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월 25 일은 어떻게 성탄절이 되었나? (1)

12 월 25 일은 성탄절이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른 절기이다. 12 월 25 일을 맞으면, 세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감사 예배를 드린다. 가정에서는 성탄절 츄리를 장식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성탄 카드를 보내며 선물을 교환하기도 한다. 현대에 성탄절은 기독교인들만의 절기가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흥겨운 휴일로 자리매김되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태어나신 날이 12 월 25 일로 기록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을 짐작할 수 있는 어떤 암시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면 12 월 25 일은 어떻게 성탄절이 되었는가? 성탄절의 기원과 함께 어떻게 성탄절이 12 월 25 일이 되었는지 그 역사적인 과정을 살펴 본다.

이주섭 목사의 특별기고
(Photo : 기독일보) 이주섭 목사의 특별기고

복음서나 사도행전은 물론이고 바울 서신에도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탄생하신 날을 경축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그 날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년도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누가복음 2:8 절1을 읽으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밤의 계절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돌볼 수 있는 때’는 12 월의 추운 겨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 시기는 여름이나 여름에 가까운 시기가 옳다. 베들레헴을 포함한 유다 산지의 겨울, 밤은 몹시 춥다. 조금 춥지 않고 매우 춥다.

필자가 11 년을 생활했던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의 겨울 밤은 지중해 바다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밤새도록 창문을 때리는 소리에 편안한 잠을 자기 어려울 정도이다. 겨울 밤의 세찬 바람은 매일 반복된다. 베들레헴의 겨울 밤도 기브아의 겨울 밤처럼 많이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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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기독일보) 사진은 2013 년 1 월 10 일에 내린 눈 덮인 베들레헴의 모습이다. 당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적설량은 10-20cm, 헤브론의 적설량은 30cm 을 기록하였다

요한복음 18:18 절의 ‘그 때가 추웠다’고 기록된 그 때는 유월절 직전으로 3 월 말 또는 4 월 초이다. 12 월 말은 3 월 말이나 4 월 초보다 훨씬 춥다. 이런 추운 때에 목자들은 들에서 양떼를 돌보지 않는다. 추운 밤에는 양 떼를 안전한 축사로 인도하여 돌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12 월 25 일을 성탄절로 결정하게 된 이면에는 사실에 기초하기 보다는 다른 것에 기초한 것이다.

성경에는 성탄절에 대한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1-2 세기 초대 교부들의 기록에도 성탄절에 대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교회의 가장 초기 저자들인 이레네우스 (Irenaeus, c 130-200), 터툴리안 (c. 160-225)의 저서에도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 (c. 165-265)은 로마인들이 자기들의 생일을 경축하는 행사를 경멸하였는데, 이는 이방인들의 관습이라 하여 부정하였다. 확실한 것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탄절을 경축하지 않았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주목하지 않았던 반면, 성경이나 초대 교회 교부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간단히 기록했지만, 대조적으로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울의 서신들 모두 예수님의 죽으심을 아주 중요하게 기록하였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은 처음부터 성탄절보다 강조되고 발전되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중요한 믿음의 핵심이었다. 고린도전서 5:7-8 절에 기록되기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주후 2 세기 중반까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기초는 메시아의 대속의 죽으심과 죽음에서 부활이었다. 예수님의 사역, 기적, 고난과 부활은 1- 2 세기 초 그리스도인들에겐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기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비록 정확한 날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2 세기 후반에 들어 성도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도마의 초기 복음 (Infancy Gospel of Thomas)과 야고보의 이전 복음 (Proto-Gospel)이 있다. 이런 책들은 예수님의 할아버지 (grandparents)에도 주목했고 예수님의 어린 시절 교육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 날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탄생일이 처음으로 언급된 때는 주후 약 200 년이다. 이집트의 기독교 교사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당시 여러 기독교 단체들이 주장하는 성탄절을 기록하였지만, 그는 12 월 25 일을 성탄절로 언급하지 않았다. 클레멘트의 기록이다: “예수님의 태어나신 날은 물론이고 그 연도를 결정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 때는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28 년, 이집트 달력으로 Pachon 달 25 일 (현재 5 월 20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매우 정확하게 기록하였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 날은 티베리우스 통치 16 년 Phamenoth 25 일 (3 월 21 일)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이들은 Pharmuthi 25 일 (4 월 21 일) 또는 다른 이들은 Pharmuthi 19 일 (4 월 15 일)에 구원자는 고난을 당하셨다. 더 나아가 어떤 이는 그리스도는 Pharmuthi 24 일 또는 25 일 (4 월 20 일 또는 21 일)에 나셨다고 말한다.”

