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종기 목사
(Photo : 기독일보) 민종기 목사

우리는 후기 자본주의시대를 살아간다. 대척점에 섰던 공산주의는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역사의 광장에서 사라졌으며, 그나마 공산당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조차 민주주의로 자신을 위장하고 실제로는 공산당 자본주의를 운영한다. 아직 자본주의에 편입되지 않은 나라들은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 보다 역사적으로 검증된 우수한 체제인가?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개인의 상대적인 자유가 있으며, 투자할 수 있고 파산할 수 있는 자유는 어느 정도 있으니까 말이다.

요즈음 같은 시절에는 "문명은 잔인하다"는 명제를 온 가슴으로 느낀다.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 비즈니스를 중단하는 자영업자들이 적지 않고, 자신이 해고되거나 피치 못하게 종업원을 해고시켜야 할 상황을 맞고 있다. 적지 않은 성도들이 온라인 예배를 통하여 소통하고 있으며, 전례 없이 교회당 예배를 자진해서 포기하는 슬픔을 맞이하고 있다.21세기에 들어와 불안하게 작동되던 세계적 규모의 자본주의는 미중무역전쟁으로 갈등을 불러일으키더니, 이제는 지역경제만 아니라 세계경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코로나19(COVID-19)로 흔들리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경제적 욕망의 만족이라는 신기루를 향하여 달려왔다. 미국의 경제적ㆍ군사적 패권 앞에서 대항마를 자처하며, "중국몽"을 제시하고 "일대일로"의 팽창정책을 쓰던 중국은 생물학전의 우위를 위한 가공할 무기를 암암리에 개발하여 왔다. 인간생물학과 동아시아학의 전문가인 스티븐 모셔(Steven Mosher)는 지금까지의 분석을 종합하여 "코로나19는 중국의 실험실에서 안전기준을 무시한 채 서둘러 개발하다 유출됐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패권에 저항하는 중국의 치명적 생물학전의 철퇴가 자신의 발등을 먼저 찍은 것이다. 타국에 살포되어 두려움을 줄 무기가 먼저 우환이라는 자국 도시에 퍼지고 중국의 우방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성도들의 안타까운 모습, 교회, 그리고 미국과 조국인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하게 바라게 된다. 이 시대에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개인과 나라들의 구원자이신 하나님 앞에 치유와 도움의 손길을 구하며 기도하게 된다. 이러한 구원의 요청은 예수님의 말기사역 중에 한 부자 청년이 물어본 질문이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 10:17). 예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앉아 질문한 것을 보면 자못 그의 질문은 심각하고 진지하다.

부자 청년에게는 젊음이 있었다. 재물도 있었다. 그리고 관원으로서의 지위도 있었다. 그리고 십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단언할 정도로 종교적인 삶을 살아온 자신감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고 구원 받으라' 말씀하시는 대신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고 명령한다. 예수님이 사랑하던 이 청년은 슬픈 기색을 하며 물러갔다.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말씀하신다.청년의 정신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현대의 우리에게 어떤 뜻으로 전해질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이렇다. 예수님이 사시던 1세기로부터 현재까지 사회ㆍ경제적 시스템은 지속적으로 변화되었으나, 그 시스템이 준 특혜, 지위 및 풍요함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로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구원은커녕 인간성도 제대로 유지할 수 없다.

구원은 체제의 선물이 아니다. 체제는 각 시대마다 변동하는 사회적 조건이다.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해체"(deconstruction)이다. 해체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덕적 해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우상의 해체이다. 당시의 청년이나 제자에게 재물은 하나님의 복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서 그 해체되지 않은 우상이 그리스도에게로 나가는 것을 막는 장애물임을 본 것이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엄청난 축복의 말씀이다. 부자 관원은 순종하지 못했지만, 베드로는 그물을 놓고 예수를 따랐으며, 마태는 돈방석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좇았으며, 야고보와 요한은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였다. 지금처럼 세상이 흔들릴 때는 우리의 마음에 있던 우상을 발견할 수 있는 때이다. 도대체 왜 미국에서 사재기를 하는가? 무엇이 불안하며, 포기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내려놓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삶을 재정리하는 것이 시대적 도전 앞에서 가장 중요한 응전이 아닐까? 주님의 요청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충현선교교회 민종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