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 초대교회와 중세시대의 성경 

5부 : 종교개혁 번역의 시작 
6부 : 번역의 역사와 번역판들 

신약성경을 27권으로 확정하는데 필요한 기준은 저자가 열두 사도에 속하거나 바울이거나 사도의 승인을 받은 사람(마가, 누가)이어야 한다. 그런데 일부 저자는 스스로 신빙성과 권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자기가 쓴 내용을 어느 사도가 집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도의 저술이라고 내세우는 위조 저작물에는 야고보의 비서, 도마복음, 바울의 묵시록, 마리아 복음, 진리의 복음, 베드로 행전 등이었는데 복음서만 무려 50권이나 유포되고 있었다고 한다 아타나시우스는 신약의 27권 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는데 히포의 교회회의(393년)와 카르타고의 교회회의(397년)에서 27권을 성경의 정경으로 공인했다. 이는 그동안 교회가 이 책들의 가르침과 예배에 사용해왔던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절차였을 뿐이다. 즉 신약성경이 교회에서 공식으로 채택된 이유가 아니라 내재적인 가치가 있고 직간접적으로 사도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하여 정경에 포함시킨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약 250년 동안 로마 당국에게 끔찍한 박해를 받았다.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이유로 핍박을 당했다. 로마가 정복한 지역의 신들을 로마의 만신에 합병시키곤 하였는데 그리스도인은 이런 시도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였고 사회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비쳤다. 그리스도인에게 닥친 최초의 대규모 핍박은 AD 64년에 네로 황제의 치하에서 일어났다. 네로는 스스로 9일간의 로마 대화재를 일으켰으면서도 비난을 피하기 위해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탓으로 돌였다. 

네로 치하에서 열 차례에 걸친 대규모 핍박이 일어낫다. 150년경 군중은 폴리캅의 죽음을 요구했다. 폴리캅은 당시 86세의 노인으로 젊은 시절에 사도 요한을 알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만 하면 고문을 면해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86년 동안 나는 그분의 종이 었고 그분은 내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어떻게 나를 구원해준 왕을 모독할 수 있겠소?" 라고 대답했다. 

학자였던 터툴리안은 그런 순교자들의 용기를 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순교자의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박해는 312년 콘스탄틴이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컸던 성경 번역판은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70인 역이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5세기 초에 성경 전체를 라틴어로 옮긴 벌 게이트(Vulgate, 
백성의 언어, 대중적인 판)라고 불리는 번역판으로 로마 교회가 1,500년 넘게 사용했다.. 
그러나 대중적인 판이라고 했던 라틴어 성경은 일반인은 읽거나 소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382년 교황 다마 수스는 그의 비서이자 언어학자인 제롬에게 네 복음서의 옛 라틴어 번역판들을 개정하도록 요청했다. 
제롬은 2년 동안 열심히 일했고, 다마 수스가 죽은 뒤에는 베들레헴으로 이주하여 성경 전체를 그 프로젝트에 포함시켰다. 
제롬은 70인 역을 활용하긴 했지만 그리스어가 아닌 히브리어에서 구약 39권을 번역하는 일을 모두 완수했다. 
그는 서문에서 외경은 유익한 책이긴 하지만 정경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성경 번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번역판은 1,500년 이상 로마 교회의 공식적인 성경이라는 특권을 누렸다. 

중세 시대의 성경 

로마 제국의 몰락과 종교 개혁 사이에는 약 천년의 세월인 중세 시대가 있었다. 중세 시대에 교회는 새로 등장한 이슬람의 도전을 받았고, 교회는 십자군 전쟁으로 맞섰다. 로마 교회는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고 교황은 왕들에게조차 영향을 미치던 시대이다 중세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초기에서 1000년이 이른 암흑시대, 1000년에서 1300년에 이르는 고중세 시대, 그리고 1300년에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1492년에 이르는 중세 후기이다. 암흑시대에는 가톨릭 교회가 성경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금지하는 바람에 대다수는 자기 모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없었다. 라틴어 성경만 존재하였고 사제들만 읽을 수 있었다. 1199년 교황 이노센트 3세는 프랑스의 순결파와 왈도파가 번역판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비공인된 성경 번역판의 사용을 모두 금지시켰다. 

가톨릭 교회는 거대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교회의 부와 보여주는 것이 중세시대에 건축한 장엄한 성당들이다. 이 건물들은 규모가 아주 거대하고 건축하는데 엄청난 돈과 시간이 들었다.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려고 면죄부를 팔았던 것이 빌미를 제공해 결국은 마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발표하게 되었고 이것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낳았던 것이다. 중세시대는 걸작품에 속하는 장식 성경을 만든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성경은 삽화, 화려하게 꾸민 첫 철자, 가죽 종이 위에 금이나 은으로 도색한 디자인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귀의 성경이라고도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중세 성경인 코덱스 기가스(Codex Gigas)는 높이 90cm, 폭 50cm, 무게는 약 75kg이나 되었고, 동물 160마리를 이용해서 만든 가죽 종이 책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1200년경 프라하의 동쪽에 있던 한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헤르 마누스 수도사가 수도 서원을 위반한 것 때문에 생매장 선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역사상 최고로 장엄한 책을 하룻밤 사이에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가 그 일을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마귀에게 도움을 청했고, 마귀의 화려한 형상을 성경에 포함시켰다. 
소위 마귀의 성경이라 불리는 코덱스 기가스는 스웨덴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경에는 프랑스 루이 9세를 위해 만들어진 크루세이더 성경, 대머리 왕 찰스가 의뢰해서 만들어진 코덱스 아우레우스, 잉글랜드에서 만든 가장 위대한 예술품 중 하나인 윈체스터 성경, AD 800년 경에 스코틀랜드 수도원에서 만든 라틴어 켈즈 사본 등이다. 

로마 가톨릭의 정치권력화와 권력남용, 그리고 성경의 권위보다 교황의 정치적 권위를 더 높여 군림하는 것으로 결국은 타락을 불러왔고 반대자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정죄하여 통제하고 억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상에 반발하여 개혁을 시도하는 집단과 개인이 생기게 되었다. 
1320년대에 잉글랜드 북부에서 탄생한 존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위클리프는 교회에 타락에 변화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에 교회는 부요가 아니라 가난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고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라고 했는데 이는 훗날 종교개혁의 원칙이 되었다. 
위클리프는 롤라드(Lollard)라고 불리는 순회 설교자들을 파송했는데 이들은 둘씩 짝지어 다니면서 복음과 경건한 삶을 가르쳤다. 
하지만 교회는 롤라드를 이단으로 천명했다. 그중의 일부는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위틀 리프는 라틴어 신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완수했으나 1415년 콘스탄스 공의회는 그를 목이 곧은 이단으로 선포하면서 그의 책을 불태우라고 포고를 내렸다. 
위클리프 번역판은 출교를 당한다는 포고문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널리 유포되었고 지금도 수백 권이나 남아 있다. 
1408년에는 컨터 베리에서 대주교 아룬델의 이름으로 이런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이제부터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권위로 성경의 어느 텍스트든지 영어나 다른 언어로 번역해서는 안된다" 이는 교회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으니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였다.이러한 포고문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이미 변화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0년 뒤에 마틴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이 뒤를 이어 종교 개혁을 이루었다. 

[츨처:카이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