성탄절에 대하여 성경과 1-2 세기 교회 지도자들이 침묵한 것과 3 세기 초 다양한 날들이 제기된 것에 따르면, 확실히 성탄절의 정확한 날은 알 수 없다. 그리고 2 세기 말에서 3 세기 초에 교회는 비로서 예수님의 탄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3 세기 이후 4 세기까지 넓게 인정된 다른 기독교 단체들에 의해 제기된 두 날들을 성탄절로 경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서방 로마 제국은 예수님의 탄생을 12 월 25 일로 지켰으며, 동방 제국은 1 월 6 일 (특히 이집트와 소아시아 지역)을 성탄절로 지켰다는 사실이다. 현대 아르메니안 교회는 아직도 1 월 6 일을 성탄절로 지킨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12 월 25 일을 더 선호한다. 서방 교회는 1 월 6 일을,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수님 탄생 12 일 후에 베들레헴에 도착하여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것을 기념한 에피파니의 성찬 (Feast of the Epiphany)을 기념한다.

예수님의 탄생을 12 월 25 일로 기록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4 세기 중반 로마 달력 (Roman Almanac)이다. 이 달력에는 기독교의 여러 주교와 순교자들의 죽은 날들이 기록되어 있다. 12 월 25 일에 기록되기를 natus Christus in Betleem Judeae 라고 기록되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뜻이다. 약 400 년에 히포의 어거스틴은 의견을 달리하는 지역의 크리스천 무리들을 언급하면서 12 월 25 일을 크리스마스로 지키는 도나티스트들 (the Donatist)은 1 월 6 일을 에피파니 (Epiphany)로 기념하는 것을 거절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동방에서는 처음부터 1 월 6 일을 동방 박사들과 연관시키지 않았다. 처음에 그 날은 성탄절과 관련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지 거의 300 년 후에 교회의 초기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한 겨울에 지켰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들은 12 월 25 일과 1 월 6 일을 성탄절로 정하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론이 있다. 하나는 매우 보편적인 이론이고 또 하나는 소수의 학자들에게만 알려진 내용이 있다. 도나티스트들은 디오클레티안 (Diocletian) 황제가 다스리던 312 년, 박해 중에 시작된 매우 경건에 치중했던 그리스도인들로 그들은 신앙과 생활을 거의 동일시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엄격한 규칙은 고대 북 아프리카 기독교의 전통을 대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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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기독일보) 나사렛에 설치된 성탄절 츄리

12월 25일은 어떻게 성탄절이 되었나? (2)

