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웨인 그루뎀이 여성 성직 안수를 복음주의적 페미니즘으로 규정하고, 신학적 자유주의와 동성애 문제로 향하는 통로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서너 가지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는, 복음주의 내 여성 성직 안수는 복음주의적 페미니즘과는 발원적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전자가 순수한 신앙적 '콜링(calling)'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신앙과 무관하게 여권 신장을 주창해온 사회 운동적 계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이런 이상한 합성어가 생겨났는지 모르겠지만, 복음주의 내 여성 성직 안수를 외견상 평등주의 즉 여성의 권리 신장이란 측면으로만 보아, 기독교와는 근본 계보가 다른 페미니즘의 전통과 혼동해 자유주의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생각해 보자. 기독교의 근본 신조를 전면 부인하는 영성이라곤 전무한 신학적 자유주의가 뜬금없이 제 멋에 겨워 여성의 성직 안수를 찬성한다 해서, 복음주의 내 여성 성직 안수마저 자유주의와 한통속으로 몰아, 마치 복음주의 목회자들을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도록 유도하는 통로인 양 희생양으로 삼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루뎀의 문제는 신학적 자유주의가 여성의 성직 안수를 찬성하는 쪽으로 기우는 현상을, 무모하게 복음주의 내 여성 안수의 본질적 진의와 구분 없이 연계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루뎀의 경직되고 편협된 관점에서 비롯된 이와 같은 주장은 하루가 다르게 질주하는 혼돈의 세상의 일선에서, 남녀 종들이 함께 힘을 모아 영적 전투에 사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구태를 못 벗어난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논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둘째로, 복음주의 내 여성 성직 안수는 근본 취지에 있어 신앙적으론 특별한 정황적 콜링으로 이해할 문제이며, 신학적으론 공동체적 맥락 안에서 해석학적 접근이 필요한 문제로 이해해야 한다.

미국 사회와 같이 여성의 권리가 한국보다 훨씬 먼저 신장되고 자유주의 여성 신학등이 주류를 이루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복음주의 내 여성 성직 안수 문제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거나 부인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그루뎀의 주장은 사회 현상의 다중적 사조에 너무 압도당한 나머지, '콜링'이라는 신앙의 근본적 핵심마저 비껴간 사려 깊지 않은 소견으로 들린다.

반문해 본다. 그렇다면 남성 목사 안수는 그 동안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거나 부인하는 결과로 이어져 오지 않았는가?

세속적 세계관들의 난립 속에서 세상의 사회·정치·문화적 의제의 수용이 남성 위주의 교회와 사회 전체에 가속화 되어온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유독 여성 성직 안수에 이 모든 원인 제공의 책임이 있는 양 의심의 눈을 흘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성경의 권위, 즉 기독교의 권위가 어떻게 세상에서 존중되고 어떻게 추락되는가를 여실히 그리고 충분히 겪어오지 않았던가? 더구나 한국적 상황에서....

여성에 관해 언급한 성경의 내용들은 노예제도에 관한 내용처럼 정경이 기록된 시대적 정황에서 해석될 필요가 있는 바, 보편적 선의 점진적 실현을 위한 과정적이고 상황적인 융통성이 요구되는 사안에 해당한다.

실제 가장 근본주의적인 미국의 한 교단에서는 여성 안수를 유보하고 있지만 여성의 선교사직에 대해선 적극 권유하고 인정할 뿐 아니라, 남편이 선교사이면 아내도 자동적으로 선교사로 간주한다. 선교사직 또한 성직이고 목회직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구약에 나오는 여성 나실인이나 여성 선지자, 여성 사사 등 여성의 콜링은 복음주의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평등주의라 부르는 여부와 관계없이, 그루뎀도 인정한 바 오순절 신학이 근거로 삼는 말씀인 '남종과 여종에게 주의 영이 동일하게 고루 부어진다'는 의미에서의 평등주의에 해당한다.

설사 신학적 자유주의화가 여성 성직 안수 시기와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양자는 각기 상이한 성격의 내용을 지닌 것으로, 복음주의 내 여성 성직 안수에 있어 콜링이라는 본질적 사안의 중요성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웨인 그루뎀의 <복음주의 페미니즘>.
웨인 그루뎀의 <복음주의 페미니즘>.

