3장 1-5절.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 하나님의 보자기 안에 싸여진 생명이다. 더 부족한 게 있나 없나? 없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우리가 정말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면 믿음 생활 잘하는 것은 사람이 말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과 연합해서 죽었고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우리 생명의 원천은 주님이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부활할 그 날을 바라보면서 지체를 죽이는 삶을 사는 게 가능하다.

결론 빌3:7-14절. 사도바울의 목표는 예수님의 부활에 이르는 것이다. 푯대를 향해서 나아간다.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몸의 부활에 참예하는 것이다.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푯대는 예수님의 부활에 참예하는 것이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산다. 현세에서는 건강한 사람만 하나님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은 아니다. 병든 사람도 하나님 찾고 구원받아야 한다. 돈 많은 부자들만 예수 믿고 사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가난한 그 상태에서 예수 믿고 하나님 찬양하는 믿음생활 해야 한다. 우리 삶의 상황과 관계 없이 육체와 연관 된 것과 상관 없이 주어진 여건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 예배하면서 몸의 부활을 소망하며 산다. 왜냐하면 이 몸을 갖고 세상을 사는 날 동안 슬픈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고 억울한 일도 있고 감사한 일도 잘살 때도 있고 바닥을 길 때도 있고 건강할 때도 있고 병들 때도 있다. 그 현실을 인정하고 내 모습 그대로 불러주심에 감사합니다 할 때에 진정으로 우리 몸을 드려 섬기는 삶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게 부활신앙이다. 

조영팔 목사(컬럼버스장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