12 월 25 일을 성탄절로 정하게 된 가장 잘 알려진 내용은 ‘이 날을 이교도의 경축일로부터 가져왔다’는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한 겨울에 토성을 숭배하는 농신 축제 (Saturnalia)를 가졌다. 그리고 274 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안 (Aurelian)은 태양을 고대 로마의 공식적인 신으로 숭배하였고, 그 축제의 날을 동짓날 (Sol Invictus/ the Unconquered Sun)로 삼았는데 그 날은 12 월 25 일이었다. 성탄절의 날에 대한 기원은 계속 논란이 되는데, 정말로 이 이교도의 태양 축제에서 회전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세계에서 크리스마스를 전파하고 기독교를 증거하기 위하여 신중하게 이 날들을 선택했다. 만약 크리스마스가 이교도 휴일로 보였다면 더 많은 이교도들은 두 개의 휴일과 하나님께서 탄생하신 그 날을 경축하는 두 가지 일에 개방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성탄절은 매우 보편적으로 알려졌음에도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밀에 싸여 있다. 그 날은 고대의 어떤 기독교의 저서들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고대의 기독교 저자들은 동짓날 (solstice)과 예수님의 탄생 사이에서 어떤 관계에 주목했다. 교회의 교부인 암브로스 (Ambrose c. 339- 397)는 예를 들면, 그리스도를 타락한 신들보다 밝게 빛나는 참된 태양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저자들은 최근 역법 공학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가 결정한 날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의 계시의 일치로 보았고 거짓 신들을 넘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셨다는 자연적 증거로 보았다. (나사렛에 설치된 성탄절 츄리)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것은 이교도 축제일에 신중하게 정해졌다는 것을 처음으로 제안한 것은 12 세기까지는 없었다. 시리아 성경 주석가인 Dionysius bar-Salibi 는 성경의 괄호 밖에 기록하기를 고대에 크리스마스 휴일은 이교도의 동짓날 (Sol Invictus) 휴일과 같은 날이 되도록 1 월 6 일에서 12 월 25 일로 옮겨졌다고 적었다. 그리고 18, 19 세기에 성경 학자들은 이 이론에 대하여 연구에 노력했다. 그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언제 태어나셨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이교도의 태양 축제를 교회의 축제일로 받아들였고 그에 따라 예수님의 탄생일로 그 날을 주장하게 되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보여준다. 많은 현대의 절기들은 이교도 관습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다. 기독교가 서쪽과 북쪽 유럽으로 팽창하게 되므로 말미암아,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 츄리 역시 중세의 드루이드 제의 (Druidic practices)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보편적인 이론들은 문제가 있다. 특별히 크리스마스의 날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것과 가장 오래된 경축은 우리는 약 250-300 년에 크리스챤들은 이 같은 명백한 이교도 전통에서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믿음과 관습은 고립되어 형성되지 않았다. 많은 초기 기독교 예배의 요인들은 Eucharistic meals 을 포함하여 meals honoring martyrs and much early Christian funerary art 을 포함하여 이교도 제도와 관련이 있다. 여전히 교회의 초기 여러 세기들에 박해 받는 소수 기독교인들은 일반 기독교인들과 거리가 있었다. 게임과 휴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특히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안의 303-312 박해 때에는 매우 박해가 심하였는데 그때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콘스탄틴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이후에 바뀌었다. 4 세기 중엽부터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신중하게 이교도 축제들을 취하고 기독교화하였음을 발견한다. 이 제도의 가장 유명한 주창자는 그레고리 교황 (Pope Gregory the Great)이다. 그는 601 년 브리튼의 기독교 선교사에게 쓴 편지에서 제안하기를, 지역의 이교 신전들을 파괴하지 말고 대신 그것들을 교회로 바꾸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교도 축제일을 기독교 순교자들의 기념일로 경축하라고 지시하였다.

여기에서 크리스마스는 이교도의 축제일에서 취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3 세기에 이교도 축제일에서 기독교인들이 취했다는 증거를 갖고 있지 않다. 3 세기는 크리스마스가 처음으로 정착하게 된 시기이다. 그래서 추정하기를 크리스마스는 단순하게 이교도의 축제일에서 취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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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기독일보) 이주섭 목사의 특별기고

12 월 25 일은 콘스탄틴이 회심한 312 년 이전에 이미 크리스마스 축제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본 것처럼 북 아프리카의 Donatist 크리스챤들은 그 이전부터 크리스마스 축제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나아가 4 세기 중반과 후반에 동방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을 소개하지 않고 오히려 12 월 날에 더하여 1 월 경축일도 증거하였다.

12 월 25 일의 기원에 대한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의 탄생일의 열쇠는 유월절 예수님의 죽으신 날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이런 관점을 처음 제기한 이는 20 세기에 프랑스 학자인 Louis Duchesne 이다. 이것을 미국인 Thomas Talley 가 최근에 한껏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신 전통적인 날자와 예수님의 태어나신 날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을 처음 주목한 것은 아니다.

어린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십자가의 뒤로 날아가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14 세기 Master Bertram 의 유명한 성수태고지의 장면이다. 예수님의 컨셉은 그의 죽음심을 통하여 구원을 약속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잉태와 죽으심을 같은 날로 보았다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3 월 25 일은 정확히 12 월 25 일의 정확히 9 개월 전이다.

