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 이종인 역 | 현대지성 | 416쪽 

동화 아닌 위험한 책, <걸리버 여행기>
당시 사회와 사람에 대한 신랄한 풍자
4부에선 말이 사람 지배하는 나라 등장

조너선 스위프트가 1726년에 쓴 <걸리버 여행기>는 동화가 아니다. 초판을 익명으로 출판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책이었다.

초판 역시 출판사에서 많은 부분을 삭제하고 고쳐 쓴 다음 출판했다. 책은 1주일 만에 매진되었고, 3주 만에 만권이 팔렸으며, 2년 만에 독일어, 네덜란드어, 불어로 번역되었다.

이렇게 인기도 얻고, 내용의 진가도 인정받기 시작하자, 원본 출판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초판을 출판하고 10년이 지난 1735년, 삭제된 부분과 고쳐 쓴 부분을 복원한 진짜 원본을 출판했다.

왜 익명으로 출판해야 했을까? 당시 사회와 사람에 대한 신랄한 풍자 때문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아동용 모험 소설이 아니라, 정치 사회 풍자 소설이다. 당시 영국 사회를 비판하고, 통치자인 앤 여왕을 비판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특히 4부에서는 말이 사람을 지배하는 나라를 이야기한다. 그 내용은 사람에 대한 혐오 수준이다. "야후(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저지르는 악덕을 더 키우는 데만 이성을 사용한다. 호수나 샘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 나는 자신이 끔찍하고 혐오스러워 얼굴을 돌렸다."

주인공 걸리버는 이곳에서 자신은 '후이늠(말)'처럼 행동하고 싶어하고, 야후(사람)를 동물 취급한다.

실제로 야후(사람)의 가죽으로 돛을 만들고, 야후(사람)의 기름을 사용해 배에 방수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사람을 혐오하고 동물처럼 취급하는 이야기.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초창기 <걸리버 여행기>는 3부와 4부를 빼고, 소인국과 거인국 내용만 담은 아동용이 먼저 출판됐다. 1992년에서야 제대로 된 완역판 <걸리버 여행기>가 출판됐다.

소인국 릴리펏, 달걀 깨는 문제로 전쟁까지
당시 영국 당파싸움, 영국-프랑스 전쟁 풍자
성도, 영혼 구원하고 사랑하는 일 추구해야

걸리버는 네 곳을 여행한다. '릴리펏'이라는 소인국. '브롭딩낵'이라는 거인국. 공중에 떠서 날아다니는 섬 '라퓨타'. 말이 사람을 지배하는 '후이늠국', 모두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도착한 곳이다. 암초와 강풍을 만나고 해적을 만나고, 다양한 이유로 각자 나라에 도착해서 지내게 된다.

처음 도착한 소인국 릴리펏이다. 이곳은 달걀을 깨는 문제로 당파싸움을 하고 전쟁을 한다. 달걀을 뾰족한 부분으로 깨는지 덜 뾰족한 부분으로 깨는지에 대한 의견차이로 시작된 전쟁이다. 사소한 문제로 싸우는 영국의 당파싸움을 비판한 것이고.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사소한 문제라는 것을 풍자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릴리펏의 법률을 소개하면서 영국 사회의 부도덕함을 비판한다. "그들은 사기죄를 사형으로 다스린다. 사기를 절도보다 더 무거운 범죄로 보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이러하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 조심하고 경계하면 도둑으로부터 재산을 지킬 수가 있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은 그보다 더 교활한 자를 만나면 막아낼 방법이 없다. 그리고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는 계속되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신용이 필수다."

도둑은 경계하면 막을 수 있지만, 사기꾼에게는 정직할수록 잘 속게 되기 때문에 더 악한 범죄라고 말한다.

한 번은 걸리버가 소인국 왕에게 사기꾼의 선처를 부탁했다. 실제로 피해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상 참작을 부탁드립니다. 그는 다른 손해를 끼치지 않고 단지 신용을 위반했을 뿐입니다."

왕은 이렇게 대답한다. "신용을 위반한 것은 당연히 죄를 더 무겁게 보아야할 사유인데 그것이 왜 정상 참작의 사유인가? 한심하군."

릴리펏에서는 공직에 사람을 뽑을 때, 후보의 능력보다 도덕성을 중시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도덕적 성품을 가진 사람이 무지에 의해 저지르는 오류는 공공 이익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그러나 부패한 경향이 있는데다 자신의 부패한 심성을 숨기고, 돋보이게 하고, 옹호하는 능력을 가진 자의 고의적인 술수는 공공 이익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

걸리버는 사소한 문제로 전쟁까지 일으키고 당파 싸움을 하는 소인국의 모습을 통해 영국을 풍자하고, 소인국의 도덕성을 말하면서 부도덕한 영국을 비판한다.

