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의 역사

1부 : 마조레트

2부 : 원문의 보존과 사해사본

3부 : 70인역

 

- 신약의 역사

4부 : 초대교회의 성경

5부 : 중세 암흑시대와 번역의 시작

6부 : 번역의 역사와 번역판들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어서 유대인이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동안에는 번역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유대 민족은 아시리아,바빌로니아,폐르시아,그리스,로마 등의 영향을 받았고 BC 3세기 초에 이르면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실종되기 시작하였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이해하는 능력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성경을 그리스어와 아람어로 번역할 필요가 생겨났을 것이다.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구약 번역판은 70인역이라 불리는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는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BC 3세기에 시작된 작업이었다.

이 번역을 둘러싼 이야기는 헬라제국 출신의 장군이었던 프톨레미 필라델푸스가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이집트의 왕으로 집권한 이후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 작업을 명했을 때 그 궁전에서 일하던 한 관료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한 편지가 들려주고 있다.

소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 불리는 이 서신은 현재 그 시대보다 100년 뒤에 쓴 것으로 간주되어 혼란을 주고 있다.

하여간 편지에 따르면 프톨레미는 세상에 알려진 모든 책을 자기 도서실에 비치하기를 원했으며, 그 가운데는 히브리 성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예루살렘에서 72명의 유대인 학자를 알렉산드리아로 데려와서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했다.

모세오경의 번역은 기적같이 72일 만에 완료되었다고 한다.

번역가들은 따로따로 작업을 해 동일한 72편의 번역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구약 전체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데는 실제로 두 세기가 걸렸다.

70인역이 중요한 이유는

첫째 널리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 과거 2천년 동안 구약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경우에 권위 있는 그리스어 출처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사해 사본이 발견되기 전만 해도 가장 초기의 구약 사본은 히브리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된 70인역의 사본들이었다.

70인역은 초기 기독교회의 성경이었고,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을 인용할 때는 보통 70인역을 인용하곤 했다.

에수님과 신약의 저자들은 구약의 39권 중 34권을 인용하였는데 제자들이 살아있던 시대의 랍비 요하난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얌니아 공의회를 열어 그리스어로 된 성경 사용을 배격한 것으로 보아 이 시대에 그리스어 필사본이 존재하였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2300년이나 된 70인역을 아직도 구약의 텍스트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고대 성경 사본은 파피루스나 동물의 가죽을 펴고 문질러서 종이처럼 얇은 판으로 된 두루마리에 기록되었다

오늘날 터키의 페르가뭄에서 코덱스(codex)를 개발했는데 이것이 마침내 두루마리를 대치하게 된다.

코덱스는 종이 양면에 글을 쓰고 접어서 다함께 묶어놓은 것으로 오늘날 책의 형태와 비슷하다.

현대의 책도 코덱스의 형태이긴 하지만 이 용어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 손으로 쓴 원고에 한해서 사용되고 있다.

 

70인역의 사본 파피루스와 코덱스

1. 오리겐의 헥사플라

70인역의 사본은 AD 200년경에 기독교 학자인 오리겐이 작성했던 구약성경 판에도 포함되어 있다.

헥사플라(Hexapla)라고 불리는 이 대조판은 히브리어와 다섯 가지 번약판 등 모두 여섯 가지를 병행하여 수록하고 있다.

 

2.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

구리 광산업으로 부자가 된 미국의 수집가 체스터 비티는 1930년과 1931년에 이집트의 공동품 상인에게서 몇 가지 파피루스를 구입했다.

한 이야기에 따르면 이 파피루스들은 이집트의 콥트 크리스천의 공동묘지에 있는 납골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 신약사본>
(Photo : )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 신약사본>

 

 

총 11개의 사본 가운데 일곱은 그리스어로 구약의 일부를 세 권은 신약의 일부분을 담고 있다. 창세기,에스더,이사야,예레미야,에스겔,다니엘은 AD 200년 경으로 추정되며 민수기와 신명기는 AD 120~150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세권의 신약 가운데는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히브리서,에베소서,갈리디아서,요한계시록을 담고 있다.

신약의 사본은 AD 175~225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유물은 현재 아일랜드의 체스터 비티 도서관과 미시간 주립대에 소장되어 있다.

3. 코덱스 바티카누스

1475년 이래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사본은 AD 3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거의 완전한 그리스어 성경 사본이다.

그러나 신약의 일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4. 코덱스 시나이티쿠스

AD 350년경에 만들어진 시나이 사본은 1844년 이집트의 성 캐서린 수도원에서 폰 티센도르프 백작이 발견하였다.

 

(Photo : )

 

 

수도사들이 구약의 일부를 불을 지피는데 사용하는 바람에 70인역 가운데는 일부분만 남아 있다.

그러나 신약은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성 캐서린 수도원>

성 캐서린 수도원은 모세가 신을 벗었다는 시내산 기슭의 희랍 정교회에 속하는 수도원이다.

기독교가 박해 받던 로마 제국 시대에 순교한 어느 귀족의 딸 이름을 따서 지웠다고 한다.

티센도르프는 23세 때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5세 때 강사로 임명되었으며 27세의 나이에 걸작으로 꼽히는 새로운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당시 가장 오래되고 완전한 세 권의 성경 사본 중 하나는 성경 위에 설교를 써넣은 5세기 성경, 코덱스 에프레미였다.

본래 써놓은 글자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긴 했지만 세계적인 학자들도 그것을 해독할 수 없었다.

