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도올을 처음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여년 전, 서울 연건동 캠퍼스 한 강의실에서였다. 우연히 초청 강사라고 알려진 그의 강의를 듣게 된 것이다.

도올은 그때 왜소한 체격에 '차이나 칼라'의 검은 도복 같은 옷을 입고 나타났다. 좀 헐렁한 인상 못지 않은 그런 어투로, 연신 무슨 무슨 불교에 대해 쉴새없이 설명하는 것 같았다.

당시 회의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빠져 있던 필자였지만, 본능적인 신앙의 씨앗이 그래도 완전 속에서 고사되진 않았던 것 같다. 지금 그의 강의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지만, 당시 그가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치밀어 오르는 반감과 거부감으로 고통을 느꼈던 기억만은 완연하다.

그 후 반 이상 세월을 타국에서 살게 된 필자의 삶에서, 그의 이름은 지나가는 풍문으로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필자가 최근 수년간 고국에 체류하고부터, 사그라진 재가 다시 스치는 바람결에 불똥을 튀기듯, 그의 이름 석자가 심심치 않게 귀를 울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촛불시위 한가운데를 필두로, 그의 '참을 수 없는 존재적 언어의 황당함'이 슬슬 내 비위를 다시 과거처럼 들쑤시기 시작한 것이다.

얼마 전 북한의 인권 문제 지적에 대해 미국을 향해 썼던 표현과는 사뭇 정황이 다르지만, 필자가 전도 대상자로 찍었던 이가 도올의 도마복음 강의를 필자에게 도리어 강추한 것이 말하자면 붙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만 셈이랄까.

작년에 처음 그의 10여년 전 강의를 들어보니, 그는 한 마디로 성경의 예수를 마음껏 희화화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국가적 인물이라 자처하는 이 도올이란 자가 십자가를 진 예수에 대해 "무슨 그런 아무것도 아닌 무명의 촌놈이 감히 십자가씩이나 지고 죽었겠느냐"는 식으로 이죽거리며, "아마 분명 패죽임을 당했거나 아무 나무에나 대수롭지 않게 매달려 죽었을 거"란 식으로 입에 거품을 물며 악의에 찬 표정으로 일갈하며 비아냥거렸다.

그 때엔, 당시 예수의 뺨을 때리며 침을 뱉고 강제로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우악스럽게 눌러 씌워 머리에서 선혈이 흐르는 예수의 앞에 무릎 꿇는 시늉을 하며 "유대인의 왕이여" 하고 이죽거리며 생쇼를 벌였던, 로마 군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가만히 보니 이 자가 모 불교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와 기독교대에서 강의를 할 때, 강의 태도나 강의 내용이 현저히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후자에서는 전자에서와 다르게, 기도나 강의 내용도 제법 진지성을 갖추고 그럴싸하게 들렸다.

그래서 필자는 처음엔 그의 흔들리는 영혼이 분위기에 따라, 즉 모인 이들의 영적인 기류에 영향을 받고 왔다갔다 하는가보다 하고 세월이 지나기까지 좀더 기다려주면 그가 제대로 성경적 예수 신앙 안에 정착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며 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고 참 신앙에서 멀어진 사람들도 같이 나아지리라 희망을 품고 측은지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내 안의 짓누르는 듯한 모종의 영적 분노감과 채무감도 얼마간 덜어지는 듯 하였다.

사실 웬만한 믿음이 있는 신자들에겐 일고의 가치도 없는 그의 강의를 한동안 잊고 지내던 중, 두어 달 전 우연히 인터넷에 그의 마가복음 강의가 뜨기 시작하는걸 보게 되었다.

수년 전 지인의 장황한 추천에 못이겨 서점에서 몇 장을 들추었을 때, 영성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어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던 <로마서 강해>를 읽어야 했다.

그러나 정경에 속하지 않는 도마복음도 아니고, 명실공히 사복음서이자 공관복음 중 하나인 마가복음 강의를 한다니, 호기심이 생겨 몇 편을 듣게 되었다.

그 특유의 연극배우처럼 익살스럽고 몰입적인 표정과 더불어, 제스처와 현장 고증적인 설명이 뭇 청취자들이 지루함을 못 느끼도록 사로잡아 최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용은 하나도 진척된 것이 없었고, 들으면 들을수록 '이렇게 가만히 있어선 안되겠구나' 하는 경각심이 나도 모르게 용솟음쳤다.

줄기찬 책 선전과 더불어 조회수도 상당하거니와, 댓글 내용들도 대부분 그의 강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이들이 주를 이뤘다. 더욱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젊은 층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았다는 사실이다.

문득 필자의 20대 자녀들이 눈 앞에 어른거리며, 그 미지의 젊은이들이 동시에 오버랩되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다 내 형제자매요 어머니'라고, 불특정 다수의 타자를 복음으로 친형제와 부모와 자녀로 삼으라는 교훈을 주신 주님이 아니셨던가....

그리하여 필자는 그의 도마복음과 마가복음 강의 밑에 댓글을 달아 복음 바로 알리기 작업에 들어감과 동시에, 동영상으로 도마복음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도마복음 전문을 읽어보니 어록으로만 되어 있어 여러 다양한 해석으로 비화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 공관복음서의 내용과 공통된 것들이었다.

공관복음서에 대한 이해만 충실하다면 도마복음을 해석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강의를 시작한 것이다.

물론 필자의 동영상 강의는 일차적으로 도올의 성경 강의를 듣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것이다. 이와 함께 도올과 같이 불교나 유교-도교적인 마인드를 가진 자들이 우리나라에, 더욱이 크리스천들과 크리스천 리더들 중에도 많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이들은 공통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그저 상징적인 것으로 일축해 버리고, 성경을 이용해 성경의 진리를 정면 부인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들은 예수 권능의 무력화를 선언함으로써,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한 양 무리들의 영혼을 낚아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는 눈물겹도록 크고 깊고 귀하고 생명보다 소중하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에서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명하셨다.

필자는 이제 한국의 교회와 사회가 눈을 돌려, 여지껏 비정경으로 도외시해온 도마복음을 이용해 공관복음을 비롯한 성경 전체의 본질적 생명의 말씀을 전면 곡해하고 부인하려고 날뛰는, 그럼으로써 많은 양 무리들을 그릇된 길로 호도하는 도올과 같은 이의 독주를 막아야 하는 절실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할 때가 됬다고 확신한다.

자신들은 쉴새 없이 다른 복음을 퍼뜨리면서, 크리스천들에겐 유독 말로 떠들지 말고 참 삶으로만 보이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전도를 훼방하는 저들의 궤계에, 예수의 증인된 우리는 더 이상 위축되거나 속아 넘어가선 안될 것이다.

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반성과 실천적인 삶의 믿음도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단 하루도 놓쳐서는 안된다는 각오 또한 변함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