약 200 년 터툴리안은 계산하였다. 니산월 14 일 (요한복음에 따르면 십자가의 날)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날로, 이 날은 로마의 달력으로 3월 25일다. 물론 3월 25일은 12월 25일에서 9개월 전이다. 그것은 후에 예수님의 잉태된 날로 인정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잉태되신 것을 기념하는 Feast of the Annunciation 으로 후에 인정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임하게 되신 첫 날과 십자가에 죽으신 날은 같은 날이 된다. 정확히 9 개월 후인 예수님은 12 월 25 일에 태어나셨다.

이 생각은 On Solstices and Equinoxes 이라는 익명의 크리스챤 논문에 나타난다. 이것은 4 세기 북 아프리카에서 제기된 것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Kalends의 8일 (3월 25일)에 잉태되었다. 그 날은 주의 수난을 당하신 날로 그리고 잉태되신 날이다. 그 날에 주님은 같은 날 잉태되셨고 같은 날에 고난을 당하셨다.”이것에 근거하여 논문은 예수님의 탄생하심을 겨울 가장 추운 날로 정하게 된 것이다.

어거스틴 역시 이것과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그의 On the Trinity (c. 399-419)에 그는 주장하기를: 예수님은 3 월 25 일에 잉태되셨으며 같은 날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셨다. 동정녀 태중에 잉태되신 예수님은 탄생하셨다. 같은 날에 예수님은 죽으셨고 장사지내셨다. 거기에는 장사 지낸 바 없는 무덤이다.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그러나 그는 태어나셨고 전통에 따라 12 월 25 일에 나셨다.

동방에서도 예수님의 잉태와 죽으심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니산월 14 일에서 동방 사람들은 첫번째 봄 달력 (Artemisios)의 14 은 그들의 지역 그리스 달력은 4 월 6 일로 알려져 있다. 물론 4 월 6 일은 정확히 1 월 6 일의 9 번째 달 전이다. 1 월 6 일은 동방의 크리스마스 날이다. 동방 역시 4 월에 예수님이 잉태되신 것과 십자가 사건을 관련한 것이다.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 주교 (bishop Epiphanius)는 4 월 6 일은: 전혀 흠이 없는 동정녀의 속에 어린양이 착상되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지금도 아르메니안 교회는 4 월 초 (6 일이 아닌 7 일)에 성모 잉태한 날로 지키며 크리스마스는 1 월 6 일로 지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잉태되신 날을 같은 날 (3 월 25 일 또는 4 월 6 일)로 근거한 것에 기초하여 두 다른 성탄절을 지키는 두 기독교 단체들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성탄절로 결론된 것이다 (12 월 25 일 또는 1 월 6 일).

예수님의 잉태와 죽으심과 서로 연관시키는 이런 관점은 현대인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초기와 중세에 전체 구원은 서로 관련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것 중의 하나는 크리스챤 예술이다. 많은 그림에서 예수님께서 잉태되는 순간을 천사가 마리아에게 날아가는 장면을 묘사하는데 아기 예수님은 하늘에서 비스듬히 날아든다든지 또는 작은 십자가를 든다. 이것은 잉태되심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의 약속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창조와 구속은 동시에 일어난다는 개념은 또한 고대 유대인의 전통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탈무드에도 기록되었다. 바벨론 탈무드에 보면, 주후 2 세기 초 랍비는 자신의 관점을 소개한다. 그러나 그 날에 동의하지 않는다: 랍비 엘리에젤은 말하기를: 니산월에 세상은 창조되었다. 니산월에 족장들은 태어났다. 유월절에 이삭은 태어났다. 니산월에 그들 (우리의 조상)은 다가오는 때에 구속될 것이다.”

다른 랍비 여호수아는 이 모든 일들이 티슈리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와 에피파니의 날들은 이런 연대에 대한 크리스천의 신학적인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가 죽으신 같은 날에 잉태되셨다. 그러므로 태어나신 날은 그로부터 9 개월 후가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는 질문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12 월 25 일 성탄절이 되었는가? 여전히 우리는 확신하지 못한다. 4 세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전된 축제의 모습은 아마도 이교도의 전통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설득력이 있는 것은 이교도의 관습 보다는 유대교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곧 유월절에 죽으신 예수님은 그리고 랍비의 개념은 위대한 일들은 기대되고 다시, 또 다시 해마다 같은 날에 반복된다는 개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반복과 회복은 아마도 우리가 어떤 것을 건드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방인 로마인들은 Sol Invictus 를 경축했는데,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날로 받아들였고 또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도 기록하지 않았고 초대 교회 지도자들도 예수님의 탄생하신 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후대에 비롯된 교회의 전통이다. 그러면 우리는 성탄절의 정확한 날을 모르는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분명한 것은 그 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탄생하신 사건을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한다.

