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A대표 강순영 목사
JAMA대표 강순영 목사

미국의 제2차 대각성운동 기간에 가장 활발하게 쓰임받은 인물은 찰스 피니였다. 피니는 전도자, 부흥사, 목회자, 신학교수와 학장, 저술가, 사회개혁자로 19세기 전반 미국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피니는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다. "저는 무지와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계속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했고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저를 친히 이끌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모든 사역의 열매들을 그분의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다시 기회들이 주어 진다해도 40여년이 넘도록 부흥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이 일에 다시 쓰임 받고저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운동사에 피니만큼 칭찬과 함께 비판도 많이 받았던 부흥운동가도 없었다. 그의 구원관과 부흥론은 칼빈주의자들로 부터 그 때부터 지금까지 신학적 문제점을 비판 받고 있다.    

찰스 피니(Charles Grandson Finny, 1792- 1875)는 DL 무디보다 55년 앞서 1792년에 커네티컷 주의 리치필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뉴욕 주 오네이다로 이사했다가 예일대학 준비를 위해 커네티컷으로 되돌아와 고등학교를 마친 후에 뉴저지에서 잠간 교사생활을 했다.   

26세 때 뉴욕 아담스에 있는 벤자민 라이트 변호사 사무실에서 도제로 들어가 법률 공부를 시작하며 소송사건을 다루었다. 법률서적을 읽다가 모든 법들이 성경을 기초로 한 것을 발견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게 된다.
   
그의 회심   

성경을 읽다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이제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인가 아니면 세속적인 방식으로 계속 살아갈 것인가 결단해야 했다. 그는 구원문제를 결판짓고 하나님과 화목하기로 결심하고 29세가 되던 해에 마을 북쪽에 위치한 숲 속에 들어가 기도하다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는 말씀이 그의 마음 속에 들어와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던 중 "그의 생애에 가장 깊은 영적 환희"를 경험하게 된다. 그날 밤에 사무실 방으로 돌아와 기도하다가 강한 성령의 세례(충만)를 체험한다.  

"성령께서는 나의 몸과 영혼을 꿰꿇고 지나가는 것 처럼 나에게 임하셨다. 그것은 마치 전류처럼 내게 흘러왔고 사랑의 파도와도 같았으며 하나님의 숨결 같았다. 형용할 수없는 놀라운 사랑이 내 마음에 번져왔기에 나는 말할 수없는 사랑의 감격으로 인해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 라고 그날의 감격을 고백했다.

다음 날 아침에 그 마을 교회 집사가 찾아와 그날 오전에 있을 자기의 변호 건을 상기시켜 주자 피니는 "집사님,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변호를 의뢰 받았기 때문에 당신의 소송 건은 맡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새로운 인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토록 좋아했던 변호사 일이나 돈 버는 일에 흥미를 잃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하는 일의 중요성과 어떤 것과도 바꿀 수없는 영혼의 가치를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이다.

신학교 대신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그는 기성 신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기에 신학교육 대신 프린스톤 출신인 담임목사 조지 게일의 지도하에 게일목사 서재의 책들을 빌려보며 공부한 후에 1824년 32세 나이에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어떤 기록에는 프린스톤을 비롯한 여러 신학교에 원서를 제출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게일 목사의 칼빈주의 인간관과 구원관에 반발했고 구원을 위한 인간의 결단을 중시하는 견해를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일반 목회자들의 근본적인 결함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결핍이라고 보았다. 사도행전 1:4-8 말씀대로 성령의 세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성공적인 목회사역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보고 평생 성령세례를 중시했고 강조했다.
   
피니의 부흥사역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뉴욕 서부지역 여선교회의 부탁을 받고 설교를 시작했는데 성령께 사로잡힌 피니의 열정적 설교로 그 지역 공동체가 영적 각성으로 타올랐다. 집회가 열리는 곳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 사람들이 나동그라지며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했다.    

