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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와 교황청 사이의 갈등 진상은?(下)

기독일보

입력 Dec 04, 2019 10:45 AM P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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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이의 학문과 신앙

교황청과의 갈등

(Photo : )  ▲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그런데 신앙과 학문에 있어 열심이었던 그에게도 어두운 그림자는 다가왔다.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의 연구 결과들이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1615년, 갈릴레이는 바닷물이 주기적으로 들어왔다 나갔다하는 조수 운동이, 지구의 자전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1년에 한 번씩 공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지동설을 주장하였던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견해에 동조하는 이론이었다. 그는 곧바로 가톨릭 추기경에게 불려가게 된다. 1615년 2월 도미니크 수도회의 한 탁발수도사가 갈릴레이에 대한 고소장을 로마 종교 재판소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1년여에 걸친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해 12월,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로마로 갔다. 하지만 1616년 2월, 로베르토 벨라르미네 추기경은 종교 재판소의 이름으로 갈릴레이에게 경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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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의 글들은 교회의 교리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니 지구가 움직인다는 관점을 유지하거나 옹호해서는 안 된다. 이 점을 경고한다." 당시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발견하고도 무사히 일생을 마쳤지만, 그가 죽은 후에야 그가 지동설을 주장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큰 소동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우회(迂回)"라고 알려진 이 유명한 경구(警句)는 바로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고서 교묘하게 교황청의 눈길을 벗어난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데 지오르다노 브루노(1548-1600) 신부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강력히 옹호하다 그만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물론 그가 당한 화형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런 상황 아래 누군가 다시 지동설을 주장한다는 것은 살얼음판을 밟는 것과 같은 매우 위태로운 일이었다.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포기하지 마세요. 언젠가는 아버지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밝혀질 거예요."

마리아 셀레스타 수녀가 된 사랑하는 큰딸의 편지는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는 추기경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대화」(1630년), 「조수에 관한 대화」(1632년) 등 유명한 그의 연구 결과들을 책으로 출판하게 된다. 과학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에게 갈릴레이의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교회가 이 책들을 문제 삼기 시작하였으며 갈릴레이가 곧 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소문대로 이 책들은 1632년 8월에 판매가 중지되었으며, 그 해 10월 갈릴레이는 교황에게 소환되었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 재판은 1633년 6월 22일, 로마 산타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수도원에서 엄숙히 개정되었다.

"갈릴레이의 말과 글에 누구도 동의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도 지구가 움직인다거나 태양이 정지되었다는 것을 책으로 출판하는 것을 금지한다."

마침내 갈릴레이는 눈물을 머금고 교황청에 굴복하였으며,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잘못을 시인하여 다시는 이와 같은 불온한 글들을 발표하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신앙인이요 과학자로서 갈릴레이의 이 같은 고백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그는 첫 번째 신문에서는 자신의 책이 성경과 어긋나지 않음을 강력히 옹호하였지만, 두 번째 신문에서 고문의 위협에 굴복했다고 전해진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는 일화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당연히 그는 그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불만을 나타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이렇게 정죄를 받게 된 데에는 당시의 복잡한 종교,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갈릴레이는 본래 당시(1623) 교황 우르반(Urbanus) 8세로 선출된 마페오 바르베리니(Maffeo Barberini) 추기경과 상당히 절친한 사이였다. 갈릴레이는 우르반 8세 아래 좀 더 자유로운 학문 활동이 자유로울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는 책을 쓰기로 작정하고 『두 개의 주된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Dialogo de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라는 책을 통해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이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주장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 책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서술한 책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직설적으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판단은 갈릴레이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갈릴레이와 새 교황을 함께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제수잇 교단이 갈릴레이의 라이벌이었던 자기 교단의 천문학자 오자리오 그라시를 내세워 갈릴레이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과거부터 갈릴레이에게 호의적이기는 하였으나 교황이 된 후에는 갈릴레이가 자신의 정치적인 반대 세력의 하나인 토스카나 공에게서 경제적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해 하던 교황이 그를 정죄하는 데 동참한 것이다. 결국 재판은 1633년 6월 22일 끝났으며 갈릴레이의 예상보다 더 가혹한 선고가 내려졌다. '이단 혐의가 농후한' 중한 이단에 속하는 죄를 범했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 후 9년 동안 그는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

당시 우리 나이로 70세 노인이었던 갈릴레이는 그를 미워하고 시기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욕망을 추구하던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억울하게 희생양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 상황에서도 "갈릴레이 사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최근(1987년)에는 갈릴레이가 원자론도 주장하였으며, 교황은 그가 원자론보다는 오히려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지동설 주장 혐의로 재판을 받게 선처를 해주었다는 프랑스의 과학 역사가 레도니의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아무튼 이 모든 것들은 갈릴레이가 얼마나 앞서간 뛰어난 과학자였나 하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 욥기서 26장 7절에는 하나님께서 '땅을 공간에 다시며'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달이 지구를 돌듯 지구도 태양을 돈다는 것이 성경과 전혀 어긋나지 않음을 나타낸다. 갈릴레이는 이것을 아는 과학자였다. 잠언 8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하늘을 지으셨고 궁창으로 해변을 두르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두르셨다는 말은 동그랗게 하셨다는 뜻으로 지구의 둥그런 모습을 나타낸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36).

