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2장 5-9절

예배는 킬러 콘텐츠다

'킬러 콘텐츠'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미디어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핵심 콘텐츠를 말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핵심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군 전략자산'이란 말이 있다. 미국이 전쟁 수행에 큰 영향을 미치는 목표를 타격하는 무기 체계를 말한다. 군사기지, 방위산업 시설, 핵추진 항공모함, 핵무기 탑재 잠수함, B-52와 B-1B를 비롯한 전략폭격기 등을 말한다.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군대를 자랑하는 것은 군 전력자산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도 '핵심 킬러 콘텐츠'와 '군 전략자산'과 같은 것이 있다. 바로 '예배'다. 예배는 신앙의 핵심 콘텐츠이자 전략자산이다.

우리나라 교회들이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신앙생활의 핵심 중에 핵심인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알맹이가 빠진 채 실아가고 있다. 예배가 신앙생활의 알맹이인 이유가 있다. 여호와께서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출 20:11).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만 예배가 핵심 킬러 콘텐츠나 전략자산이 아니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신앙 킬러 콘텐츠이자 전략자산이 예배였다. 믿음의 조상도 핵심이 예배였다면 우리도 신앙생활에서 신앙 킬러 콘텐츠이자 전략자산이 예배여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예배가 '핵심 킬러 콘텐츠'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엄청나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코로나19'에 신천지가 개입되니, 재앙의 숙주(宿主)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킬러 콘텐츠가 되지만, 악한 영이 함께 하면 죄악의 온상이 된다.

예배로 하나님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다(7절).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

이럴 때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인간은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도움이 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또 만나야 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배를 드린다.

저는 영어를 못한다. 외국 여행을 갔을 때, 가야 할 방향을 잃으면 영어를 못하니 한국인을 만나려고 그 자리에서 기다린다. 한국인을 만나면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했다. 마침 하나님께서 나타나주길 바랐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주셨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징표다.

하나님을 만난 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갔다. 그 곳이 벧엘 동쪽 산이었다. 이 벧엘 동쪽 산에서 아브라함이 한 일이 있다. 거주할 집을 준비하자마자 제단을 쌓았다(8절). 즉 예배를 드렸다.

아브라함 일정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쉼이 아니었다. 장막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불을 피우는 것이 아니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예배를 드렸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생각과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의 생각과 삶의 중심은 하나님이었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의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 마침표를 예배로 찍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떠나올 때 무척 불안했을 것이다. 목적이 가나안을 향해서 가는 여정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의 마침표를 찍은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하나님에 의해서였다.

우리 삶의 하루 마침표, 신앙 여정이 인생의 마침표 하나님에 의해 찍혀야 한다. 또한 우리 신앙의 마침표도 하나님을 위해 찍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애국가와 함께 마침표를 찍는다. 시사토론과 함께 마침표를 찍는다. 드라마와 함께 함께 마침표를 찍는다. 우리가 찍을 마침표는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마침표를 찍지 못하면, 물음표를 찍는다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마침표를 찍지 못하면, 물음표를 찍게 된다. 인생과 신앙의 물음표를 찍는다. 세상에 묻고 또 묻는다. 하지만 세상은 답을 줄 수 없다. 그 결과 평생 물음표로 마침표를 찍는다. 신천지와 같이 마귀와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그렇다. 우리 삶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삶과 신앙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음표만 찍게 된다. 그 물음표만 평생 찍는다.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과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하루에는 마감이 있다. 숙제도 마침이 있다. 원고도 마감날이 있다. 인생도 마침표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찍어야 할 마침표는 많다. 먼저 구원의 마침표다. 구원의 마침표를 찍은 다음에는 변화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삶과 신앙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이런 마침표를 내가 찍으면, 잘못 찍을 확률이 크다. 문제가 더 커지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침표를 찍어주시도록 해야 한다.

대부분 마침표를 인간이 찍는다. 그리스도인은 절대 인간인 내가 찍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찍도록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찍으시도록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마침표를 찍으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5절 말씀에 '마침내' 가나안 땅이 들어갔다고 말씀한다. 이 말은 아브라함이 목적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 여정의 마침표를 찍은 것을 뜻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마침표를 찍었다.

아브라함만 마침표를 찍어선 안 된다. 우리도 하나님에 의해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것은 삶이 마침표 찍기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마침표 찍기이다. 신앙 생활을 하다가 이단에 가는 것은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다. 이만희와 마침표를 찍으면 큰일 난다. 마침표는 반드시 하나님과 찍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성경은 그 죽음을 헛된 죽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영광된 죽음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함께 찍었기 때문이다.

바울이나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바울과 베드로를 닮고 싶어한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멋지게 마침표를 찍은 것을 닮고 싶어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존경한다. 그가 존경받는 것은 하나님과 인생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한다. 우리가 예배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인생과 신앙의 마침표를 하나님과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었다고 마침표가 찍는 것 아니다. 하나님 품에 안기는 순간이 마침표를 찍는 것이다.

인간은 악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그럼 왜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마침표가 찍힌다고 말하는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죄악으로 뛰어들기 때문이다.

