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마 제국(빨간색)과 동로마 제국(파란색):위키피디아
(Photo : ) 서로마 제국(빨간색)과 동로마 제국(파란색):위키피디아

 

정치적인 분열 

395년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면서 그의 큰 아들 아르카디우스에게 동로마를,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에게 서로마를 통치하도록 유언을 남깁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제국을 분할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영토가 넓기 때문에 보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형제에게 제국의 동쪽과 서쪽의 통치를 맡겨 제국을 유지해 나가길 바란 것이겠지만 그의 아들들은 이런 기대를 저버립니다. 

동로마의 아르카디우스 황제나 서로마의 호노리우스 황제는 둘 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주변 인물들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는데 특히 동로마 지역의 인물들은 이민족의 침입이 격화되고 있는 서로마 지역과 분리되기를 원했습니다. 동로마의 군신들(아르카디우스에게는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자면 신하들)은 서로마를 낮게 보았기 때문에 동로마의 안전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였고 서로마가 어떻게 되든 큰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서로마가 이민족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침입을 받을 때도 구원군을 보낸 일이 없었고 오히려 동로마로 침입해온 이민족을 회유하여 서로마 쪽으로 발길을 돌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동로마와 서로마의 유대감은 점점 엷어지게 되었고 이후 완전한 분할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후 서로마 제국의 방위선으로 게르만족의 침입이 집중되었고 이윽고 방위선이 붕괴되면서 서로마 제국의 영토로 게르만족이 넘어와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프랑크족, 동 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등이 서로마 제국의 영토에 각각 나라를 세우게 되었고 그 와중에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가 게르만족 출신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폐위되면서 서로마 제국의 명맥이 끊기게 됩니다. 

이후 서유럽은 게르만족 간에 영토 쟁탈전에 접어들었고 이를 평정하고 서유럽의 대부분을 석권한 것이 프랑크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이었습니다.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왕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할 당시 주변의 여러 게르만족 국가(동고트 왕국, 서고트 왕국, 반달 왕국 등등)들은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이단으로 여기던 아리우스 파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때문에 프랑크 왕국의 왕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여 프랑크 왕국이 로마 가톨릭 국가가 되자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며 로마 교황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게 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이런 관계는 꾸준히 이어졌고 800년에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하기에 이릅니다. 

이미 서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가 비어버린지 300년이 넘었는데 이 시점에 로마의 교황이 서로마 황제를 새로 대관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교황은 황제를 대관함으로써 교황이 황제보다 우위에 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함과 동시에 서로마 황제를 통해 기존에 존재하던 동로마 황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카롤루스 대제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긴 했지만 그가 죽은 뒤 프랑크 제국은 후손들에 의해 분할되었고 베르됭 조약과 메르센 조약 등을 통해 서프랑크(프랑스) 왕국과 동프랑크(독일) 왕국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때문에 카롤루스 대제가 받았던 서로마 제국 황제의 지위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버렸고 그렇게 세월이 흐르게 됩니다. 

그러다 962년에 동프랑크 왕국(독일)의 왕이었던 오토 1세가 다시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게 됩니다.(이전의 서로마 제국과 구분하기 위해 더 이상 서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불린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로마 제국이라고만 불렸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기독교회와의 일체감을 강조하기 위해 신성이라는 글자를 함께 쓰게 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독일 왕(동프랑크 왕)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도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고 독일 왕이지만 황제는 아닌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서유럽의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던 당시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로마 교회에 끊임없이 간섭을 하며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려 했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교회의 수위권(교회의 수장. 즉 가장 높은 권력)을 로마의 교황이 아닌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로 인해 서유럽의 기독교회와 지중해 동부의 기독교회는 지속적으로 마찰을 빚게 됩니다. 

