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낯선 봄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박동식 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나니 이 "봄"이라는 단어가 왜 이리 낯설까요? "봄"이라고 발음해 봅니다. 여전히 낯섭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발음해 봅니다. 분명히 "봄"이 맞는데, 왜 이리 "봄"만 낯설까요? 사전을 검색합니다. "봄"이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봄"이 낯설 수 있을까요? 

이렇게 "봄"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신대원 입학 논술 시험이 생각나네요. 그때 주제가 "환경 문제"에 관한 것이어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을 언급하면서 써 내려간 기억이 납니다. 

다시 발음해 봅니다. "봄입니다." 네 "봄"입니다. 그런데 이 "봄"이 고요합니다. 아니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네요. 어느 노래 가사인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모순 표현처럼, 봄임에도 적막을 넘어 스산하기까지 합니다. 카슨은 환경 오염으로 더 이상 새들이 노래하지 않거나 울지 않는 모습을 "봄"이 침묵한다 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인간"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봄의 침묵이 무서운가요, 아니면 인간의 침묵이 무서운가요? 봄의 침묵이 슬픈가요, 인간의 침묵이 슬픈가요, 라는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다시금 봄 길을 걸어가 봅니다.

2. 다시 돌아오는 봄/자연

산책하며 동네 언덕에 올라서니 하늘이 청명합니다. 평소 이렇게 깨끗한 하늘을 본 적이 별로 없는데 인간이 침묵한 이후로 잘 보이지 않던 LA 마천루가 눈에 들어옵니다. 평소에는 먼지층이 굵은 혁대처럼 드리우고 있어서 누리끼리한 하늘이었는데 LA 하늘이 이렇게 푸르고 맑은 것은 사람이 다니지 않고 차가 다니지 않아서일 겁니다. 동네 골프장에도 사람이 없으니 토끼들이 서로 장난을 치고 하늘을 날던 오리들이 내려앉습니다. 서로 골프 회동을 하나 봅니다. 누가 이길까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도시에 사슴이나 산짐승들이 나타난다는 소식이 빈번합니다. 인간이 침묵하니 자연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제 색깔을 내는 것 같습니다. 

산책하다 보면 앞 정원이 잘 관리된 집이 있는가 하면 그냥 둔 집도 있습니다. 잘 정리된 정원은 깔끔해서 보기에 좋을지는 몰라도 좀 방치된(?) 정원에는 각종 풀 들이 자랍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인간이 이 땅에서 그 원인이 어떠하든 사라진다면, 자연도 사라질까요? 그리고 반대로 자연이 사라지면 우리 인간도 사라질까요? 답은 자명한 것 같습니다. 인간은 사라져도 자연은 그대로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연이 사라지면 우리 인간도 사라질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약한 인생임에도 그동안 너무 목에 힘주고 살아온 우리 인간들이 아니었던가요? 겸손해야죠. 그러라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침묵의 시간을 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King's Canyon에 있는 Moro 바위를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하도 높아서 중간에 멈춰 섰습니다. 고소공포증 때문이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정상에 다녀오는 동안 중간에 멈춰서 아래 산들을 보고 있는데 새들이 날더군요. 이 높은 산에서 나는 새들이 위대해 보였습니다. 고소공포증도 없나 봅니다. 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인간이 한없이 약해 보였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바다가 그렇게도 넓은데 인간이 물놀이 하는 곳을 가만히 보면 불과 몇 미터 되지도 않습니다. 우주가 이렇게도 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는 점보다도 작습니다.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겠죠. 그리고 돌 하나도 함부로 차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돌에도 생(生)이 있을 테고 어쩌면 우리가 산 햇수가 범접하지 못한 생을 산 존재들일 수 있을 테니까요. 

인간이 침묵하고 인간이 멈추니 자연이 돌아오네요. 근대 초기 철학자인 토머스 홉스는 자연 상태를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의 상태로 봤지만, 암만해도 자연 상태는 그런 투쟁의 장이 아닌 조화와 공존의 상태가 맞을 것 같습니다. 타락 전 에덴동산처럼 말이죠. 아이들이 흙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흙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사람이 늙어서 농촌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흙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전3:20) 하지 싶습니다. 

3. 그 꽃 함부로 꺾지 마라!