어릴 적, 아들이 눈만 깜박거려도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간다. 아들이 가는 길은 좋은 길이 아니라. 부모를 잃는 길이다. 다치는 길이다. 위험이 도사리는 길이다. 그러므로 자녀는 부모와 함께여야 한다.

인간은 어떤 존재이길래 하나님과 함께 가야 하는가? 진노의 자녀들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엡 2:3)". 진노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다.

인간이 환경을 파괴하니 돌연변이 바이러스, 즉 '코로나19'가 발생했다. 그 결과 전 세계가 대재앙의 한복판에 들어갔다고들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영국의 대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인간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것을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부패해 버렸다."

"오늘날에는 예전과 다른 옷을 입고 자동차와 비행기와 폭탄도 갖고 있어서 옛날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똑같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고 여전히 실패자이다. 욕정과 편견과 신념과 집착에 사로 잡혀 있다. 우리는 늘 그 자리에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부패하다. 죄악으로 가득차 있다. 하는 것마다 문제를 일으킨다. 인간이 손을 대는 것마다 선이 아니라 악이 나온다. 그 말은 인간이 하는 행동은 선한 마침표가 아니라 악한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이다. 행복의 마침표가 아니라 불안과 불행의 마침만 찍는다는 것이다.

민주당과 한국당이 패스트트랙(국회에서 발의된 안건의 신속처리를 위한 제도라) 문제로 국회에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코미디보다 더 재미있는 코미디를 연출했다. 이는 인간이 하는 것이 욕망과 타락과 죄성으로 인해 악할 대로 악한 모습의 마침표를 찍음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은 선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하나님은 반대다. 아브라함에게 멋진 마침표를 찍어주셨다. 5절에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고 하신다.

7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직선거리 1,700킬로미터인 가나안 땅에까지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숱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사히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 이는 온전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가능했다.

제 인생이 여기까지 온 것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20대 때 죽는 줄 알았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 운전하다 위험한 고비가 아주 많았다. 무사한 상태로 지금도 운전하고 있다. 삶이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었다. 그때도 때 마침 찾아오신 뒤 함께 해주셨기에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

제 친구도 입만 열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지금 살고 있다는 말을 한다. 그 친구도 순탄치 않은 인생길이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자로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아브라함에게만 마침표를 찍게 해주셨다. 그 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에도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도록 마침표를 찍어주셨다. 강한 군대를 지닌 가나안 땅 사람들을 여호수아를 앞세운 정복전쟁에서도 승리의 마침표를 찍어주셨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사는 아주 어두운 시기였다. 그 중간사 때 지칠대로 지쳤을 때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마침표를 찍어주셨다. 실패자로 끝나야 했던 베드로에게도 인간 승리의 마침표를 찍게 해주셨다.

하나님과 함께할 때 버틸 수 있다

저는 10년 간 독서를 했다. 포기가 마땅했다. 하지만 결국 해냈고, 여기까지 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마침표를 찍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제 10년간의 독서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하나님께서 포기가 아니라 버틸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그 버티기로 인해 성장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윤태호 만화가의 <미생>에서 '버티기가 힘이다'라는 말과 '버티는 자가 강자다'라는 말을 실감했다. 10년 간 포기하지 않는 것, 버티는 것, 나의 힘이 아니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하나남께서 붙들어주셨다. 버틸 수 없을 때마다 붙잡아 주셨다.

성장도 내 힘으로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성장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성장할 수 있었다. 즉 성장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셔서 지금도 독서를 하고 있다.

책을 읽을 때 포기의 순간이 아주 많았다. 그 포기의 순간마다, 세 가지를 붙잡았다. 하나는 시편 18편 1절이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사랑하나이다." 그리고 마음 속에 주어진 말씀이 있다. "내가 너와 함께 가리라", "내가 너를 붙들리라". 저는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주신 말씀을 붙들고 포기하지 않았다.

또 다른 하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을 붙잡았다. "배움은 우리의 마음을 지치게 하지 않는다."

배움이란 단어가 강하게 와 닿았다. 배움은 성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성장은 기쁨으로 이끌어준다.

중요한 것은 성장의 기쁨이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때마다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때문에 10년 독서를 성장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포기하지 않고 버틴 것은 회원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만 두고 싶을 때마다 회원들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저는 목사님의 뒤를 따라갈래요.", "목사님과 같은 길을 평생 가겠습니다."

카피라이터 김은주는 그의 책 《너와 나의 1센치미터》에서 이런 말을 한다.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무게는 너와 함께라면 가벼워질 수 있다"고 했다.

만약 내 힘으로만 했으면 도중 하차 했을 것이다. 작심삼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버틴 후 놀라운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선한 결과의 마침표는 인간이 찍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때만 찍을 수 있다.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 되신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인생이나 신앙에서 혼자서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하실 때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은 홀로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불안과 두려움이 극도로 크다. 사람 그 자체로는 미래는 물론 현재도 불안하다.

제가 10년간 독서하기를 포기하려 한 가장 큰 이유는 미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과연 10년을 독서한 뒤 '나에게 멋진 삶이 펼쳐질 것인가?', '과연 나에게 승리의 빛을 볼 수 있을까?', '이렇게 독서하고 글을 쓰는 것이 답이 될까?'