교회의 수위권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 내부의 교리 문제(단성론이나 성상 숭배 문제 등)로 인해 끊임없이 대립을 하게 되었고 11세기 중반에 이르러 결국 서로가 서로를 파문하면서 기독교회는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지중해 동부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 정교회로 갈라지게 됩니다.   이를 바로 동서 교회의 대분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신학적인 차이점

동방은 신비적이고 사색적인 반면 서방은 실제적이었다. 동방은 인간의 구원을 인간성이 신성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보았으나 서방은 인간의 구원을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과 인간의 바른 관계로 보았다. 그래서 동방에서는 신성에 대한 명상이 중요했으며 서방에서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중요했다. 그 결과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이 동방교회의 공헌이라면 인간의 죄와 은총의 역할을 다루는 죄와 은총론은 서방교회의 공헌이었다. 특히 성령과 관련하여 동방교회는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니케아종교회의 결정을 따랐으나 서방교회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예수)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함으로써 크게 대립하였다.이처럼 교황권의 문제와 성령의 기원 문제가 동서방 간의 논쟁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긴 했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차이가 있었다.우선 동방교회에서는 주교 이상의 고위 성직자에게는 결혼을 금지했으나 하위 성직자에게는 결혼을 허용했다.

반면 서방교회는 부제 이상의 성직자들에게 결혼을 금지했다. 세례의 경우 동방교회에서는 세 번 물에 잠갔으나(침례) 서방교회에서는 한 번 물을 뿌렸다. 성찬에 있어서 동방교회는 유교병을 사용했으나 서방교회는 무교병을 사용했다. 동방교회에서는 아동에게 성찬을 주었으나 서방교회는 아동에게 성찬을 주지 않았다. 동방교회에서는 빵을 포도주에 찍어 주었으나 서방교회에서는 평신도에게는 포도주를 주지 않았다. 동방교회에서는 교회 장로들도 죽어가는 자에게 종부성사를 할 수 있었으나 서방교회는 종부성사도 성례이므로 사제가 아닌 장로들은 거행할 수 없었다. 동방교회에서는 토요일에 금식을 하지 않았으나 서방교회는 금식했다. 사순절 기간에 동방교회는 일체의 육식을 금했으나 서방교회는 우유, 버터, 치즈를 허용했다.동방교회에서는 사제들이 수염을 길렀으나 서방교회는 수염을 깎았다. 

 동방정교회 [東方正敎會, Eastern Orthodoxy] 

사도시대부터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인도 ·그리스 ·동유럽 ·러시아 방면으로 발전하여 분포되고 오리엔트의 헬라 문화권 안에서 성장한 그리스도교회의 총칭. 서방(라틴) 교회의 상대적 의미로 동방교회라 호칭되지만 더 깊은 뜻은 죽음에서 부활한 빛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빛나는 태양이 동방(東方)에서 떠오른다는 데 있다. 파스카(Πασχα)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서방에서는 아직도 'East Day'(동방의 날)라고 한다. 동방정교회라고 할 때 정(正:Orthodox)이란 사도 전통 ·교부 전통의 올바른 가르침, 올바른 믿음, 올바른 예배의 의미를 지닌다. 동방정교회는 보편적 신앙의 교회이므로 그냥 정교회(Orthodox Church)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이다. 
정교회에서는 세계 공의회(世界公議會:Ecumenical Council)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한다. 주교들은 신앙의 문제를 결정할 때 전체 교회의 승인과 동의를 받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그래야만 공의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이 확실히 인정되는 것이다. 

그리스 정교와 로마 가톨릭교 

그리스 정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를 수장(首長)으로 하여 정통적인 그리스도교 회임을 자처하는 여러 교회의 일단이다. 그리스도교는 대체로 가톨릭 교회·그리스 정교회·프로테스탄트교 회로 나뉜다. 그리스 정교회는 동방교회(東方敎會;Ecclesia Orientali)라고도 하며, 처음엔 로마 교황을 수장으로 했으나, 지나친 국가주의·민족주의 등의 원인으로 교리의 차이가 생겨 로마교회에서 분리되었다. 
그리스 정교회의 신도는 약 1억 5000만이다. 그리스 정교회가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된 것은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의 결과로써 정치적 이유에 의해서였다. 즉 서로마에서는 교황과 황제가 대립하고 있었으나 동로마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협력하고 있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과는 점차로 멀어져 갔다. 11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는 로마교회의 의식과 교리를 크게 비난하여,

당시의 교황 레오 9세는 화해의 사절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했으나 듣지 않으므로 교황사절은 그곳의 소피아대성당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를 파문했다.