언젠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꽃향기가 나더군요. 꽃이 있어서 꽃향기를 맡은 게 아니라 문득 꽃향기가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꽃이 있음을 알게 된 적이 있습니다. 향기는 주위를 둘러보게 하더군요. 둘러보니 그 꽃이 예쁘더군요. 꽃은 자기 예쁜 거 알까요? 꽃이 예쁜 건 색깔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색깔이 시선을 사로잡지요. 

어릴 때 가장 좋아했던 꽃은 개나리였습니다. 온 동네와 온 산을 뒤덮은 노란색이 보기 좋았나 봅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누군가가 좋아 짝사랑에 눈뜨고 그 사랑으로 인해 가슴앓이할 때 즈음엔 하얀 목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장 화려하게 짧게 폈다 가장 쓸쓸히 저버리는 목련만큼 사랑의 기쁨과 행복 그와 동시에 사랑의 슬픔과 눈물을 알려주는 꽃도 없는 듯했습니다. 장미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는 비싸서 그저 가난을 알게 해 준 꽃으로 기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장미가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봄바람 타며 이제 온 세상 수많은 꽃이 피어나는데 피어난 꽃 한 송이 한 송이마다 의미 있고 아름답습니다. 걷다가 길섶에 피어 있는 꽃들이 눈에 들어오면 허리 숙여 들여다보고 냄새도 맡아 봅시다. 대신 그 꽃 함부로 꺾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시인 함민복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했는데 어쩌면 '꽃에는 경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듯합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그렇게도 자연스럽게 옆집 담장을 넘어서고, 인도 차도 구분 없이 넘어서고, 군사분계선을 넘어서고, 국경을 넘어서고, 강아지 눈 속으로도, 아기의 마음속으로도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모든 꽃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꽃을 악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요즘 꽃을 내세워 sns에 친구 신청하는 각종 이단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꽃으로 가린다고 가려지는가요. 그 꽃 시들면 민낯이 드러날 테니 이단들이여, 꽃을 내세워 신청하지 말고 당당히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신청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진리 아닌 것에 그렇게 인생을 걸고 숨어 살지 말고 진리를 믿어 떳떳한 인생 사시기 바랍니다. 

핸드폰을 보는 눈앞으로 무엇인가 떨어집니다. 새 한 마리 날아 앉은 줄 알았습니다. 곧 날아가겠지 하는데 그다음 동작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핸드폰에서 눈을 떼어 보니 새가 아니라 낙엽입니다. 그러고 보니 떨어진 낙엽은 스스로 떠 오를 수 있는 힘과 생명이 없군요. 만발하던 꽃이, 예쁘게 피었던 꽃이, 시들어 떨어집니다. 

그런데 꽃은 왜 떨어질까요? 꽃이 떨어지는 것은 꽃대를 붙잡은 꽃의 손에 힘이 빠지기 때문일 겁니다. 꽃대가 꽃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꽃이 꽃대를 잡고 있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비바람 몹시 몰아치던 날에도 떨어지지 않은 것은 그렇게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온 힘으로 꽃대를 붙잡았기 때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붙어 있는 줄만 알았는데 말이죠. 그저 붙어 있다면 조화이겠군요. 거기에는 생명이 없겠지요. 

정호승 시인도 꽃에서 인생을 배운다고 했습니다. "원래 꽃들도 천둥 번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꽃들은 오히려 천둥 번개가 어떻게 치는지 알고 싶어한다. 나무들도 아무런 시련 없이 고요히 자라는 것이 아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온몸이 뒤흔들리는 나무의 고통을 보라. 나무도 그런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튼튼하고 아름다운 나무로 자란다. 한여름의 폭풍을 통해 꽃과 나무와 새들도 삶의 인내를 배우는 것이다."1)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 바람을 잡아 보려 하지만 잡히지 않네요.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처럼, 우리도 흔들리는 하루를 버티며 견디며 살아가고 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부디 흔들리더라도 쓰러지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4. 자연은 아름다워!

둥글었던 달이 기울어집니다. 아니 이지러집니다. 달은 그냥 있는데 우리 눈도 똑같은데 어찌 된 일일까요? 그렇다면 달과 우리 사이에 무엇인가 일어났겠지요. 처음 달을 본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어느 날 갑자기 달이 제 살을 깎아 먹더니 이내 사라지고 또 어느새 사라진 달이 나타나서 커지더니 둥근 달이 되는 모습을 처음 본 아담과 하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간밤에 내린 이슬 위에 아침 햇살 내려앉으니 모락모락 사랑의 아지랑이 피어오릅니다. 지저귀는 새 소리 허공에 흩뿌려져 사라지지만 아직 내 마음속에 씨앗 하나로 남아 있으니 누가 인생만 아름답고 소중하다 하는가요? 세상에 그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아름답고 소중한 자기의 삶을 살며 더불어 사랑하며 더불어 배웁니다. 

