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  ) 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요즘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특이하게 천부경, 불교 등 범신론 계열 종교인들이 성경을 강의하는 동영상이 급속도로 널리 전파되고 있는 실정이다.

강의자들 또한 저마다 말씀의 일인자 임을 자처하고 확신있게 강의를 하기 때문에, 비신자들은 물론 웬만한 교인들, 아니 목회자들조차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듣지 않으면 귀가 솔깃할 만큼 세련되고 현혹적인 내용들이 넘쳐나고 있다.

저들의 강의는 실로 강의 내용의 문제를 지적하기가 쉽지 않을 만큼 단련된 지식과 치밀한 구성력, 유려한 표현력 등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는 흡수력 또한 대단한 것 같다. 그래서 기독교를 식상하게 생각하고 반감을 가진 비신자나 반쪽 신자인 현대인들에게 어필하는 부분이 많은 듯 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스스로 가장 올바른 성경 해석자라고 자처할지 모르지만, 저들은 하나같이 성경의 핵심 본질을 오인하고 왜곡하고 있는 형국이다.

다양한 경전에 대한 수많은 강의 동영상들이 있더라도, 알고 보면 대부분 표현만 다를 뿐 기본 얼개는 대동소이한 내용들이다.

지난 글의 범신론에 대한 개요에 이어, 이번 글에서는 OO학당 강의 내용을 중심으로 몇몇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I. 예수와 보살

저들이 말하는 예수는 하나님과 근본 본체인 성자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진화해서 생겨난 환인(조화주)이나 여러 전생을 거치는 동안 쌓은 공덕으로 비범하게 탁월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불성(佛性)의 최고 구현자인 십지보살(화엄경)이나 아미타불, 시바신과 같은 존재이다.

저들은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요 12:45)"이라는 말씀을 해석하길, 불성의 화신인 아미타불에 몰입함으로써 자신의 불성을 인지하듯 진리의 화신인 예수의 모습을 보고 예수에게 몰입·접속함으로써 자신의 불성/성령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요컨대 스스로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완전한 양심을 가질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이다. 회개나 주님의 구속의 은총에 대한 감격이나 겸손, 경건이나 감사함을 느끼는 일이라곤 없다. 그저 저들이 불성과 동일시하는 성령을 획득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님에게 칩을 꽂듯 접속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기독교인들이 말씀과 성령 안에서 주님과의 전인격적 교제를 통해 주님의 품성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과 달리, 저들은 필요할 때 성령을 호출하고 잘 활용해서 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나아가 예수라는 방편에만 의지하지 말고, 몰입적 연습을 통해 직접 자신의 성령을 찾으라고 한다. 예수만 종이 다른 슈퍼맨이나 금수저냐고 일갈하기도 한다. 결국 남는 것은 예수도 부처도 아니다. 애당초 부처이고 성령인 나 자신만 남는 거라며 기염을 토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안이하게 예수에게 기대고 예수를 우상화하는 초급 수준의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훼한다.

예를 들어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고전 2:7)"라는 말씀이나,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는 말씀에 대한 저들의 해석은 어떤가?

성령 안에서만 하나님의 모든 신비가 풀린다는 뜻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의 비밀을 깨닫는 신비가 아닌, 자신 안의 성령을 스스로 발견하라는 뜻이라고 강의자는 설명한다.

자신의 에고(ego)가 자신의 성령을 담으면, 생각이 전지해지고 감정이 사랑으로 충만해지며 오감이 전능해지므로, 자신이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는 것이다.

즉 스스로 자신 안에 있다고 믿는 불성/성령을 자신이 의지적으로 '풀 가동'해서 스스로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우상숭배요, 하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저들에겐 되려 신성모독이 된다.

나아가 예수의 공로는 예수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으로서 흠 없는 재물이 되심으로써 다른 인간들도 흠 없는 인간이 될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예수의 메시아성과 대속의 공로, 구원의 복음 일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우리가 울적할 때 자신보다 더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고 상대적 행복감을 얻는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즉 에고가 위안을 얻는 방식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보다 더 몽매하고 잔인하고 무분별한 십자가에 대한 조롱이 어디 있는가? 또 부언하길, 평안한 느낌을 원하면, 미소 짓는 부처를 보러 가면 된다는 것이다.