현대 크리스마스의 날을 지키는 것보다 그 날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묵상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하나님께서 기록하지 않으신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들추어내어 어느 한 날을 기념일로 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왜 하나님께서 그 날을 정확히 기록하지 않으셨는지 그 의도를 묵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날보다는 왜 메시아가 아기로 태어나셔야 했는지를 묵상하고,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에 어떤 일들이 있었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를 묵상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이 날에 묵상할 중요한 말씀들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이 말씀들을 성탄절을 맞을 때마다 이 말씀들을 반복해서 증거해야 할 것이다.

천사들이 들에서 자기 양 떼들을 돌보던 목자들에게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눅 2:10-12)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의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0-23)

12 월 25 일을 성탄절로 지켰던 가장 오래된 기록

12 월 25 일은 성탄절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믿고 기뻐하며 감사 예배를 드린다. 가정마다 성탄 츄리를 장식하며 이웃들에게 카드와 선물을 보내며 즐겁게 보낸다. 어찌보면 12 월 25 일은 기독교인들만의 명절은 아니다. 이 날은 믿음과 상관없이 세계인의 명절이 되었다. 그러면 세계의 명절이 된 12 월 25 일은 어떻게 성탄절이 되었는가 그 역사적인 기록에 대해서 찾아본다.

성경에는 성탄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의 탄생일을 기념해서 지켰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일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연도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았다. 다만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에 밤에 들에서 자기 양 떼를 돌보던 목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누가복음 2 장 8 절3에서 읽을 뿐이다. 이스라엘의 지리적 배경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던 때는 겨울보다는 여름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다 산지의 12 월은 매우 춥다. 유다 산지에 인접한 유대 광야 역시 12 월 밤은 몹씨 춥다. 지금도 유대 광야에 정착한 베두윈들은 12 월 추운 겨울 밤에 밖에서 양 떼를 돌보지 않는다. 겨울 밤에는 양떼를 축사에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탄생 계절에 주목하기 보다는 신학적인 부분에 더 주목해 왔다.

1-2 세기의 역사적인 기록에서 성탄절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기독교의 가장 초창기 저자들인 이레네우스 (Irenaeus, c 130-200)와 터툴리안 (c. 160-225)도 예수님의 탄생일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 (c. 165-265)도 로마인들이 생일을 기념하는 생일 축하 전통을 경멸했고, 이를 이방인의 관습이라 무시하였다. 분명한 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지도 않았고 그 날을 명절로 지키지도 않았다.

이주섭 목사의 특별기고
(Photo : 이주섭 목사의 특별기고)