셋째로, 복음주의 내 여성 성직 안수는 한국 기독교 사회의 특수한 환경을 고려할 때 더욱 권장되어야 한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인본주의적 유교 문화의 오랜 전통과 더불어, 성직의 신성한 권위를 부당한 남성적 권리로 착각 오용하는 일부 몰지각한 성직자들의 불미스러운 폐단이 교회 안에까지 암암리에 천착되어온 편이다. 이런 일들은 바다 건너 교포 사회 내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미국 설교자들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바, 경우에 따라 여성 일반에 대한 몰인격적이고 무례한 표현이 아무 거리낌 없이 공공연하게 자의적으로 행사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이런 부조리한 토양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할 심각한 과제를 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복음주의 내 여성 성직 안수의 성격을 사색해볼 때, 예외성의 본질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된다.

우리의 실존이 본질로부터 멀어진 사건을 소외라고 주장한 틸리히의 표현에 앞서, 실존이 본질에 충실하므로 사실과 진실이 하나가 되었던 에덴의 초기 시절이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본질적 실존과 진실적 사실로서 남자와 여자-사람을 창조하셨다. 인류 최초의 부부 관계는 지배와 종속이 아닌 연합과 조화와 일치의 관계였으리라....

그러나 인간의 소외 사건(타락) 이후 오랜 세월,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은 비본질적 실존과 비진실적 사실들이 주도적으로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좀더 본질과 진실에 접근하고자 예외(例外)성이라는 것을 탄생시켰다.

그 후 이 예외성은 세상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신념과 가치를 정당화하는 장치로 쓰였다. 미국의 도덕주의와 이상주의, 구원주의(Messianism)적 외교정책은 곧 예외주의(exceptionalism)를 반영한다고 하지 않는가?

남성 우월주의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옛날에 여성에게도 나실인 제도가 허용되었던 것에 대해(민 6:2), 우리는 세상적 코드에서 말하길 '그 제도는 성차별을 넘어 여성도 하나님 앞에서는 동등한 인격체로서 독립적이고 자원적으로 헌신할 수 있도록 허용한 파격적인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가 경탄스럽게 표현하는 이런 예외성이란 것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본질/본성의 자연스런 표출이 아니겠는가?

그루뎀이 염려하는 복음주의적 페미니즘은 결혼생활이나 교회에서의 지도자적 위치가 남자에게만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운동이라지만, 진정한 복음주의는 예수의 영 안에서 서로가 하나로 연합되어 함께 조화를 이루며 세워져가는 관계일 것이다.

진정한 복음주의라면, 남편의 동의와 적극적인 후원을 힘입어 성직 안수를 받은 아내에 대해 지도자적 위치를 남편이 포기하고 아내가 찬탈했다고 정죄할 수 있을까? 순종의 대상에 대한 성경적 함의엔 신앙심이 전제된 경우가 다분히 있다.

또 진정한 복음주의라면 남편과 사별하였거나 학대적인 남편 혹은 장애가 있는 남편, 또 이런저런 말 못할 상황에서 고통을 당하던 여성이 은혜의 빛 속에 콜링을 받고 안수를 받도록 인도된 것을 성경에 반하는 행위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루뎀이 아닌 누구라도 복음의 진리와 콜링의 의미를 생각함에 있어, 이런 개별적이고 고유한 정황적 삶에 주의를 기울이고 해석하는 것을 간과한 채, 마치 이런 여성들이 성경의 온전한 진정성과 유일무이한 절대적 권위를 부인하는 자유주의를 부추기기라도 한 것처럼 왈가왈부한다면, 정말 신약적 율법주의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그루뎀은 질문하기를 "성경을 더 이상 믿지 않는 자유주의 교회들이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거나, 성경의 무오성을 강하게 믿는 가장 보수적인 교회들이 그것을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존재할까?" 하였다.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단연 "그렇다"이다.

왜냐하면, 삶과 동떨어진 말씀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야 했던 주님이 아니셨던가?

