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승 목사(예심교회 동역목사, WIW Ministry 사역)
박종승 목사(예심교회 동역목사, WIW Ministry 사역)

<엘리자베스> 여왕은 교회를 자기 손에 넣지 않으면 국가를 다스릴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영주들이 가진 교권을 감독들에게 돌려주어서 교권을 중앙 집권화 하여 영국을  다스릴 계획을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 지도자들과 귀족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고위층들은 여왕의 교회 정책을 비판했고, 오히려 종교 개혁자들을 후원하게 되었다. 여왕과 귀족들 사이의 갈등은 개혁자들에게 큰 기회였다. <까다로운 사람들>(Precisians)이 보기에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대륙에 피신 중이던 개혁자 약 800명은 이 기회를 호기로 믿고 귀국하였다. 

그들은 영국 교회에 남은 가톨릭의 미신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성호를 긋는 행위, 견신례, 성찬 상 앞에 무릎을 꿇는 것, 성자들의 날을 기념하는 것 등등이었다. 그리고 개혁운동은 <존 후퍼>에 의해 야기된 복장 논쟁으로 이어졌다. 사제의 복장을 착용하는 것은 옷으로 신분을 구별하는 것이며, 이것은 만인제사장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복장 논쟁이 큰 호응을 일으키며 <까다로운 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자, <엘리자베스> 여왕은 위협을 느끼고, <매튜 파커> 캔터베리 대주교를 통하여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여왕은 대주교를 동원하여 청교도를 박해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제 청교도들은 영국의 국교회가 개혁의 걸림돌이라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영국의 의회를 움직여서, 의회를 통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많은 청교도 목사들이 목회지에서 쫓겨났으며, 대륙으로 피신한 자들도 많았다. 의회를 통한 개혁의 시도도 실패했다.

1575년, <매튜 파커>에 이어 캔터베리 대주교에 오른 <그린달>은 청교도가 아니면서, 오히려 개혁을 이끈 인물이다. 그는 교황주의자들을 박해하고, 교권남용을 막고자 했으며, 특히 목회에서 설교를 중시하고 장려했다. <파커>가 금지했던 <제네바 성경>의 번역을 허가했으며, 특별히 청교도들의 설교 모임운동을 장려했다. 청교도들에게 좋은 기회가 온듯하였으나, 하지만 이것도 여왕에 의하여 중지당하고 말았다.

이어서 1583년에 <존 위기프트>가 캔터베리 대주교에 오르자, 그는 영국에서 청교도 운동을 뿌리 뽑기로 결심하고, 수많은 청교도를 고등종교법원에 세웠다. 이에 대항하여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교회에서 감독주의를 제거하고자 나섰다. 하지만, 1588년 영국의 함대가 도버 해협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자, 여유를 얻은 여왕의 청교도 박해는 더욱 심해졌고, 많은 청교도 지도자들이 박해를 당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의회를 통한 개혁이 불발되고 난 후, 청교도들은 설교운동으로 개혁을 밀고 나아갔다. 박해 속에서도 청교도 목사들은 영국의 전역으로 나아가서 설교하여, 청교도의 영향력은 점차 영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마침내 엘리자베스 여왕도 죽었다.

1603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의 호칭으로 영국의 왕을 겸하게 되었다. 이제 청교도들은 새 왕에게 기대를 걸었다. 영국 전역에서 <토마스 카트라이트>를 포함한 1000여명의 청교도들이 <천인의 청원>(Millenary Petition)을 왕에게 제출하여, 영국 교회에서 로마 가톨릭의 '누더기'를 없애고 교회를 개혁할 것을 청원하였다. 이를 해결하기위하여 1604년에 <햄턴 코트> 회의가 열렸다. 잘 진행되던 회의가, 교회 정치 문제에 이르자 왕이 감독주의를 고집하여, 회의는 결렬됐다. 이어서 같은 해에 대주교에 오른 <리처드 뱅크로프트>는 고등종교법원을 열고 청교도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였다.

이제까지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결국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청교도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수많은 투옥과 협박과 고문과 화형과 순교와 도피가 모두 헛수고였든가'하는, '과연 우리가 영국 국교회 안에서 교회를 개혁하여 우리가 원하는 성경적 교회를 이룰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계속 영국 국교회 안에 머물며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가'하는 고민이었다.

시대의 고민은 행동을 불렀다. 분리주의 운동이 나타난 것이다. 교권을 강조하며, 중앙집권적 교권을 고집하는 감독주의 운동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분리주의 운동은 영국 국교회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려는 운동이었다.

적은 무리의 청교도들이 1607년 영국 국교회를 떠나서, <스크루비>에서 새로운 교회, 즉 분리주의자 교회를 시작하였다. <분리주의 운동>은 이미 16세기 말에 시작되었다. 분리주의 사상 때문에 분리주의자 <헨리 배로우>와 <존 그린우드>는 1593년 처형되었고, <프린시스 존슨>은 투옥되었다가 1592년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존슨>은 분리주의자로 구성된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1597년에 영국을 떠나 신대륙으로 갔다. <세인트 로렌스 강> 근처를 탐색하였으나 정착에 실패하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분리주의자 교회를 세웠다. <스크루비>의 분리주의 교회도 투옥되거나 고등종교법원에 불려갔다.

살 길은 영국을 벗어나서, 영국 정부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이민을 가는 것 외에는 없었다. 비밀리에 이민을 계획했으나, 발각되었고, 모두가 30일 구류 처분과 재산을 압류 당했다. 결국 살 길은 이민 외에는 없다고 판단하여, 1608년 <암스테르담>으로 떠났다가, <라이덴>으로 옮겼다. 네덜란드에서 이민자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특히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몹시 궁색했다. 가장 잘 사는 이민자의 생활이 영국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보다 못했다. 자녀들의 교육도 문제가 많았다. 다시 분리주의자들은 심각한 현실 문제에 봉착했다. 새로운 길을 찾아야했다. 일단 영국으로 돌아왔다. 결론은 영국 왕과 국교회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가야했다. 갈 곳은 신대륙뿐이었다. 마침내 신대륙으로 갈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 참고 문헌

  1. 오덕교, 청교도 이야기 (서울, 이레서원, 2002)

  2. 김의환, 김의환 전집1 기독교회사 ( 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2008 )

  3. 오덕교, 종교개혁사 ( 경기, 합동 신학대학원 출판부, 2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