오히려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이 아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의 기초로 보았다. 부활절은 유월절에 대한 재해석이기도 하다. 부활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억하는 것)을 지키는 것은 고린도전서 5 장 7-8 절의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는 이 내용은 주후 2 세기 중반까지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부활절의 믿음이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은 곧 부활을 믿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예수님의 사역, 기적, 수난과 부활은 1 세기와 2 세기초 기독교 저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후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기원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바울과 마가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정확한 날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마 2, 눅 2). 2 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2 세기 말의 기록인 도마의 어린 복음 (Infancy Gospel of Thomas)과 야고보의 이전 복음 (Proto-Gospel)이란 책에는 예수님의 할아버지와 어린 시절 교육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 날자는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주후 약 200 년에 이르러 이집트의 기독교 선생들에 의해 예수님의 탄생일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 따르면, 많은 기독교 단체들에 의해 여러 다른 성탄일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12 월 25 일을 성탄절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도 12 월 25 일을 성탄절이라고 기록하지 않았다. 클레멘트는 말하기를: 예수님의 태어나신 날과 연도를 결정한 사람들이 있었다. 성탄절은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28 년 (이집트 달력으로) Pachon 달 25 일 (지금의 달력으로는 5 월 20 일)이다. . . .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은 자세히 기록하였다.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날은 티베리우스 통치 16 년 Phamenoth (3 월 21 일) 25 일, 어떤 이들은 Pharmuthi (4 월 21 일) 25 일, 또 다른 어떤 이들은 Pharmuthi (4 월 15 일)에 고난을 받으셨다고 기록하였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탄생일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 세기 말이다. 그리고 성탄절을 경축하고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4 세기 이후이다. 4 세기에 성탄절은 두 개였다. 12 월 25 일은 서방 로마 제국이 성탄절로 지켰던 반면, 동방 로마 제국은 1 월 6 일 (특히 이집트와 소아시아 지역)을 성탄절로 지켰다. 현대 아르메니안 교회는 아직도 1 월 6 일을 성탄절로 지킨다.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킨 가장 오래된 기록은 354년 달력 또는 354년 연대기 (the Chronography of 354)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354 년 연대기’는 로마의 부유한 기독교인인 발렌티누스 (Valentinus)를 위하여 서예가인 퓨리우스 디오니시우스 필로칼루스 (Furius Dionysius Filocalus)가 제작한 달력을 가리킨다. 이 연대기에는 많은 순교자들의 죽은 날들이 기록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12 월 25 일을 설명한 부분이다. 필로칼루스는 12 월 25 일을 ‘natus Christus in Betleem Judeae’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라틴어로 ‘그리스도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말이다. 이 내용이 12 월 25 일을 성탄절로 언급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요약하면, 예수님의 태어나신 정확한 날 곧 성탄절은 알 수 없다. 사도들은 그 날을 언급하지 않았고, 사도들의 제자들도 그 날에 대해서 어떤 암시도 남기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지 약 200 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태어나신 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300 년이 지난 후에야 성탄을 기념하였는데, 그 때는 여름이 아닌 추운 겨울로 결정되었다. 성탄절을 12 월 25 일과 1 월 6 일로 지키지만 이 두 날들은 실제 예수님의 탄생일이 아닌 믿음으로 정해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성탄절은 어떤 날인가?

12 월 25 일, 성탄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날이다. 예수님을 주 (the Lord)로 믿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성탄 예배에 참석하며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고 가족과 이웃과 함께 이 날을 즐겁게 보낸다. 그러나 어느 한 랍비가 쓴 예수님을 주 (the Lord)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성탄절을 어떻게 보내는가?” 에 대한 글을 소개한다.

성탄절을 지극히 기독교적인 명절로 생각하는 많은 미국인들과 달리 유대인들은 성탄절을 애써 평범한 날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들은 성탄절 때문에 받는 많은 사회적 스트레스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 12 월에는 유대인의 겨울 절기인 하누카 (수전절)가 있음에도 유대인들은 12 월을 불편한 달로 생각한다. 1990 년 전국 유대인 인구 조사 (National Jewish Population Survey)에 따르면, 82%의 유대인 가정은 성탄절 츄리를 전혀 하지 않는다. 2013 년 퓨 조사 기관 (Pew Research Center)에 따르면, 성탄절 츄리를 하는 미국 내의 유대인은 1/3 이하이며, 그들 대부분은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다. 일반적으로 성탄절 츄리를 하는 가정은 92%에 이른 비율에서 볼 때 유대인 가정은 성탄절 츄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2007 년 InterFaithFamily.com 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본 웹 사이트를 이용하는 유대인들 중에 자녀들 둔 가정의 7 퍼센트만 성탄절 츄리를 하겠다고 답변하였다. 유대인들은 12 월이 되면 ‘12 월 딜레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특별히 어린 자녀들을 둔 부모들은 아이들이 성탄절 선물을 받지 못하고 성탄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평을 들어야만 한다.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12 월에 대해 그들은 이 달을 ‘딜레마의 달’이라 부른다. 해마다 12 월이 되면 자녀를 둔 유대인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다.

