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 서병훈 역 | 책세상 | 288쪽 

종교개혁, 루터가 처음 시작한 것 아냐
옳은 소리, 대세 넘어 살아남기 어려워
모두가 'Yes' 말할 때 'No' 할 수 있는가
이상한 눈초리 거둘 방법 '생각의 자유'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정문에 종이 한 장이 붙었다. <95개조 반박문> 그리고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아니, 종교개혁이 '다시 시도'되었다.

종교개혁은 루터가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전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스무 번도 넘게 더 시도됐다. 단지 모두 진압되었을 뿐이다.

옳은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옳은 소리가 대세를 넘어 살아남기가 어려울 뿐이다. 중요한 담론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담론이 진압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기가 어려울 뿐이다.

이런 말을 하면, 나도 모르게 이렇게 다짐한다. '바른 의견을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며, 지켜야겠다', '중요한 담론을 끝까지 지켜주어야겠다'.

그러나 현실은 우리의 다짐과 다르다. 현실은 우리가 '바른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기보다 '바른 의견'을 막아서는 '대세'일 확률이 많다. '중요 담론'을 지켜주는 사람이기보다,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을 확률이 더 많다.

사람들은 '바른 의견'이 이슈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독특하다며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기 일쑤다. 더욱이 '신앙인'은 새로운 시도에 '보수적인 판단'을 내릴 때가 더 많다. 그렇게 '나' 때문에 '중요한 담론'은 싹을 틔우지 못하고 말라 버릴 수 있다.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비록 '중요한 담론'을 제시하지는 못해도, 이상한 눈초리로 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그것이 '자유'라고 말한다. '생각의 자유를 보장하라!' 자신이 쓴 책 <자유론(On Librety)>에서 주장하는 말이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자유론>은 1859년에 출판됐다. 당시 저자 존 스튜어트 밀의 나이는 53세였다. 아버지 '제임스 밀'은 공리주의 철학의 대가였다. 이 집안은 2대에 걸쳐 학명을 떨친 철학자 집안이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다 보니 세 살 때 그리스어를 배웠고, 여덟 살 때 라틴어를 배웠다. '스튜어트 밀'은 한마디로 신동이다. 13세 되던 1819년 경제학을 공부했고, 16세에 첫 논문을 썼다.

그 논문에서 귀족주의적 편견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어릴 때부터 남과 다르게 생각한 천재 존 스튜어트 밀, 그의 입장에서 '생각의 자유'는 꼭 보장되어야 할 덕목일 수밖에 없다.

<자유론>은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머리말로 책을 쓰는 이유와 이 책에 담긴 내용을 간단히 설명한다. 2장은 '생각의 자유'가 왜 보장되어야 하는지 네 가지로 설명한다.

3장에서는 사람의 '개별성'이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수의 삶과 다른 방식이라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4장은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경우에 대해 설명한다. 마지막 5장은 현실 적용이다. 영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유의 침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1장: 시민의 자유와 사회적 권력

'시민의 자유'와 '사회적 권력'이 책의 주제다.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라고 밝힌다.

스튜어트 밀의 주장은 자유 보장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동이 아니라면, 사회는 개인의 어떤 자유도 제한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가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권력을 사용해 자유를 제한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권력 행사도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러면서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세 가지 기본 자유를 말한다. 먼저는 내면의 자유다. 양심과 감정, 생각과 주장 등 내면의 영역에는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

두 번째는 즐김의 자유다.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를 지녔다. 이러한 일이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한, 제한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는 결사의 자유다.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한, 그리고 강제나 속임수에 의해 억지로 끌려 온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성인이 어떤 목적의 모임이든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어야 한다.

스튜어트 밀이 머리말에서 전제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자유는 쉽게 제한된다고 말한다. 꼭 법률적 제한이 아니어도,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침해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에서 주류가 된 의견은 그 자체로 소수 의견에게 폭력이 된다.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대세라는 이름으로 윽박지르고 강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이러한 모습이 더 심각하다. 단순히 소수 의견을 향한 강요를 넘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모두 적으로 돌리고 있다.