불안하면 누구든지 하던 일에 주춤하게 된다. 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7절 말씀인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말씀을 붙들었다.

제게는 '선한 일들이 펼쳐질 것이다'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더 나아가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인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라는 말씀을 붙들었다.

"여호와께서 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내가 그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신 31:23)".

얼마 전 심방을 통해 말씀을 전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제가 읽은 말씀이 시편 18편 1절이다. 그 이유는 포기가운데 붙들어준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그 집사님이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하길 바랬기 때문이다.

시편 18편 1절 말씀은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을 받은 배우 김혜자의 한 첫 마디였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를 인용하며 소감을 말했다. 저는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전율로 다가왔다.

지금 우리나라는 '코로나19'로 어렵다. 특히 경제가 어렵다. 교회도 힘들다. 공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 이럴 때 우리가 붙들 말씀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편 1절)"이다.

저는 지금도 힘들 때마다, 미래가 불투명할 때마다, 영적으로 힘들 때마다 이 말씀을 되새김질한다.

불편을 내부에서 찾아라

몇 년 전 수원에 있는 한국의학연구소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박명수 목사와 김현수 목사가 스승의 날 기념으로 국가에서 하는 건강검진에 다른 것들을 첨가해 주었기 때문이다.

정밀한 건강검진은 처음 해 보았다. 검사 중 초음파 검사를 할 때 불편하고 힘들었다. 전립선 검사는 두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불편하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검진받는 모든 과정이 아주 불편했다. 그 때 깨달았다. 건강해지려면 큰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구나!

건강도 불편을 감수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아브라함이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고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주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불편을 감수했다. 그 이전에 큰 불편을 감수하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그렇다. 하나님의 인도함 받으려면 큰 불편도 감수해야 한다.

어떤 교회의 부목사가 소원이 있다. "하루에 책 15페이지 읽는 것이 소원이다."

사역으로 아주 바쁘기 때문이다. 그 때 한 가지 더 생각해보았다. 불편을 감수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아브라함은 불편을 감수했다.

저도 큰 불편을 감수하며 살고 있다. 지방에 가서 강의하는 일을 9년째 하고 있다. 엄청 불편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니 불편을 감수하고 있다. 삶이란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여정이다.

지금 책을 15페이지 읽지 않으면, 미래는 더 불편해진다. 그러므로 그 불편을 감수하고 15페이지는 읽어내야 한다. 사람들은 불편의 해결책을 외부에서 찾는다. 불편의 해결책을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인 스티븐 코비가 한 말이 있다. "진정한 성공이란 현실을 벗어나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그것 또한 자신의 내부에서 시작되는 현실이다."

스티븐 코비도 성공도 내부에서 찾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불편을 벗어나는 것도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럴 때 내공을 쌓을 수 있다.

신앙은 하나님 먼저다

아브라함은 불편한 가운데서도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최상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마침표를 찍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전해 가장 먼저 한 것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를 세웠다. 그들은 청교도가 1만 명이 되자, 청교도들의 영적인 지도자인 설교자를 양성할 하버드대학을 세웠다.

아브라함은 가족과 사람들을 챙겨야 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정반대로 했다. 하나님을 먼저 챙겼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신앙생활의 마침표를 찍기 위함이었다.

창세기 12장 7-8절에 제단을 쌓았다는 말씀이 두 번 나온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신앙과 일상에서 하나님의 임하심이 먼저였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일상이 예배였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일상적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이슬람교도들은 신앙심이 투철하기로 유명하다. 그 이유는 하루에 다섯 번 기도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루에 한 번 이상,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 불편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일상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 일상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을 예배자로 살아야 한다.

한 랍비가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신성한 인간이 되는 지름길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학생들은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다하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랍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답은 집에서 '무엇을 먹고 어떻게 생활할지'를 주의하는 것입니다. 결국 답은 일상을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삶이 달려 있다.

아브라함의 일상의 마침표는 하나님께서 찍게 해주셨다. 예수님의 공생애 마침표 역시 하나님께서 찍게 해주셨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의 마침표도 하나님께서 찍도록 내어드려야 한다. 그것이 주일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나야 한다. 일상이 바로 예배자로 살아야 한다.

2019년 5월 4일, 롯데슈퍼타워 빌딩에서 불꽃축제를 했다. 그 불꽃쇼는 롯데그룹이 어린이날을 기념하며 쏜 축포였다. 그 광경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 아름다운 광경은 롯데가 만들어줬다.

마찬가지다. 신앙의 불꽃쇼를 인간이 만들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셔야 한다. 예배자의 삶은 우리가 만들어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셔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줄 때, 최고의 신앙의 축포를 쏘아 올릴 수 있다.

오늘 아브라함의 마침표는 하나님께서 찍어주셨다. 우리 신앙의 마침표도 하나님께서 찍어주셔야 한다. 우리 인생의 마침표 역시 하나님께서 찍어주셔야 한다. 그럴 때 인생의 화려한 불꽃쇼를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세상에 쏘아 올릴 수 있다.

▲김도인 목사.
▲김도인 목사.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