유대인들은 성탄절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심지어 미국에 오래 정착하여 살아온 일반 유대인들도 그렇다.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성탄절을 지키든 말든 별 관심이 없다. 사람들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를 해도 유대인들은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밤 늦게까지 성탄절 장식들이 불을 밝혀도 불평하지 않는다. 공공장소나 라디오, 백화점 같은 곳에서 캐롤이 들릴지라도 거부감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성탄절이 그들에게 즐겁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유대인들은 사회적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한 유대인 작가는 말하기를 ‘이 기간에 우리는 마치 란제리 부서에 속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이 사회의 구성원이지만 마치 그 사회에 속하지 않은 것 같은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성탄절을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성탄절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들은 나에게 이 인색한 ‘스쿠르지 (scrooge)’ 영감 같으니라고 말한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성탄절에 무엇을 하는가? 성탄절에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다. 거의 모든 장소들이 이 날, 문을 닫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몇 가지 일들은 있다.

① 많은 유대인들은 성탄절에 중국 음식점을 찾는다. 미국 연방 대법원의 대법관인 엘레나 케이건 (Elena Kagan)은 어느 상원의원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성탄절에 무엇을 합니까?” 이에 케이건은 “당신도 알다시며 많은 유대인들처럼 나 역시 아마도 중국 음식점에 가 있을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유대인들보다 성탄절을 더 지키지 않는 중국인들은 성탄절에 대부분 문을 열고 영업을 하기 때문이다. 필라델피아나 뉴욕에는 코셔르 중국 음식점들이 많기 때문에 정통 유대인들조차 성탄절에는 중국 음식점을 찾는다.

② 어떤 도시의 유대인 미혼 젊은이 단체에서는 성탄절 전날이나 당일 파티를 열어 마짜 볼 닭고기 스프 (Matza Ball chichen soup)를 제공하며 젊은이 모임을 주선하기도 한다.

③ 성탄절에 영화관을 찾는 유대인들도 많다. 특별히 성탄절 오후 4 시가 되면 많은 영화관은 문을 열고 영업을 한다.

④ 성탄절에 온 가족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유대인 가정도 있지만 그들은 성탄절을 즐겁게 보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성탄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족들이 모이기에 좋은 날이기 때문에 이 날에 모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⑤ 어떤 유대인들은 성탄절에 자원 봉사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다. 특별히 연중 무휴로 일하는 기관인 병원, 신문사, 경찰서에 자원 봉사한다. 이 일은 기독교인들이 성탄절에 쉴 수 있고, 성탄절이 아닌 다른 날에 유대인들이 여분의 휴일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⑥ 뉴욕, 뉴저지,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는 일부 유대인들은 성탄절에 아틀란틱 시티의 카지노를 찾기도 한다. 카지노는 연중 문을 닫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탄절에 호텔 요금은 매우 저렴하기 때문이다. 성탄절에 카지노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유대인, 인디안 그리고 아시안들이 전부이다.

축사에서 태어나 구유에 뉘이신 예수님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 2:3-7)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마을은 유다 산지의 베들레헴이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의 남쪽 약 8km 떨어진 곳에 있다.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의 큰 도시이다. 해마다 성탄절을 맞으면 전세계에서 찾아오는 많은 순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베들레헴을 찾는 많은 기독교 순례자들은 예수님의 탄생 기념교회 (Nativity Church)를 방문한다. 예수님 탄생 기념교회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에 속한다.

이 교회는 327-339 년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건축하였다. 이후 6 세기에 화재로 파괴된 교회를 565 년 황제 유스티니안 (Justinian)이 재건축하였다. 이후 탄생 기념교회는 614 년 페르시아의 침략과 1009 년 무슬림의 al-Hakim 통치 때에도 파괴되지 않고 남았다.

이주섭 목사의 특별기고
(Photo : 기독일보)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 기념교회

로만 캐톨릭은 예수님께서 굴 (cave)에서 태어나셨다고 믿는다. 이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를 동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베들레헴의 예수님 탄생 기념교회는 예수님의 탄생하신 굴 위에 건축된 교회로 믿게 되었다. 예수님은 정말 굴에서 태어나셨는가?

예수님께서 굴에서 태어나셨다는 생각은 순교자 저스틴 (100-c. 165 AD)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저스틴의 저서 트리포와의 대화 (Dialogue with Trypho)에 보면, 마리아와 요셉은 베들레헴 외곽의 한 동굴을 은신처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 요셉은 마을 근처의 한 동굴에 거처를 정했다. 그들이 이곳에 머무는 중에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해산했고, 구유에 뉘었다. 아라비아에서 온 박사들은 이곳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다 (Joseph took up his quarters in a certain cave near the village; and while they were there Mary brought forth the Christ and placed Him in a manger, and here the Magi who came from Arabia found Him).