위 강의자는 자신이 무극 상태로 진입할 때 일체 세상과 하나로 관통하는 느낌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때 자신의 존재적 감각 자체가 신성하게 되고 평안, 고요, 만족과 정화를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텅 빈 상태로 자신의 온 의식을 작위적으로 몰입시킴으로써, 즉 의식의 활동을 인위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생겨나는 비정상적인 뇌파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일종의 췌면 효과가 가져다 주는 안정과 광명에의 착각이랄까....

강의자가 구사하는 수사는 지극히 현란하고 현혹적이다. 무극 상태에서의 생각과 감정과 오감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신성의 도구요, 선의 도구요, 성령의 불씨요, 최고의 하나님에 대한 경배라는 것이다. 노자의 무위(無爲)도 성령과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자신을 신성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자기 최면 과정에서 파생되는 자기기만적인 강한 자기 암시의 부산물이다. 영적 각성이니 성화니 부활이니 하는 저들의 기독교식 짝퉁 표현들이....

범신론자의 웅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주의 순수 존재(양심적인 나)가 현상계에서 자신의 존재, 즉 신(神)적 공(空)의 본질을 멋지게 발휘하는 것이 대승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아미타불이 된 법장비구가 48서원을 세우고 극락 세계를 만들어 중생들을 극락 정토에 태어나게 하듯, 우주적 예수 재림은 예수 혼자만의 해탈이 아닌 전 인류적인 해탈을 위한 것이란 주장을 펼친다.

그러면서 말미에는 대승 사상이나 정토 신앙은 초기 불경엔 없는 것으로,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란 설명도 부언하고 있다.

생각컨대, 십자가의 도를 못 깨닫는 저들의 입장에서 신성의 본질에 대해 과연 무엇이라고 말할 만한 게 있단 말인가? 저들의 가슴 속에 주님이 지신 십자가 고난에 함께 참여함이 없는데,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라곤 없는데, 어떻게 부활의 영광에의 참여를 논하기나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불교의 대승 사상이란 것도 나혼자 해탈이 아니라 너도 해탈이라는 식의, 이를테면 동등 비교적 차원에 머무르는 정도의 덕목인 것이다.

신성에 대한 경외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너도 나도 누구나가 신격(godhead)을 지니고 있는 터이니....

흥미로운 것은 강의자가 크리스천들이 주님과 교제하는 것을 하나님과 밀당하고 연애하는 것으로 표현하며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으로 격하시키지 말라"고 훈계한다는 점이다. 이는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을 모르는 소치이다.

또 저들이 인간 에고(ego)의 죄성이나 원죄에 대해 소아(小我)적 효율성으로, 성령을 대아(大我)적 효율성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 다분히 자연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인본주의적 도덕관에 의존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위 강의자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독립과, 인류 전체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길을 전파하는데 실패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예수는 못 이룬 과업을 제자들에게 물려주는 의미로 "나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더 큰 일"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보내주신 성령으로 인해, 제자들이 능력을 받고 복음이 세계 만방에 퍼져나가도록 선교의 문을 열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일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있었기에 가능해진 것 아닌가.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은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으로선 깨달을 수 없는 진리이다(고전 2:14).

위 강의자가 범신론적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즐겨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시편에 나오는 "내가 말하길 너희는 신들(gods)이며 다 지존자(the Most High)의 아들들(sons)이라 하였으나(시 82:6)"이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구절인 "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like mere mortals) 죽으며 고관(every other ruler)의 하나같이 넘어지리로다(시 82:7)"는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이 말씀에 나오는 신들(gods)은 하나님(God)이 아니라, 당시 재판관이나 천사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위 강의자가 신들을(gods) 하나님(God)과 동일시하는 것은 전혀 성경에 대한 기본 지식조차 없음을 드러낸다.