SNS나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는 연일 좌, 우가 나뉘어 목소리를 높인다. 나에게 '너는 어느 편이냐?'라고 질문하는 것 같다. 나와 다른 생각은 이미 틀린 생각을 넘어, 위험한 생각이고, 큰일 날 생각이 되어버린 사회다.

요즘 대한민국은 '생각의 자유'가 있는 나라가 아닌 '생각의 강요'만 남은 나라 같다.

2장: 생각의 자유를 보장하라

생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진리일 수 있다. 지금은 대세에 밀린 소수 의견이고 잘못된 의견처럼 보이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진리라고 드러날 수 있다. 그래서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대는 수많은 의견을 잉태하는데, 시간이 지나다 보면 그런 의견들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것이라고 판명나는 경우도 많다", "과거가 현재에 의해 부정되듯이 현재는 미래에 의해 번복될 것이다."

예수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예수님의 죄목은 아이러니하게도 '신성모독'이다. 하나님이 '신성모독'이라는 죄 때문에 죽으셨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으니,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만 보면 그리 틀린 '죄목'도 아니다. 내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이 오셔도 못 박아 버리게 된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생각이 있다. 하나님이 완전하시지,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진리가 완전하지, 진리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우리가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나와 다른 신학, 나와 다른 생각을 무조건 '틀렸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일정 부분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소수 의견이라도 마음껏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리를 더 깊이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종교개혁은 루터가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가 '다시 시도'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있었던 종교개혁이 다 옳은 생각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너무 신비주의로 빠졌고, 어떤 이들은 너무 과격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다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당시 생각들이 자유롭게 이야기 될 수 있었다면, 종교 개혁은 훨씬 빨리 이루어졌을 것이다. 진리가 더 빨리, 더 선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상대방의 말이 틀린 부분이 많아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에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나의 잘못은 몹시 적은데도 더 큰 잘못이 있는 것처럼 보태서 말을 들을 때가 있다. 비록 그 사람의 말은 지나쳤을지라도 나에게 비방받을 까닭이 조금이라도 있으니 그것을 고쳐야 한다."

틀린 말이 많아도 들을 수 있어야 깊어질 수 있다. 상대방의 주장이 틀린 부분이 많다고, 귀를 막는 순간 자신의 성장도 막힐 것이다.

세 번째로 통설이 진리일 뿐 아니라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도, 그것을 둘러싼 반대 의견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진리를 선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틀린 의견이라고 해서 말하지 못하게 하면 안된다.

중세에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성경을 읽는 것을 금지시켰다. 잘못 해석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갔다. 진리는 우리가 보호하고 지켜야할 대상이 아니다. 그 자체로 힘이 있고, 그 자체로 빛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 싸울 때, 언약궤를 빼앗겨 버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패배이지, 하나님의 패배는 아니었다.

블레셋 땅으로 들어간 언약궤는 그곳에 재앙을 내린다.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다곤 신상을 부숴버린다. 언약궤는, 아니 하나님은 사람들이 보호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 위엄을 드러낸다.

성경을 아무리 비판해도 진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빛날 뿐이다. 성경은 덮어 놓고 믿는 책이 아니다. 읽고 연구하고, 하나하나 깨달아가며 더 깊어지는 책이다.

네 번째로, 반대 의견이 사라지면, 진리 자체가 진리로서 역할을 못하게 된다. 오히려 독단과 강요, 폭력이 되어 버린다.

탈무드에는 '만장일치는 부결이다'는 원칙이 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독단이고 잘못된 결정일 수 있다는 말이다.

진리에 반대가 있다고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진리가 폭력이 될까 두려워하라. 어쩌면 우리는 공격받는 소수가 되기를 두려워하기보다, 공격하는 다수가 될까봐 두려워해야 한다.