그러니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생각을 열고, 세상에 '나' 아닌 '타자'로부터 배워봅시다. 그 타자들은 나의 존재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적 존재들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관계적 존재들이지요. 밤새 내린 이슬은 생명을 약동케 하는데 우리는 밤새 무얼 했나요? 밤새 내린 이슬만큼도 못한 이기적 존재 아닌가요? 이슬이 말을 못 해 그렇지 우리 인간들에게 할 말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럼에도 이슬은 밤새 말없이 내리지 않던가요. 

'나무가 바위가 된 숲/자연'(petrified forest)을 둘러보는 가운데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아들 입에서 "Nature is beautiful!"(자연은 아름다워!)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자기가 보기에도 뭔가 아름답긴 아름다웠나 봅니다. 이 표현은 인간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자연에 대한 가장 높은 경외의 표현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름답다는 말은 언어의 끝에 터져 나오는 탄식의 표현이니까요. 언어로 더 이상 표현이 안 될 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복종일 것입니다. 탄식은 놀라움과 복종의 의미를 지니지요. 

바닷가 근처 생태 공원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강물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더군요. 새들이 공중에서 날갯짓을 하지 않고 멈춰 있다가 표적을 발견하고는 직하합니다. 그리고 언뜻 보기에도 좋은 카메라를 가진 이들이 둑 기슭에 앉아 무언가를 찍고 있더군요. 물어보니 skimmers라는 새를 찍는다고 하더군요. 무슨 새인지 궁금해하는 순간 갑자기 새 한 마리가 날아오니 누군가가 "skimmers"라고 외치더군요. 카메라 셔터 터치는 소리가 요란했습니다. 기자들이 연예인들 사진 찍을 때 나는 소리 같았습니다. 검은색과 흰색이 조화된 새인데 날아오더니 수면 위를 입을 벌리고 스치듯 날아갑니다. 부리로 고기를 쓸어 담으려 하는가 봅니다. 

순간을 담기 위해 사진사들은 기다립니다. 한 마리 물고기를 잡기 위해 새들도 기다립니다. 기다리다 목표물을 발견하면 순식간에 셔터를 누르거나 순식간에 직하합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 세계는 아름답습니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자연이 다하는 날까지 그 아름다움을 고백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바람에 자신을 맡긴 새는 납니다. 하늘은 바다를 품고 있습니다. 그 하늘을 품어 봅니다. 흙먼지가 일어납니다. 먼지라고는 미세 먼지나 도심의 쾌쾌한 먼지가 전부인 도시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산길이나 시골길 흙먼지는 정겹습니다. 노을 또한 아름답습니다. 때로는 물의 연기(演技)를 볼 때가 있습니다. 물의 유희(遊戱) 말이지요. 자연이 펼치는 공연이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가장 신기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저에게 가장 신기한 것은 인간이 달나라에 갔다 왔던 사건도 아니고, 몇백 층 되는 빌딩을 인간이 지었다는 것도 아니고, 기인들의 묘기 행진도 아닙니다. 저에게 가장 신기한 것 중 하나는, 새들이 자기들 집을 짓는 모습입니다. 새들이 집 짓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나뭇가지를 주워 가지고 옵니다. 때로는 나뭇가지를 입으로 흔들어서는 부러뜨려서 가지고 와서 집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튜브를 찾아봤습니다. 솜털 같은 것도 물어 오고 깃털도 가져오고 자리에 깔고 연신 발로 다지더군요. 둥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실 끈 같은 것으로 동여매고요. 그래서 하나의 새 둥지가 탄생이 되더라고요. 새대가리가 절대로 아니지요. 