그로써 분열이 확정되었고, 그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서로 화해를 시도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가톨릭교회와 그리스정교회의 차이는 교회관의 차이에 있다. 즉 가톨릭에서 교회를 불가견적 신비체인 동시에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가견적 통일체라고 하는 데 대해 그리스정교회는 사랑과 은총에 의한 불가견적 통일체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로마교황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회의 수장이며 신앙 개조의 결정과 신앙 도덕에 관한 최고의 결정자라고 하는 교황 수위권에 반대하고 있다.

988년 러시아황제 브라미디르는 그리스 정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전 러시아인들에게 세레명을 내린다. 당시 동서양 문화의 교차로에 서서 두 문화를 두루 받아들이고 있던 키에프 러시아는 서양문명을 상징하는 기독교를 선택함으로써 유럽의 일환으로 편입시킨다. 그 선택에는 인접국인 폴란드, 덴마트,헝가리등이 기독교를 수용함으로써, 동양의 왼쪽날개보다는 유럽의 오른쪽 날개가 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키에프러시아는 카톨릭이아니라 정교(러시아정교)를 수용함으로써 인접국가와 오랜 반목과 투쟁이 시작된다. 이에는 그리스정교의 의식의 차이외에 당시 러시아가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라틴문화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 성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하는등 그리스정교 사도들이 오래전부터 러시아 전도에 나섰던 점등이 크게 작용했다. 비잔틴 제국이 쇠잔하면서 러시아가 사실상 정교의 종주국이 되고, 그후 러시아 정교에 슬라브적이고 동방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러시아가 유럽사회에서 고립되는 한 요인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정교(orthodox)는 유럽에서 크게 그리스를 중심으로한 그리스 정교,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세르비아 정교, 러시아를 중심으로 러시아정교로 나뉜다.

그리스 정교는 로마제국의 동서분열에 따른 정치적 이유로 형성이 되었고, 세르비아 정교는 정교의 동로마와 카톨릭의 서로마가 만나는 발칸을 중심으로 주변국의 이해관계로 나타나게된 몬테니그로, 세르비아에서 형성이된다. 외세의 이해관계로 인해 형성되게되어 그후 계속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그반면 러시아는 동서문화의 교차점에서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수용하게되며, 러시아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단성론 


단성론이란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인 성질만을 가졌을 뿐, 인성은 갖고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단성론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칼 케톤 공의회 이후 칼 케톤 정통주의자가 물러나고 단성론자가 주교가 되었고,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에서도 단성론자들이 주교 자리에 올랐다. 
특히 이집트나 시리아 지역에는 단성론을 지지하는 커다란 세력들이 있었다. 칼케돈 회의의 결과를 정통으로 주장하는 동로마제국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이집트나 시리아 지역은 종종 신앙의 독자 노선을 추구했다. 이들은 정치적 독립을 꾀하는 페르시아 등과 연대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힘이 약해진 동로마제국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의 단성론자들편에서 보면, 그들은 전통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아왔고, 따라서 제국 정부를 위해서 충성할 이유가 없었다. 동로마제국의 황제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는 제국의 안전을 위해서 이들을 묶어 둘 수 있는 교리상의 타협을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527년에 즉위한 유스티니안(Justinian, 527-565) 황제는 반 칼케톤, 친단성론으로 제국 정책을 선회했다. 
그는 5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제5차 공의회를 열어 교리적으로 양보함으로 단성론자들을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이 회의는 오히려 칼 케톤 신조를 그대로 인정해버려 오히려 단성론자들의 반발만을 사고 말았다. 다른 한편 이런 시도는 로마교회와 커다란 마찰을 가져왔고, 동. 서방교회의 결렬에 대한 내적인 신학적 이유를 제공해 주고 말았다. 


성상 숭배 


십계명을 보면 두 번째 계명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 측에서는 이 계명을 근거로 해서 서로마 교회 측에게 성상 숭배를 금지하도록 한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마 교회 측에서는 무지한 야만인들에게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 성상 숭배는 불가피한 것이라 하며 비잔틴 제국 측의 성상 숭배 금지 명령을 묵살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상 숭배 금지에는 동로마 황제가 수도원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자 하는 의도도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더욱 복잡하게 돌아가게 됩니다. 여기에다 누가 교회의 수장이 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동서 교회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들로 인하여 서로 파문장을 발송해서 결국 1054년 7월 16일에 동서 교회는 완전히 분열되게 됩니다. 

[출처: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