마침내 티센도르프가 그 성경 텍스트를 읽어내는데 성공했고, 자기가 읽은 것을 필사하는 데만 2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1844년 봄에 카이로에 잇는 여러 수도원과 도서관을 방문했으나 중요한 사본은 하나도 찾지 못했다.

그 후에 다시 캐서린 수도원을 방문하였는데 한쪽 구석에 불을 지피는 데 사용되었던 사본들이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거기에서 티센도르프는 AD 350년경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70인역 사본 중에서 129장의 가죽 종이를 발견했다.

그는 재빠르게 수도원측과 협상한 끝에 43장을 가져가도록 허락을 받아 그것을 라이프치히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1859년에 티센도르프는 다시 성 캐서린 수도원에 방문하여 한 젊은 수도사의 초대를 받아 음료수를 마시다가 자기가 출판했던 70인역 성경을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러자 그 수도사가 "나에게도 그리스어 70인역이 한 권 있소"라고 말하면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한 사본을 가져왔다.

그것이 바로 시나이티쿠스였다.

 

5. 코덱스 알렉산드리누스

AD 425년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본은 본문을 구분하기 위해 장식을 최초 사용하였다.

이집트의 총대주교였던 키릴 루카가 1621년 콘스탄티노플로 옮길 때 그 책을 가 온 것이다. 1627년 그것은 잉글랜드의 왕 찰스 1세의 손에 넘겨졌고 현재는 영국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6. 존 라일랜즈 파피루스

현재까지 발견된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신약의 단편이다.

요한복음 몇절을 담고 있는데 연대는 AD 125년에서 150년 사이로 추정된다.

이 단편의 중요성은 복음서가 쓰인 지 50년도 채 안된 시기에 이집트에서 요한복음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점에 있다.

1920년에 발견되었고 잉글랜드의 맨체스터에 있는 라일랜즈 도서관에 진열되어 있다.

7. 코덱스 에프레미

이 코덱스는 이미 있던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 것이다.

가죽 종이가 희귀해지면 서기관은 우유와 귀리를 이용하여글자를 씻어 내고 그 위에 다시 쓰곤 했다.

이 사본은 성경 전체를 담고 있는 400년경의 그리스어 사본이었는데 12세기에 누군가 성경 텍스트를 씻어 내고 그 위에 시리아인이었던 에프렘의 설교를 적어 놓았다. 이 성경 텍스트는 여러 차례 번역되어 출판되었으며 그 가운데는 폰 티센도르프 백작의 번역도 포함되어 있다. 이 코덱스는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8. 코덱스 베자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2개 언어 병용 신약 사본으로서 페이지의 왼쪽에는 그리스어, 오른쪽에는 라틴어가 기록되어 있다. 기록 시기는 AD 45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는 프랑스의 리옹에 있는 성 이레네우스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위에 소개한 사본은 지금까지 발견된 5,500개가 넘는 사본 중 일부분이다.

 

70인역에 대한 문제

70인역이 예수님 탄생 이전에 72명의 유대 학자들이 그리스어로 번역한 구약성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는 내용이다.

1. 70인역의 증명하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The Letter of Aristeas)라 불리는 한 고문서에 드러나 있는데 이 번역본은 「셉튜아진트」(Septuagint), 혹은 「70 장로들의 번역본」으로 알려져 왔으며, L=50, X=10, X=10, 합하면 70=LXX이라는 값을 지닌 로마 숫자로 표시된다. 그런데 72명이 번역했다는 이 번역본을 왜 '칠십이인역(LXXII)이라 부르지 않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72인은 12지파에서 6명씩 뽑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12지파의 위치를 파악하여 6명씩 선발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주전 250년 혹은 그 전후로 구약 성경 전체를 번역한 그리스어 필사본은 현재 확실하게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뿐 아니라 유다 역사의 어디를 보아도 그런 일을 고려했다거나 진행시켰다는 기록은 전무한다.

->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그리스어 필사본은 교회시대 초기에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진행하였다는 기록이 없다고 해서 그런 일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도 없다. 72명이 12지파에서 6명씩 뽑았는지, 72명을 유대인에서 그냥 뽑았는지 알 수 없으며 12지파의 위치도 현재 불가능하다 가능하다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현재로서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초기 번역에는 72명이 참여하였지만 최종까지 72명이 계속 진행하였는지 알 수 없다. 2명은 유고했는지 돌아갔는지 알수 없으며 70명이 진행하였을 수도 있다. 따라서 70인역으로 명칭을 부여했을 수도 있다.

2. AD 200년경에 제작된 헥사플라에 70인역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450년이 지난 기록이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오리겐이 성경을 번역하면서 일부 의역한 것에 대해 해악의 이유로 삼기도 한다.

-> 오리겐이 해악을 끼친 것은 70인역의 존재여부에 관계없는 사안이다.

오리겐이 450년이 지난 후라도 70인역을 사용했다면 70인역의 존재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3.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집트에서 나온 것을 인정한 적이 없다.

-> 이러한 반론은 사실(Fact)과 다른 추정에 따른 것으로 역사를 이렇게 단정지을 수 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집트를 통해서 유대민족을 가뭄에서 보존하셨으며 바빌론 왕의 꿈을 통해서도 계시를 나타내셨다. 

결론적으로 70인역의 존재여부는 명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70인역이라는 텍스트가 고대 사본에 존재하므로 부인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출처: 카이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