가을에 낙엽이 질 때 나무들이 그동안 푸르게 입었던 옷들을 벗지만 새 둥지만큼은 남아 있지요. 그리고 여름에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나무의 뿌리는 뽑히는 경우가 있지만 새 둥지는 부서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새들이 무슨 못이나 망치나 시멘트를 사용해서 둥지를 짓는가요? 그저 입으로만 잇고 또 이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튼튼한 둥지가 되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기 위해서라도 자연을 읽으라고 권장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러나 더 큰 책이 있다. 창조된 세상의 실제 모습이다. 위를 보고 아래를 보고, 주목하여 읽으라. 당신이 발견하고 싶어하는 하나님은 잉크로 글자를 쓰는 대신 친히 만드신 것들을 당신의 눈앞에 두셨다. 그보다 더 큰 음성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2) 우리가 자연을 읽고 자연 속에 살아가야 할 이유 또한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핑계치 못할 정도로 창조주 하나님이 모두에게 지어주신 자연 속을 걷고, 냄새 맡고, 그 아름다움에 경이로움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일반은총을 누리는 것일 것이며 우리 인간이 일상에서 해야 할 일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5. 자연의 하루

하루의 슬픔이 서쪽 하늘 끝에 고요히 물듭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아득합니다. 어둑어둑 해 질 무렵의 옅은 밝음이 좋습니다. 노을이 늘 붉지만은 않습니다. 힘을 뺀 노을은 그윽하기까지 하죠. 집에 가지 않으려고 끝까지 땡강 부리는 아이와 달리 태양은 서산 너머로 가지 않으려고 발끝을 산꼭대기에 걸치고 끝까지 버티지 않습니다. 대신 '가면 반드시 다시 오겠다'고 절절히 약속하는 그런 붉은 눈물만이 있을 뿐이지요. 그 절묘한 순간이 마치 "님의 침묵" 같습니다. 

새들도 날갯짓이 바쁩니다. 새는 날기 위해 접었던 날개를 꺼냅니다. 날개를 '편다'는 말을 흔히 사용하지만, 그 과정을 우연히 보니 속에 간직했던 날개를 '꺼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듯하더군요. 이제 다들 제 보금자리로 갈 시간인가 봅니다. 그런 와중에 전깃줄에 앉아 유유히 이 평안함을 즐기는 새 한 마리 옆으로 다른 새 한 마리 날아와 앉습니다. 수컷의 냄새가 진하게 납니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더라도 수컷들의 눈길이 한 번 더 가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존재 자체의 끌림이자, 나약한 수컷의 복종의 표현이기도 한 것이겠죠. 그러니 가수 김연자의 <십분 내로>라는 노래 가사에 "여자는 꽃이랍니다 혼자 두지 말아요" 하는 것이 한편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 수컷이 연신 무엇인가 지저귑니다. 듣고 있던 새가 몇 번 자리를 고쳐 앉으며 관심 없다는 신호를 보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짹짹거리자 이네 포물선을 그리며 쌩하니 날아가 버립니다. 전문 용어로 차인 것이지요. 그러나 기죽지 않고 그 포물선 놓칠까 봐 뒤따라가는 수컷의 날갯짓이 더 바빠 보입니다. 부디 차여서 가슴앓이하지 말고 사랑하기를 바랐습니다. 

사람 사는 세상의 한 날이 저물어 가니 자연의 한 날도 저물어 갑니다. 아니 반대로 이야기 하는 것이 이치상 맞겠군요. 자연의 한 날이 저무니 사람의 하루도 저물지요. 모두 편히 쉬는 이 밤 되기를 소망합니다. 

6. 서로 품어주고 나누는 자연

창밖으로 보면 큰 나무 두 그루가 서 있습니다. 그 나무들로 인해 시야가 가리긴 하지만 나무도 하나의 세계이더군요. 그 속에 셀 수 없이 많은 새들과 벌레들이 깃들어 있고 바람이 하늘거립니다. 나뭇잎과 가지가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하늘이 보입니다. 창밖에 세계가 서 있습니다. 

큰 나무로 얼마의 새들이 날아듭니다. 몇 번의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잔가지 몇 개 떨어집니다. 잔가지도 나무의 몸인데 나무는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새들을 내치지도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오늘도 새들을 품어 안아줍니다. 새들은 나무의 고마움을 알까요? 당연히 알겠죠. 

