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 목사(전 미주장신대 총장)
김인수 교수(전 미주장신대 총장)

여전도회 사경회 때 금주 강연을 하고 전도할 때에 금주에 대한 전도지를 나누어 주면서 이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1927년 11월 황주에서 열렸던 주일학교 연합대회 기간 중에 '주마정벌'(酒魔征伐) 행군식을 갖고 금주 운동에 동참하였다.

「기독교신보」는 손정규의 금주 강연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죠션 녀자 금쥬회 총무 손메례 녀사는 본회 임무를 띠고 젼션 각디로 순회하며 금쥬 션젼에 항샹 만흔 활동을 하야 가는 곳마다 셩적이 자못 량호 ᄒᆞᆫ바 ... 평북 션쳔군 남면 봉동이란 슈구(守舊)의 풍이 가장 만흔 곳에 가서 도도ᄒᆞᆫ 열변으로 만흔 군중을 감동식힌 결과 감각이 예민한 회면 면장은 자긔가 일 면민의 머리가 되어 일향 광음 난취한 행동을 하면 불가하다 션언하고 당장에 금쥬하기로 결심하였다 하며 츙남 공쥬에 갓을 ᄯᅢ에도 역시 금쥬 강연을 ᄒᆞᆫ바 그 디방에 술 먹기로 유명ᄒᆞᆫ 사람이 회개하고 연보를 거둘 때도 가장 만히 동졍하였다더라."

이 금주운동에 특히 적극성을 보인 교회는 구세군이다. 구세군은 창설 때부터 사회악의 척결을 목표 세운 것에 발맞춰 적극적으로 이 운동에 협력했다. 그들 기관지 「구세공보」에 금주 호를 특별히 제작하여 살포하고 악대를 동원하여 가두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교회가 금주운동을 전개하는 중 가장 괄목할 만한 일은 미성년자들에게 술과 담배를 금하는 법령을 만드는 일을 성사시킨 것이다. 1932년 12월 범교단적으로, 그리고 사회 지도자들까지 망라하여 총독부를 상대로 미성년자 음주, 끽연 금지법 제정을 요구했다. 마침내 1938년 4월 '청소년 보호법'을 만들 때, 미성년자 음주, 흡연 금지 조항이 포함됐다.

교회가 벌인 금주운동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1931년 「신정찬송가」출될 때 임배세(林培世)가 지은 '금주가'가 정식 찬송가로 채택됐다. 당시 많이 불렸던 금주가의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말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될까 늘 두렵다.

패가망신될 독주는 빗도 내서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야는 일 전 한 푼 안 쓰려네

전국 술값 다 합하야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수양 늘 식히면 동서문명 잘 빗내리

천부 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께 밧은 귀체
술의 독기 밧지 말고 국가 위해 일할지라

후렴: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조선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잇나니라

한국 교회의 금주운동은 널리 확산되었고 「기독신보」는 구세군의 지원으로 1년에 1회씩 금주호(禁酒號) 특집을 발간해 계몽활동에 적극 협력했다. 그러나 일제는 교회가 중심 돼 활발하게 전개하던 금주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1935년 금주 강연 금지령을 내리고 더 이상 금주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악랄한 와해공작을 자행했다.

금주 운동과 더불어 금연운동, 금아편운동도 지속적으로 펴 나갔다. 이 운동은 이미 초창기 선교사들에게서 비롯됐다. 주한 미국 공사를 지냈고 후에 주(駐) 뻬쩨르부르크(Petersburg) 대사를 지낸 록웰(W.W.Rockwell)이 한국의 내륙 지방을 여행하고 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들은 한국인들이다."라고 술회한 일이 있었다. 선교사들은 가난하여 굶어 죽는 이들이 많은 때 어디서 돈이 생겨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개탄하며 금연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조선그리스도인회보」에 "담배를 과히 먹는 사람은 여러 가지 병이 잇나니 힘줄이 약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염통이 더 벌덕 벌덕하고 수전증이 나고 안력에 대단히 해롭고 여러 가지 병이 많으니라."고 기술하여 흡연이 건강에 얼마나 해로운가를 일깨우고 있다.

1903년 감리교 연회록에 절제와 사회개혁 프로그램에서 담배와 궐련 사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1. 직분을 맡은 자는 절대로 담배나 궐련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2. 직분을 맡지 않은 교인의 담배와 궐련 사용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저지해야 한다.

한 일본인은 조선을 망하게 하는 몇 가지 가운데 흡연을 지적하면서, "한국인들이 걸으면서도, 일하면서도, 말하면서도 긴 담뱃대를 놓지 않는 데 놀랐다. 잠깐 여행하는 데도 귀중하게 두서너 대씩 담뱃대를 가지고 가는 것을 많이 보는데 그들은 그것을 마치 중요한 재산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비판한 바 있다.

감리교회에서도 후에 금연운동을 전개하면서, 흡연의 해독 네 가지를 지적하였는데, ① 흡연은 신체에 해되고,......② 흡연은 총명에 해되며......③ 흡연은 도덕에 해되며......④ 흡연은 경제에 해된다.며 계몽하였다. 따라서 금연의 논리는 교리적인 것보다는 건강, 경제 등의 이유로 교회가 금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12년 장로회 창립총회 평남노회 보고에서 황주군(黃州郡)의 각 교회에 속해 있는 계연회(戒煙會)에서는 전도인 1인을 황주군 동면(東面)으로 보냈고, 기타 전도인을 세운 일이 많다고 보고했다. 금연운동은 일본 유학생들에게까지 확대되어 동경 유학생들이 단연회(斷煙會)를 조직하고 담배를 끊고 모은 돈으로 가난한 유학생을 돕는 일을 하였다.

일제가 한국의 청년들을 피폐화시키기 위해 아편을 대량으로 재배해 피우게 하는 악랄한 정책을 편 것에 대해 교회는 단호한 태도로 이를 견제하였다. 1909년 선교부는 샤록스 (A.M.Sharrocks), 휫팅(G.Whiting)에게 이 일을 전담시켰다. 총회 결의로 의사가 병원에서 환자에게 사용하는 것 외에 교인은 아편을 먹거나 사용하거나 아편을 심는 것, 매매를 금하고, 이를 행하는 자가 있으면 당회에서 치리케 했다.

이효덕(李孝德)은 「절제」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금주, 금연 운동과 더불어 색옷(色衣)입기운동을 펼쳤다.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이 흰옷을 입어 왔으나 흰옷은 쉽게 더러워지고 자주 빨래를 해야 함으로 물자, 시간, 정력이 낭비됨으로 색옷을 입어 이런 낭비를 막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당시의 유일한 기독교 신문이었던 「기독신보」에 '절제'란을 고정적으로 설치하여 금주, 금연, 폐창(廢娼)에 관한 글들을 계속 게재함으로써 절제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