알렉산드리아 출신 오리겐 (185–c.254)의 글이다: 베들레헴의 동굴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고, 동굴에 있는 구유에 예수님은 강보에 싸여 뉘이셨다. 이 지역과 먼 곳에서 온 순례자들의 이야기는, 이 동굴에서 예수님은 태어나셨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경배를 받으셨다는 것이다 (In Bethlehem the cave is pointed out where He was born, and the manger in the cave where He was wrapped in swaddling clothes. And the rumor is in those places, and among foreigners of the Faith, that indeed Jesus was born in this cave who is worshipped and reverenced by the Christians)

저스틴의 생각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예수님은 베들레헴 외곽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마 2:1, 눅 2:11). 둘째,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바로 그 날 밤에 메시아를 경배한 이들은 들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다 (눅 2:12).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님을 경배하였다 (마 2:1-12).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마리아가 예수님을 해산하던 때에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구유에 뉘였지만, 그 다음 날, 몇 일 지난 후에도 계속 구유에 뉘인 채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아기 메시아를 돌보았을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다. 동방의 박사들이 ‘집에 들어가 (마 2:11)’ 예수님을 경배할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났던 때로 저스틴은 이런 상황을 간과하였다. 세 번째 저스틴의 잘못은 이스라엘 시대의 집 구조를 몰라 ‘구유에 뉘었다’는 말에 기초하여 예수님의 탄생 장소를 동굴로 연결시켰다. 예수님은 동굴 보다는 가축과 함께 생활하던 집의 축사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이 옳다.

이스라엘 시대의 집 구조를 보면 예수님께서 구유에 뉘이셨다는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 시대의 전형적인 주택의 구조는 사람과 가축이 함께 생활하는 집이었다. 집은 두 줄로 기둥들을 세워 지붕을 받쳤던 구조이다. 집의 내부는 기둥을 중심으로 세 구역으로 나뉘어졌으며, 안쪽에 또 하나의 방을 마련한 네 개의 방이 있는 집 (four room house)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집은 네 개의 방이 있는 집 또는 기둥 집 (pillared house)으로도 부른다. 기둥으로 받쳐진 옥상은 롤러를 사용하여 흙이나 석회를 깔고 평평하게 다졌다. 그리고 옥상에 이층 방을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아래층은 가축의 축사, 음식을 저장하는 창고, 음식을 요리하는 부엌, 가내 작업 공간으로 이용했으며, 위층은 가족의 침실로 사용하였다.

이주섭 목사의 특별기고
(Photo : 기독일보) 이스라엘 시대의 집 구조

첨부한 그림을 참고하면, 집의 중앙에 불을 피우는 화덕을 볼 수 있다. 화덕 밑에는 한 여인이 맷돌을 사용하여 곡식을 갈고 있다. 그리고 화덕 위에는 석회암을 파서 만든 물 웅덩이에서 물을 긷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 옆으로 한 여인이 서서 직조틀에서 직물을 짜고 있다. 집으로 들어가는 문 왼쪽으로 축사가 있다. 그 축사 위의 이층은 가족의 침실이다. 침실을 축사 위층에 만든 이유는 겨울철 가축으로부터 온기가 위층으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이층의 침실은 한 가족이 충분히 잠자고 쉴 수 있는 공간이다.

 

베들레헴은 동쪽 유대 광야에서 양과 염소를 돌볼 수 있으며, 마을 가까운 곳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촌 마을이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그 날 밤에 마리아와 요셉은 이층 방과 같은 편안한 공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가축의 축사를 이용했고, 그곳을 해산의 장소로 이용한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를 강보로 싸서 축사의 구유에 뉘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로만 캐톨릭이 말하는 것처럼) 베들레헴에서 벗어난 마을 외곽의 동굴이 아니라 마을에 위치한 일반 주택의 축사가 유력하다. 그러므로 인류의 첫 크리스마스는 가정집의 축사에서 있었다.

Merry Christmas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