달걀을 깨는 방법으로 전쟁하는 것은 어리석다. 성도는 사소한 일에 목숨 걸지 않는다. 사명에 목숨 거는 사람이다.

EBS ‘세모고전’ 중 한 장면. ⓒ유튜브
EBS ‘세모고전’ 중 한 장면. ⓒ유튜브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행동했고,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처럼 행동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작은 문제에 연연하지 않았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면서 사소한 것을 지키느라 중요한 것을 놓쳤다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내가 지금 소리 높이고 있는 문제가 사명의 문제인가? 사소한 문제인가? 혹시 달걀을 깨는 방법이 사명인양 소리 높여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도는 영혼을 구원하고 사랑하는 일에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다.

거인국 브롭딩낵, '소인' 걸리버 광대로 만들어
목숨 빼앗으며 영토 넓히는 유럽 통렬히 비판
예수님의 힘 희생, 비전은 생명 나눔, 복음 확장

걸리버가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거인들이 사는 브롭딩낵이다. 걸리버가 소인국에서는 너무 커서 주목을 받았다면, 이곳에서는 너무 작아서 주목받는다.

걸리버를 처음 발견한 거인은 그를 광대처럼 부린다. 곳곳에 데리고 다니면서 구경꾼들을 모으고 돈을 받았다. 걸리버의 소문을 들은 왕비가 그를 사면서 고생이 끝난다.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걸리버는 이곳에서도 브롭딩낵 왕과 대화하면서 영국의 귀족 제도와 상하원 제도에 대해서 비판한다. 걸리버의 이야기를 다 들은 왕은 이렇게 말한다. "자네 나라의 국민들 대부분은 가장 해로운 자그마한 벌레같은 족속일세."

걸리버가 영국의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화약을 보여주며, 성벽을 허물고 배를 침몰시키는 대포 위력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화약에 들어가는 원료와 비율을 알기에, 왕이 원한다면 알려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때 왕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파괴적인 무기가 가져오는 유혈과 살육을 묘사하면서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할 수 있는가? 그런 끔찍한 무기의 비밀을 아느니 차라리 왕국의 절반을 포기하겠네."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가면서 영토를 넓히려는 유럽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힘은 잘 파괴하는 능력이 아니다. 땅을 빼앗는 탐욕은 비전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힘을 희생이고 보여주신 비전은 생명 나눔, 복음 확장이다. 성도의 힘과 비전은 십자가다.

크고 작은 것은 상대적, 가치 비교할 수 없어
이전 비해 부유해졌지만, 여전히 결핍 느껴
성도, '하나님 형상'으로 이미 가치 있는 존재

걸리버는 거인국에 도착했을 때 거인들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릴리펏 사람들에게 '산악 인간(산처럼 큰 거인)'으로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내가 목격한 저 거대한 괴물 또한 소인으로 보이는 나라도 있지 않겠는가?" 크고 작다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비교해서 가치를 측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비교를 통해 가치를 찾는다. 내가 얼마를 가졌는지를 보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얼마를 가졌는지를 비교한다.

우리나라 1970년대 중산층은 TV와 냉장고를 가진 가정이었다. 지금 TV나 냉장고를 가졌다고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지금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물건들은 이전에 왕족들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결핍을 느낀다. 내가 누리는 것이 다른 사람 보다 적기 때문이다. 비교를 통해 가치를 찾기 때문이다.

성도의 가치는 다른 사람과 비교를 통해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형상'이기 때문에 이미 가치있는 존재다.

예수님은 그 누구도 비교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죄인들에게도 서슴없이 다가가셨다. 태어나실 때부터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

서로 비교해서 괜찮은 사람만 오는 곳이 아니다. 마음만 있으면 누구라도 올 수 있는 곳이다. 자격이 필요 없는 곳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비교하는 마음이 아니다. 품는 마음이고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가치있게 보시기 때문이다.

떠 있는 섬 라퓨타, 깊은 사색 잠긴 사람들
일상과 동떨어진 사색으로 삶을 놓쳐버려
신앙, 교회 안 아닌 밖에서 드러나야 '진짜'

세 번째로 도착한 섬은 자력을 이용해 공중에 떠 있는 섬, 라퓨타다. 일본 애니매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티브가 된 섬이다.