새 한 마리, 헤엄쳐 강 건너는 사슴 등 위에 앉습니다. 앉아도 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앉습니다. 사슴도 전혀 개의치 않고요. 자연은 그렇게 더불어 살아가나 봅니다. 그런데 궁금하네요. 새는 왜 사슴 등에 앉을까요? 날아서 가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고 빠를 것 같은데 새는 왜 그랬을까요? 또 다른 맛과 재미를 알았을 겁니다. 날갯짓을 하지 않아도 갈 수 있고 자신의 속도보다 천천히 가기에 주변도 더 자세히 살필 수 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바닷가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귀청이 찢어질 듯 갈매기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 봤습니다. 눈을 들어보니 갈매기 한 마리가 지붕 위에서 마치 늑대가 울부짖는 것처럼 입을 최대한 벌리고는 소리를 지릅니다. 그랬더니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바닷새가 한 곳으로 날아옵니다. 가만히 보니 식당 종업원이 손질을 마친 물고기 꼬리들과 내장들을 바다에 내다 버리는데 그걸 보았던 갈매기 한 마리가 다른 갈매기들을 불러 모은 것이더군요. "여기 먹을 것 있어!"라고 온 힘을 다해 외치는 듯했습니다. 누가 "새대가리"라 했던가요? "새대가리"도 밥은 나눠 먹을 줄 안다고 인간들에게 말하는 듯합니다. 갈매기에게서 삶의 진리 한 조각을 배웁니다. 

바람은 불고 나뭇잎은 흔들리고, 자연은 그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살아갑니다. 

7. 자연을 통해 부어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며

예일 신학교 교수인 미로슬라브 볼프가 자신의 스승인 위르겐 몰트만 교수의 94번째 생일을 축하하면서 그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두운 골짜기,' 즉 죽음의 골짜기에서 구해 주시지는 않으시지만, 바이러스에 기인한 자연 재난과 인간이 야기한 생태 파괴 가운데 두려워하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3) 몰트만 교수의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시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죽어가는 이들이 많은 가운데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무엇하고 계시는지는 또 다른 장에서 토론해야 할 부분이겠지요. 

또 한 번의 계절이 바뀌어 가는 시점입니다. 겨울이 지나고 이제 완연히 봄입니다. 새싹이 피어나고 나무마다 새순이 돋고 대지와 산들이 푸르러집니다. 가만히 보니 사람과 자연은 계절을 맞이하는 방식은 반대인 것 같네요. 사람은 겨울이 지나 봄을 맞이하고 여름으로 갈수록 옷을 벗고 가을을 지나 다시 겨울로 갈수록 옷을 껴입는데, 자연은 여름으로 갈수록 껴입고 겨울로 갈수록 벗습니다. 

둘의 삶의 패턴을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뒤집으면 억지스럽지만 그대로 두면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양식이 있고 자연이 살아가는 양식이 있으니 둘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것 그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삶 아니겠습니까?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에게 자신의 삶의 양식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러면 부자연스러워지게 됩니다. 계절이 순리에 따라 돌고 돌듯이 인생도 순리에 따라 돌고 돌아야 할 것입니다. 

비 온 뒤 싱그러움을 정말로 모처럼 맛본 적이 있습니다. 비가 색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비는 자연이 원래 가진 색을 드러나게 해 줍니다. 산천초목은 녹색을 품고 있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누런색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비 한 번 오면 색이 바뀌지요. 비는 존재를 존재되게 해 줍니다. 

은혜가 이런 것이겠지요.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해 주는 것은 위에서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루를 보내면서 만나는 자연은 있는 듯 없는 듯 우리를 감쌀 때가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하나님이 "지진이나 폭풍, 번개 가운데 머무시는 게 아니라 등을 어루만져주시는 부드러운 바람결 속에 계심을 깨달을 수 있다"4)고 했습니다. 자연 속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두울 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낮에는 그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지나다니다가 어둠이 내려앉음과 동시에 불빛이 켜지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시대가 어두울 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코로나 19를 관통하면서 어느 시대보다 더 어두운 지금,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동안 놓쳤거나 굳이 보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보면서, 새는 자기가 언제 날갯짓을 해야 할지를 알듯이, 우리도 다시금 일어설 날을 고대하며 이 막연한 고난의 시간을 침묵하며 보내면 좋겠습니다. 

박동식교수 (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1) 정호승, 『위안』(열림원, 2003), 28. 
2) 알리스터 맥그래스, 홍종락옮김, 『우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복있는사람, 2017), 28에서 재인용. 
3) https://www.facebook.com/miroslav.volf.12. "God does not spare us from the "dark valley," the valley of death, but GOD IS WITH US IN OUR FEARS of natural catastrophes caused by viruses and ecological catastrophes caused by humans."
4) 헨리 나우웬, 최종훈옮김, 『제네시 일기』(포이에마, 2010), 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