그루뎀이 좀 더 깊이 통찰한다면, 복음주의 내 여성 성직 안수는 창세기와 바울의 주장을 부인하거나 사본의 성경 본문 부인이나 경시와는 결이 다름을 감지할텐데, 그는 여성 목사 안수가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의 말씀을 하나씩 거부하는 습관에 젖어들게 할 것으로 염려하고 있다.

그의 염려는 노파심을 넘은 불안감으로,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불신적인 발언이란 인상마저 갖게 한다.

한편 페미니즘 성경 해석에 대해 성경을 이렇게까지 희한하고도 부정확하게 해석하는 운동이나 견해는 일찍이 없다고 난색을 표하는 그루뎀이, 여성에 대한 일부 한국 목사들의 모종의 엽기적 발언이나 도올같은 이의 성경 강의를 들으면 과연 뭐라고 할지 몹시 궁금해진다.

또 그루뎀이 말하는 대로 여성들이 세속적인 페미니즘 운동의 결과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주장할 수 있는 새로운 자신감을 발견했다면, 이는 상대적으로 여성들에 대한 교회적 기능의 무능함을 시인하는 것으로, 교회 내 복음의 창조적이고 재생산적 능력의 부재를 웅변하는 것밖에 안 된다.

넷째로, 남성과 여성의 존재적 구분과 동성애 문제를 창조 섭리에 동등한 비중과 성격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점이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적 창조엔 인간의 본질적 가치 차이가 없다. 다만 창조된 순서와 양성간 역할상 차이가 주어진 것인 반면, 동성애 문제엔 피조물인 인간을 통하여 창조주께서 성취하시고자 하는 원대하고 아름다운 구속사적 생명의 법칙에 역행하는 문제가 들어있다.

전자가 피조 세계의 생명적 번영을 이루기 위한 상호 협동과 보완의 성격을 담고 있다면, 후자는 피조 세계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하나님의 양성 창조의 동기와 목적을 무의미화시키는 반역 내지 파괴적인 성질을 띈다.

그러므로 여성 성직 안수와 동성애 이슈는 같은 선상에서 연결적으로 논할 성격이 결코 못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동성애자들이 복음주의 페미니즘과 똑같은 해석학적 도구를 사용해 동성애의 권리를 위해 전통에 도전하고 있다는 그루뎀의 우려 속에는 이미 이와 같은 잘못된 전제가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그루뎀이 성에 대한 복음적 개념을 좀 더 깊이 이해해서, 복음주의 내 여성 성직 안수가 페미니즘과는 다른 성격임을 확신한다면, 동성애자들이 사용하는 페미니즘적 해석학 도구에 무기력하거나 난감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하등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주의 내에서 능히 그에 대적할 수 있는 해석학적 도구와 능력을 갖추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루뎀이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교단들의 7가지 수순을 열거한 것처럼, 필자도 자칭 근본주의 성향의 교단들이 새겨봄직한 7가지 사안을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①성경의 무오성의 의미에 대해 삶의 자리에서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사색한다 ②복음주의 내 여성 성직 안수를 특별한 콜링적 정황으로 이해 한다 ③결혼에서 차지하는 남성의 지도적인 역할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전하고 양육한다 ④여성의 성직 안수를 반대하는 목회자로서 하나님 앞에 조금도 거리낌 없이 떳떳한가 묵상한다 ⑤동성애를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슬픔을 동성애자들이 절실히 느끼도록 한다 ⑥동성애자의 성직 안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고뇌를 주님께 내어놓는다 ⑦동성애자를 교단의 고위직으로 선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주님의 마음으로 연민을 품는다.

종합컨대, 복음주의 내 여성 성직 안수를 페미니즘과 결부하여 이해함으로써 자유주의로 나가는 촉매제인 것 처럼 주장하는 그루뎀은, 성경을 도식적으로 이해하는 경직된 신학자로서 초자연적이고 신비로운 콜링과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해 실제적 이해와 경험이 충분치 않을 뿐더러,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결여된 두려움이 많은 크리스천이라고 느껴진다.

어쩌면 그의 이런 성향으로 인해 그루뎀의 신학이 방법적으로, 어떤 상황적 주제에 대해 공동체적 정황을 도외시한 채, 그저 조각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맥락에 맞지 않는 성경적 인용을 나열한다고 비판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 11:11-12)".

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