성경을 해석하는 타종교인들은 하나같이 자기들이 성경의 참 해석자인 것처럼 선전하면서, 전체적인 성경의 맥락과는 전혀 동떨어진 강의를 하고 있다. 참으로 거짓된 영의 역사라 아니할 수 없다!

저들은 또 말한다. 예수가 부활을 입증하려면 인류 전체에게 나타났어야지, 측근들에게만 나타나서 자신의 부활을 알리면 사람들이 믿어 주겠느냐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선 우리의 체질, 우리의 연약한 성정(性情)을 누구보다 잘 아신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선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초자연적인 기사와 이적으로 무수한 사람들을 살리시고 고치셨지만, 사람들이 진리와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구하지 않고 표적만을 구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셨다.

주님께서 오직 원하신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뼈속 깊이 체득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자. 주님을 3년 동안 가까이 따르고 직접 가르침을 받던 제자들도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 못하고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주님의 가르침도 전혀 모르고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증인도 아닌 뭍 사람들, 전 세계 인류가 기적적으로 주님의 부활하신 모습만을 일시에 보았다 해서 과연 그들 모두가 주님께 대한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 주님을 전파할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넌센스일 뿐이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께선 보내주신 성령을 통해, 오늘날까지 한 번도 실패 없이 세계 곳곳에서 주님을 전심으로 찾는 자들을 만나주고 계시다. 그래서 주님은 신자들에게 늘 현재적으로 살아계신 구세주가 되신다. 이보다 더 확실하고 지속적인 부활 주님의 목격담이 어디 있겠는가?

한편 기독교인들과 기독교 신앙을 비방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삶대로 사는 본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공격한다. 저들은 신자들이 욕심 때문에 예수처럼 살기는 싫어도 천국만은 가고 싶어서 믿습니다 만을 외친다고 비난한다.

그래서 신자들이 영생을 소원하고 목적을 두는 것을 바리새파적 욕심이라고 하고, 현재 사랑과 황금율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가는 곳이라고 훈계한다.

언뜻 들으면 새겨들을 만한 교훈이 있는 것 같지만, 그렇게 말하는 속엔 무엇보다 생명과 빛이 되시는 하나님의 진리가 자리잡고 있지 않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인간의 근본 문제를 파악하거나 자신의 문제조차 제대로 직시할 수 없다.

오직 성령과 말씀의 진리의 빛 아래서만 어두움의 실체를 발견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어두움을 몰아낼 수 있다.

일부 크리스천들도 마찬가지다. 피상적이고 단편적으로 남들을 판단하고 속단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긴 쉽다. 하지만 적어도 진실한 크리스천이라면 영혼의 현주소를 살피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올바로 정립해야 한다.

우리 각인의 전 생애를 온전히 아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시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삶을 결산하실 주님만을 바라보며 꿋꿋이 전진할 뿐이다.

성경을 강의하는 타종교인들은 복음서를 강의하더라도 복음서의 핵심, 생명의 주권자이심을 드러내는 주님의 이적이나 주님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언급, 또 말세에 대해 예언하신 구절들을 다 언급하지 않는 공통점을 보인다.

저들에게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이고 교훈적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작금의 범신론자들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 취약한 교인들을 미혹하기 위해, 성자 하나님과 무관한 예수, 예수의 영과는 무관한 성령이란 표현을 지속적으로 구사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화려한 수사를 쉴새 없이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이들의 이론이 체계적으로 보일 만큼 장황하고 수식어가 현란하더라도, 핵심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존재론적 구분을 인정치 않는 것이 골자이므로, 영생과는 무관한 한낱 사상누각이요 헛된 이론일 뿐이다.

범신론자들은 관조적 미소를 묘하게 머금은 거짓 영이 도사리고 있는 공적(空寂)한 우주의 빈 자리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런 온갖 장황하고 현란한 이론의 구축물들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마치 그 곳이 하나님의 자리인 것처럼 교묘히 위장해 놓은 중심에는, 일찍이 에덴에서부터 인간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주겠다던 자에 미혹된 인간이 하나님처럼 앉아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