3장: 천재는 자유의 공기 속에서만

3장은 개별성 문제를 다룬다. 다른 사람에게 실제적 혹은 잠정적으로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개인의 행동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각자의 개별성을 존중해 주라는 뜻이다.

"우리는 코트나 구두를 고를 때, 자기 몸의 치수를 재서 맞추든지 아니면 온 가게를 다 뒤져 자기에게 맞는 것 하나를 선택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코트 고르기보다 더 쉬운가? 사람들의 육체나 정신 상태가 각자의 발 모양보다 더 비슷할까? 만일 사람들의 취향이 서로 다르다면, 그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하나의 틀에 맞춰서 획일화 시켜서는 안 된다."

더욱이 사회 발전을 위해서도 각자 개별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천재는 언제나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개별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천재는 자신의 독창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좌절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한다. "천재는 오직 자유의 공기 속에서만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다."

4장: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제한

4장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제한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회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경우는 언제인가? 앞서 머리말에서 말했듯,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때다.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막아야 한다. '상대방의 물건을 가지고 싶은 자유'는 '내 물건을 지키고 싶은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 정당한 권리 없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고 타격을 입히는 것, 거짓으로 또는 표리부동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 불공정하게 또는 관대하지 못한 방법으로 남에게서 이득을 얻는 것, 심지어 다른 사람이 위험에 빠져 있는데 이기적인 마음에 모른 척하는 것, 이 모두는 도덕적 비난 또는 심각할 경우에는 도덕적 징벌이나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스튜어트 밀은 무조건 자유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 자유는 분명한 사회적 책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5장: 개인의 자유에 대한 실제 사례

5장은 영국 사회 상황에서 개인의 자유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지 실제 예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다. '상거래의 자유, 독약을 사는 자유, 이혼의 자유 등' 다양한 상황에서 어떤 금지가 필요하고, 어떤 금지를 해선 안 되는지 이야기한다.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당사자에게만 직접 해를 끼치는 여러 행위들에 대해 법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런 행위 가운데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질 경우 선량한 풍속을 해치고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의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에 법에 따라 금지되어야 하는 것도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 그 결과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최종 결론으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지만, 사람의 자유를 막지 않으셨다. 사람을 온전하게 창조하셨고, 완전하게 사랑하셨다.

한국 사회, <자유론> 어느 때보다 필요
자유 보장 위해 겸손과 믿음, 진리 필요

지금 한국 사회와 교회는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윽박지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책이다.

책을 읽고 나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성도에게 필요한 자세를 세 가지로 짧게 정리 할 수 있었다.

먼저 겸손이다.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내가 부족할 수도 있다. 이것을 인정하고 한 걸음 물러서는 것. 말하기보다 들어주는 것. 나는 진리를 '따르는 사람'이지 '내 생각이 진리인 것은 아니다.'라는 물러섬의 자세가 필요하다. 겸손의 모습이다.

두 번째는 믿음이다. 내가 진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스스로 빛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 내가 목소리 높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역사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내새워 핏대를 높이는 것은 어쩌면 내가 침묵하면 하나님도 침묵하실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다. 성도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세 번째 사랑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기다려주는 사랑. 그 사랑에서 개별성에 대한 존중이 나온다. 나와 같은 지문의 사람이 없듯, 나와 같은 생각의 사람도 없다. 성도는 나와 다름도 사랑하며 기다려 주는 사람이다.

한 걸음 물러섬의 겸손, 하나님을 기대하는 믿음, 사람을 기다려주는 사랑. 이 세 가지 자세를 가질 때, 다른 사람에게 내 생각을 강요하지 않을 수 있다. 상대방의 '생각의 자유'를 존중해 줄 수 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삶에서 드러낼 수 있다.

박명수 목사
사랑의침례교회 담임, 저서 《하나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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