이 말씀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자전하는 지구가 공간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놀라운 계시이다. 성경은 이렇게 분명히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자전하고 있음을 놀랍게도 정확하게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것이 겨우 중세의 기독인 과학자였던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등에 의하여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 재판으로 풀려난 이후에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플로렌스의 작은 농장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구금되었다. 늙은 갈릴레이에게 이제는 딸 셀레스타 수녀의 위로만이 도움이 될 뿐이었다. 그런데 그가 가장 의지하던 사랑하는 셀레스타 수녀가 아버지의 혹독한 시련에 따른 마음고생 때문이었는지 1634년 돌연 사망하고 만다. 딸의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 후유증으로 시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갈릴레이는 1637년 마침내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는 진리를 굽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대한 강의와 수학적 증명"이라는 긴 제목의 논문은 이때 완성된 것으로, 이것은 그로부터 50년 후에야 뉴턴에 의해 발견된 운동의 제1 법칙을 설명한 위대한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천동설을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견해도 상세히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이탈리아가 아닌 네덜란드의 라이덴에서 몰래 출판되었는데, 이곳은 일찍이 1575년, 개신교 대학이 설립될 정도로 과학과 신앙이 자유로운 곳으로 갈릴레이의 책을 출판하는 데는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결국 갈릴레이는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할 말을 다했다. 그의 진정한 상처는 단지 주위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단자"라고 수군거리는 일이었다. 오늘날까지도 갈릴레이의 신앙과 고집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애증을 가지고 있으니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짐작이 가기도 한다.

갈릴레이의 말년과 신앙

그러나 분명 그는 진실한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주위 친구들에게 항상 기도 부탁을 잊지 않았고, 교회 예배에 결코 빠지지 않은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이었다.

"나에게는 지속적인 두 가지 평안이 있다. 하나는 나의 글 속에서 거룩한 교회를 빗나가는 어떤 그림자도 결코 찾을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오직 나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아시는 양심의 증거가 있다. 지금은 비록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오직 하나님은 나의 경건과 교회를 향한 열심을 아실 것이다."

비록 교회와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의 신앙과 학문을 비난하였지만, 한때 수도사가 되려 했던 갈릴레이는 이렇게 담대히 고백하던 경건한 사람이었다. 갈릴레이처럼 실명(失明)하였던 영국의 문학가 밀턴은 자신의 장대한 종교적 서사시 『실락원』에서 갈릴레이와 천문학에 관한 내용을 서술함으로써 젊은 시절 만나 본 적이 있는 이 위대한 과학자의 신앙과 학문을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1642년, 제자인 비비아니와 훗날 유명한 학자가 된 또 한사람 토리첼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갈릴레이는 하늘나라로 갔다. 그가 죽은 후 제자 비비아니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기독교적인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영혼을 기꺼이 하나님께 맡겼다."

그가 죽자 교회는 그를 외면하였으며, 갈릴레이의 관과 무덤도 만들지 못하게 하였고, 고향에 묻히는 것도 금지하였다. 그러나 30년 후, 교회는 그의 유죄를 취소하게 된다. 그리고 100년 뒤에는 무덤과 묘비가 세워졌으며, 인쇄가 금지되었던 책들은 200년이 지나 모두 허용되었다. 그런 후 350년이 흐른 지난 1992년 말, 명예가 정식으로 회복되는 놀라운 일이 있었다. 국제기구는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이용하여 행한 첫 번째 천문학적 관측들을 기리기 위해 2009년을 세계 천문의 해로 지정하였다.

수학자요 물리학자요 실험가요 발명가였으며 음악가요 저술가요 적극적 논쟁자였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지금은 "근대 관측천문학의 아버지"요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탁월한 과학적 업적을 남긴 갈릴레오 갈릴레이! 결국은 갈릴레이 당대의 종교적·정치적 다수가 아니라 그가 옳았다!

이렇게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질서와 운행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진리를 쫓는 신앙의 과학자였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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