뉴욕 중부에 있는 로마에서는 20일간 집회가 진행되었는데 강력한 회개의 역사와 함께 로마의 모든 주민이 예수를 영접했고 온 도시가 성령의 임재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의 명성이 소문나자 뉴욕, 어번, 버팔로, 로드아일랜드, 필라델피아, 로체스터, 보스턴 등의 지역에 초청을 받아 가게 된다. 그가 말씀을 선포하는 곳마다 죄인들은 두려워 떨었고 회개의 역사가 강하게 임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다. 그가 지나가는 도시마다 수백명, 수천명의 새신자들이 교회에 등록했다.   

피니는 자신의 회고록에 자신이 인도했던 부흥회에 나타났던 특징들을 "능력 있는 기도의 영이 강하게 나타났고, 자신들의 죄를 깊이 깨달았으며, 사람들이 갑자기 아주 강하게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고 회심한 자들에게 굉장한 사랑과 기쁨이 충만했으며, 회심자들이 바른 정신을 가지고 안정된 모습을 보였고 이들이 매우 진실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였다"라고 기록했다.   

1835년에는 오하이오에 새롭게 설립된 오벌린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신학을 강의했다. 1851년에는 오벌린대학의 학장으로 승진되었다. 30년 동안 교수생활을 통해 다음 세대들을 부흥으로 준비시켰다. 영국에도 두 차례의 방문사역을 통해 웨일즈와 런던에도 큰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기도 했다.
   
피니 부흥사역의 특징들

1, 도시에서 집회를 열기 전에 도시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도팀을 만들어 기도로 준비하게 했고, 그룹별로 가정들을 방문해서 전체 공동체를 전도집회에 동원했다.

2, 그의 설교의 특징은 말씀에 의지해 "변호사적인 설교"를 했다. 열심히 주님을 변호했다.3, 그의 사역 기간 중에 기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함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구했고 기도를 강조했다. 당시에는 남자에게만 회중기도의 기회를 주었었는데 피니는 여자들에게도 처음으로 회중기도의 기회를 주었다.

3, 예배석 앞부분에 구도자 좌석을 만들어 놓고 예배 전이나 예배 중간, 예배 후에 구원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로 나와 결단하고 상담을 받도록 했다. 전도집회 시간에 결단하고 앞으로 나오게 하는 시간을 꼭 가졌다.

4. 회개의 증거로 죄에 대한 고백과 변상을 강조했고 죄고백과 회개를 위해 충분한 기도시간을 가졌다. 그 결과 집회 기간 동안 온갖 죄악들이 자백 되었고 많은 액수의 돈이 변상되었다.

5 그의 마음은 평생 영혼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있었다. 그의 사역을 통해 25만- 50만명이 회심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회심한 사람들의 85%정도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6, 그의 부흥운동의 결과로 노예제도 폐지, 여권 신장, 금주 운동 등의 수많은 사회개혁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그를 통해 회심한 자들이 노예제도 반대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7. 특히 그의 구원론과 부흥론은 알미니안 신학에 기초했기에 칼빈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고 지금도 공격을 받고있다  

인간의 죄성과 원죄를 강조했던 에드워즈와 달리 피니는 인간에게는 복음을 듣는 자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자신의 결단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고 인간의 책임과 결단을 강조했다. 

에드워즈는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고 우리가 할 일은 기도라고 보았고, 피니는 우리가 원하고 조건만 갖추면 언제든지 부흥은 일으킬 수있는 것으로 보아 부흥을 촉진 시킬 수있는 여러가지 방법들을 고안했다. 철저한 회개, 복음전파, 기도의 실천을 통해 부흥을 일으킬 수있다고 주장했다.

피니는 "당신들이 왜 부흥을 체험하지 못하는 줄 아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 즉 당신이 부흥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것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고 갈망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위해 별 노력하지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그가 쓴 부흥론에서 질책하고 도전하고 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피니의 부흥론을 수용하고 있다.

평생 부흥을 사모했고, 자신의 무지와 무력을 인정하며 기도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구했던 피니를 통해 수십만의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셨던 주님! 오늘날도 그렇게 부흥을 사모하고 성령님께 사로잡히기를 구하는 세대들을 일으켜 주소서.

(찰스 피니에 대한 연구는 여러 자료 중에 박용규 교수님의 "세계 부흥운동사"가 많이 참조되고 인용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부흥을 사모하는 작은 종 강순영목사(JAMA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