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1] 한국영화 최초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수작 <기생충>의 최근 아카데미 4관왕 수상은 같은 한국인으로서 분명 축하할 일이다. 한국인으로서의 감격과 자부심을 크게 고양시킨 쾌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묘한 아쉬움과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2] 영화 <기생충>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과 그의 아내와 아들 딸은 모두가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사기에 능한 파렴치한 가족이다. 이들은 부자인 박 사장의 가정에 잠입해서 그가 누리는 부의 일부를 가로채려하는 기생충 같은 존재인데, 그들보다 먼저 기생해오던 가정부 문광과 그의 남편과의 치열한 자리다툼이 감칠 맛을 더해준다. '냄새' 운운하면서 빈자를 조롱하는 부자 박 사장 가족과 반지하에 사는 빈자 송강호의 가족과 반지하도 아닌, 빛 하나 없이 캄캄한 지하에 사는 극빈자 문광 가족, 이 세 가족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대조되어 그려진다.

[3] 서민들의 애환과 고달픔에 대한 기득권층들의 거만함과 냉정함을 고발하려는 봉 감독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 속에 전개되는 스토리의 내용과 그 엮어가는 과정이 너무 억지스럽고 과장되고 잔인하다는 점이 많이 거슬렸다. '굳이 그렇게 피를 봐야만 했을까?' '꼭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을까?'라는 의문과 불평이 교차했다.

[4] 자본주의가 낳은 빈부나 신분 간의 피치 못할 격차와 괴리의 문제를 꼬집은 건 지극히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일이었다고 본다. 가난한 이들의 고뇌와 아픔은 헤아리지 못한 채 노예처럼 부려먹는 부자와 권력자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렇다고 부한 자의 부를 쟁취하고자 사기를 획책하고 거짓말을 꾸미고 해치는데 능한 빈자의 잔머리 굴림과 빈자끼리 각자도생을 위해 잔인한 각축전을 벌이는 모습 또한 외면할 수 없다. 영화 속에 나오는 세 가족은 모두가 <나쁜 놈>들이다. <놈놈놈>말이다.

[5]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를 고발하고 꼬집을 뿐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함은 이 영화가 지닌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라 생각된다. '영화가 문제삼은 자본주의가 지닌 치명적인 결함을 해결할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며칠 전 목사, 교수, 선교사의 사역을 두루 경험한 필자의 스승이 던진 질문이다. 그분이 내린 답은 이것이다. 그 문제를 해결함이 지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게 정답이다. 빈부의 격차나 먹고 사는 문제 등은 인간의 방식으로는 모범적 해결책이 없다

[6] 사실 영화 <밀양>에서처럼 <기생충>이 한국교회에 던지는 도전은 결코 만만치 않다. <기생충>은 현대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19-31)로 여겨진다. 부자의 상 아래 떨어지는 음식 나부랭이를 주워 먹는 나사로의 신세나 반지하나 지하에서 사는 빈자와 극빈자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7] 그렇다면 이 영화가 꼬집고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대안은 과연 누가 제시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어디서 말인가? 성경 속에서다. 바로 '오병이어 기적'(요 6:1~13)과 '삭개오의 변화 이야기'(눅 19:1-10)에서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8] 요 6:5절에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셨다. 이에 빌립은 인간적인 계산법으로는 불가하다고(7) 말했고, 안드레는 한 아이의 오병이어가 이 많은 무리들에게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느냐(9)고 대답했다.

[9] 여기서 우린 예수님의 해결책에 주목해야 한다. "'너희가' 어디서?"라고 묻지 않으시고 "'우리가' 어디서?"라고 하셨음을 놓쳐선 안 된다. 당면 과제는 예수님에게도 문제거리였단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해결책은 뭐였을까? 눅 9:16절에 그 해결책이 들어 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라 되어 있다. "하늘을 우러러"란 단어에 주목하라. 이게 바로 정답이요 유일한 대안이다.

"너희가 어디서?"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라고 답하셨다. 그렇다. 세상의 지혜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음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10] 마 5:14절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한다. "빛이 될 것이라"가 아니라 "빛이라"고 했다. 어디의 빛이라 했나? '세상'의 빛이다. 가난과 억압과 착취와 시기와 음모와 갖은 죄 된 것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의 빛 말이다.

[11] 오늘 나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삶을 모범적으로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가? 예수께서 오셔서 친히 불러주시고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심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 소유의 절반"을 내어놓은 삭개오(눅 19:8)를 생각해보라. 천하에 둘도 없는 구두쇠 깍쟁이에게 어떻게 그렇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을까? 하늘의 왕자이신 분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 때문이다.

[12] 칸 영화제에 빛나는 황금종려상 수상에 이어 아카데미 4관왕 수상으로 인해 감독과 배우들이 받고 또 받을 환호와 찬사와 부와 명예가 얼마나 크고 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세인들의 박수갈채에 휩쓸려 그들의 신분과 지위와 부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되는 것으로만 종지부를 찍고 만다면 그들은 영화 속 세 가족들보다 더 악한 파렴치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3] 눅 19장에 나오는 삭개오가 보인 변화와 같이, 가난하고 헐벗은 빈자들을 위한 배려와 사랑과 베풂의 <기생충 사후봉사(after service)>가 그들에게서 나와야 세계 최고상에 걸맞는 명화와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14] 그러면 오늘 하나님의 백성인 나와 한국의 기독교는 과연 어떻게 답해야 한단 말일까? 'Do they see Jesus in me?' '세상 불신자들이 나와 내 삶속에서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가 내려야 할 위대한 도전이 될 것이다.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