이곳 사람들은 늘 깊은 사색에 잠겨 있다. 심지어 '치기꾼'이 귀와 입을 살짝 때려주어야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색에 빠져 걷다가 벼랑에 떨어지거나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거나 도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들이 사색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일상과 동떨어진 계산들이다. 한마디로 쓸데없이 진지한 사색을 하느라 삶을 놓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곳에는 '라가도'라는 대학술원이 있다. 그곳에서는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다. '오이에서 햇빛을 추출하는 연구', '배설물을 원래 음식 성분으로 되돌리는 연구', '대리석을 부드럽게 하여 베개를 만드는 연구'.

한 마디로 쓸데없는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수학과 과학, 기술과 연구는 일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상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는 지식이다.

영화 <걸리버 여행기(2010)> 중 한 장면.영화 <걸리버 여행기(2010)> 중 한 장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그랬다. 이사야 1장에 보면, 그들은 많은 제사를 드리고 절기를 지켰다. 그러나 삶에서는 악이 가득했다.

하나님은 그런 모습은 그만두라고 말씀하신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일상의 삶과 동떨어진 신앙을 하나님은 '가증하다'고 말씀하신다. 신앙은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드러날 때 진짜다. 일상에서 힘이 있어야 한다.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때가 진짜다.

후이늠, 말이 사람 야후를 다스리는 나라
걸리버, 야후 보며 사람에 대한 환멸 느껴
영국 돌아가서도 야후 대신 말들과 대화

걸리버가 마지막으로 여행한 곳은 말들이 다스리는 나라다. 이 나라에서는 말을 '후이늠'이라고 부르고 사람을 '야후'라고 불렀다. 이곳은 후이늠이 이성을 가진 존재이고, 야후는 가장 악한 짐승으로 취급한다. 후이늠(말)은 야후(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야후 쉰 마리가 족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다섯 마리에게 던지면, 그들은 평화롭게 음식을 먹기보다 음식을 모조리 차지하려고 조바심을 내며 싸움을 벌이기 시작하네. 때로는 명백한 이유도 없이 이웃 야후 간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네."

또 금을 밝히는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나라의 어떤 들판에는 빛나는 돌이 있네. 야후는 이런 돌을 끔찍이 좋아하지. 이런 돌이 우연히 땅에 박혀 있으면 그들은 종일 발톱으로 땅을 파서 그것을 꺼내고, 그들의 우리로 들고 가서 그것을 숨긴다네."

걸리버는 이곳에서 야후를 보면서 사람에 대한 환멸을 느낀다. 대신 후이늠(말)들을 존경하며 그들과 평생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후이늠들은 걸리버도 야후라는 것을 알고, 그를 추방하게 된다.

걸리버는 그렇게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지만, 가족들과도 함께하려 하지 않는다. 야후들의 냄새도 맡기 싫고, 함께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결국 집 옆에 마굿간을 만들고 말 두 마리를 키운다. 그 말들과 함께 대화하며 지내는 것을 낙으로 여기며 이야기는 끝난다.

후이늠은 이성적, 야후 비이성적·탐욕적
믿음은 상식 위 행동, 상식 아래 행동 아냐
세상 비판, 악마의 공격 치부 못하는 시대

걸리버가 말하는 후이늠의 가장 큰 장점은 이성적이라는 점이고, 야후의 모습은 비이성적이고 탐욕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묘사한다. 영국 사회가 비이성적이고 탐욕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성을 주셨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이 이성으로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 다른 말로 '상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행동하면 '몰상식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가끔 이단이나 일부 잘못된 기도원에서 '상식을 넘어선', '몰상식'한 행동을 전해 듣게 된다. 그런 몰상식이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믿음은 상식 위의 행동이지, 상식 아래의 행동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눈살 찌푸리는 행동은 아니다.

믿음은 반드시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바른 믿음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초대교회가 지도자를 뽑을 때도 칭찬받는 사람 중에 뽑았다. 몰상식하지 않았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몰상식한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 성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사람이 아니다. 칭찬받는 사람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풍자 소설이다. 이러한 풍자 소설이 당대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공감이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은 사람들이 영국 사회의 부조리와 부패한 모습에 공감하고 있었기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오늘날 교회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많은 이들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공감하고 있다는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이 교회의 도덕성을 염려한다. 교회의 정직과 청렴을 걱정한다. 그만큼 심각하다는 이야기다. 더 이상 세상의 비판을 악마의 공격이라고 외면할 수 없다.

현실을 엄중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때다.

박명수 목사
사랑의침례교회 담임
저서 《하나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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