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 목사(월드쉐어 USA)
강태광 목사(월드쉐어 USA)

톨스토이의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인생에 대한 통찰력을 주는 소설입니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마흔다섯 살의 중견판사 이반 일리치가 죽음을 직면합니다. 아주 사소한 사고로 시작된 몇 달간의 투병 끝에 그는 죽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잘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살아갈 날의 기대와 꿈으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희망찬 중년의 세월에 사망의 그림자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정점에서 죽음을 앞둔 이반 일리치는 만감이 교차합니다. 처음에 그는 현실을 부정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죽음 때문에 신과 운명을 향해 분노합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를 되물으며 흥분하다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이반 일리치가 죽음을 맞닥뜨린 지점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삶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추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 상황에서 이반 일리치를 정말로 괴롭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무도 자기를 위로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서러워하는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어루만져주고, 입을 맞춰주고, 자기를 위해 눈물 흘려주기를 원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두 번째 자신도 누군가를 위로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 자신을 위로해 주지 않아 맘속으로 분노하고 혐오하는 그 냉정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당황하며 분노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그토록 목말랐던 위로를 받습니다. 먼저 하인 게라심이 자신의 맘을 알아주고 위로합니다. 또 죽음을 불과 몇 시간 앞둔 시점에서 아들 바사가 자신의 아픔을 알아줍니다. 큰 위로를 받습니다. 이런 위로로 인생 최후의 고민이 해결됩니다. 위로받지 못해서 허덕이며 분노하던 삶의 짐을 내려놓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준비 교과서와 같은 작품입니다. 아울러 톨스토이가 집착했던 '삶의 의미'를 가르칩니다. 이 작품을 통해 톨스토이는 위로를 주고, 위로를 받는 것이 가치 있는 인생이요 죽음의 준비라고 말합니다. 모든 인생은 위로해야 하고 위로받아야 합니다.    

최근에 위로하신 적이 있나요? 최근에 받은 위로 중에 기억나는 위로가 있나요?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위로가 필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위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위로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위로는 누구나 필요합니다. 코로나로 동분서주하는 대통령과 국가 지도자들의 수고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위로에 능력이 있습니다. 진정한 위로와 격려는 사람을 살립니다. 바른 위로는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꿀 만큼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이 담긴 위로를 통하여 운명이 바뀐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래전 영국에 뼈와 관절에 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해리 플래트'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몸이 병약한 해리 플래트는 성장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가 아프고 힘들 때면 아버지가 그를 위로해주었습니다. "아들아, 너의 상처를 별로 만들어라.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상처를 별로 만들어라." 아버지의 위로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해리 플래트는 아버지의 위로를 붙잡고 숱한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공부를 하여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 평생 의술을 통해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그는 의술과 의학 발달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는 현대 성형수술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영국 외과학회 회장과 국제 외과학회 회장을 지냈습니다. 그가 육체의 약함을 극복한 힘도, 그가 세계 의술 발전에 기여한 힘도 아버지의 위로와 격려였습니다. 이런 실례는 역사 속에서 종종 발견됩니다.    

위로는 언제나 필요하지만 어렵고 힘들 때 더욱 필요합니다. 승승장구하던 판사 일리치는 위로가 없어도 잘 살았고, 위로의 필요성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병들고 아파 죽음을 직면할 때에 위로에 갈급합니다. 삶에 위로가 필요한 날 자신을 보니 위로해 준 적이 없었습니다. 절실하게 위로가 필요한 날에 위로받지 못한 그는 절망하고 울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가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닌 위로에 매달리는 장면은 위로의 가치와 중요성을 웅변합니다. 그는 위로 때문에 분노하며 슬퍼하고 위로받으며 평안을 누립니다. 만약 이반 일리치가 다시 인생을 살았다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분명히 그는 위로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위로하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위로받는 인생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모두가 어려운 코로나 시대는 위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목회자도, 성도들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사장님도, 직원도, 고객도 모두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를 주고받음으로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면 좋겠습니다. 위로가 풍성한 삶이 행복이 살아 있는 행복 생태계입니다.             

행복 디자이너 강태광 목사 (World Share USA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