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는 논리적이어야 한다."

필자가 입만 열면 하는 말이다. 이 같이 말하는 이유가 있다. 설교가 '논리적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설교자에게 설교를 논리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문제는 그 기본을 갖춘 설교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설교가 논리적이어야 할 이유가 있다. 사람들의 귀는 논리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은 논리가 탄탄하지 않고 부실하다. 설교가 논리적이므로 설교자는 설교를 시작하기 전, 자신의 논리성을 체크해야 한다.

많은 설교자들은 영성이 있으면 설교를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 결과 논리를 갖추는 것은 영성 없는 것처럼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논리를 갖춘 것이 영성이 있는 것이다.

청중들이 날마다 접하는 드라마, 영화, 책 등은 논리가 탄탄하다. 논리적이지 않으면 드라마, 영화, 책으로 나올 수 없다.

설교자들은 그 반대다. 필자가 설교자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늘 느끼는 것은, 논리를 갖춘 설교자를 만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미끼란 낚시꾼의 입맛이 아니라 고기의 입맛에 맞춰야 한다

논리를 갖추는 것은 마치 낚시꾼이 고기의 입맛에 맞는 미끼를 끼우는 것과 같다. 낚시꾼은 고기를 잡을 때 미끼를 사용한다. 미끼가 없으면 낚시를 할 수 없다. 낚시꾼은 미끼를 끼울 때 아무 미끼나 끼우지 않는다. 미끼의 기준이 있다.

'낚시꾼의 입맛이 아니라 고기의 입맛에 맞춘다.'

설교가 논리적인 것은 낚시꾼이 미끼를 물고기 입맛에 끼우는 것과 같다. 물고기가 먹고 싶어야, 미끼를 물 것이다. 미끼를 무는 순간, 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 고기를 못 낚으면 세월만 낚는다고 하지 않던가?

설교가 논리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위와 같다. 논리가 없으면 청중이 설교를 많이 들었는데 세월만 낚는 겪이 된다. 하지만 논리가 있으면 청중은 말씀에 낚인다. 설교자와 낚시꾼의 공통점이 있다. 청중을 말씀으로 낚이고 고기를 미끼로 낚인다는 것이다.

설교가 논리적이지 않은 것은, 낚시꾼 자신이 맛있어하는 미끼를 낚싯대에 끼우는 것과 같다. 낚시꾼의 입맛이 아니라 물고기가 맛있어 하는 미끼를 끼워야 하듯, 설교는 청중의 입맛에 맞게 논리적으로 꿰어야 한다.

'팬슈머'의 시대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20세기는 성경 해석 위주의 설교가 시대의 흐름이었다. 지금은 성경 해석이란 기본 바탕에, 수준 높은 문학적인 가치를 지녀야 한다. 즉 하나의 포인트로 논리적으로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세상을 살아가는 청중들에게 설교를 한다. 그러려면 세상을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세상의 흐름을 알 때 청중과 시대와 맞는 적절한 소통 방법을 찾고자 한다.

지금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소비 패러다임이 급속하게 변했다. 고객의 소비 패러다임이 소유, 경험을 넘어 '관여(engagement)'로까지 발전했다.

《트렌드 코리아 2020》에서는 우리나라 2020년 소비 트렌드 중 하나를 '팬슈머'로 정했다. 팬슈머란 상품이나 브랜드의 생산 과정에 참여하는 소비자를 일컫는 용어다. 이들은 자신이 키워낸 상품이나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동시에 비판, 간섭 등도 서슴치 않는다.

팬슈머는 주어진 것을 선택하는 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는다. 내가 직접 투자해 제조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상품을, 브랜드를, 스타를 키워 내고자 한다.

즉 팬슈머들은 상품의 생애 주기 전체에 직접 참여하는 소비자들이다. 그들은 상품에 대해 "내가 키웠다"는 뿌듯함을 맛보고자 한다.

그 결과 이 신종 소비자들은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구매하지만, 동시에 간섭과 견제도 한다. 팬슈머의 활동 동력은 바로 "이것은 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자부심이다. 밀레니엄 세대의 소비자들은 공유와 관여가 특징이다.

교회도 팬슈머에 예외일 수 없다. 설교도 예외일 수 없다. 밀레니엄 세대들은 설교에도 팬슈머가 되려 한다. 아니 이미 되었다.

밀레니엄 세대들은 설교자의 설교에 관여를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청중의 설교에 대한 관여는 '금기어'였다. 하지만 지금 이 금기어가 깨지기 시작했다.

아트설교연구원 회원들 중 한 분이 자기 친구가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 서울 어느 교회 대학부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학생들이 대학부 담당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목사님, 이찬수 목사님과 같이 설교를 해주세요."

무척 놀랍다. 밀레니엄 세대다웠다. 팬슈머 등장의 여파,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설교의 치외법권적 영역이 깨졌다. 필자는 이 말이 놀랍지 않았다. 이젠 이런 시대가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청중이 교회나 부서에 대해 '어떠한 모습을 띠었으면 좋겠다'는 의견 개진은 많았다. 하지만 설교는 설교자의 고유 영역이라 말하기가 꺼려졌었다. 하지만 밀레니엄 세대들은 다르다.

아니, 이런 징조는 전부터 있었다. 어른들도 '누구와 같은 설교를 했으면' 하는 바람을 동료들끼리 나눴다. 전에도 교인들이 담임목사에게 '누구와 같이 설교할 수 없느냐'고 묻는 말을 몇 번 들은 적 있다.

청중이 설교에 대해 '관여'를 시작했다. 어떤 젊은이가 이런 말을 했단다. "아무리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설교가 맘에 안 들면 당신이 섬기는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

지난 2007년 한국교회 대부흥 1백주년 기념대회에서 설교하는 옥한흠 목사. ⓒ사랑의교회
지난 2007년 한국교회 대부흥 1백주년 기념대회에서 설교하는 옥한흠 목사. ⓒ사랑의교회

논리에 생명을 걸어라

들리는 설교는 논리로부터 시작된다. 논리가 중요하다면, 설교자는 논리 있는 설교를 할 수 있기 위해 생명을 걸어야 한다.

옥한흠 목사는 후배 신학생들에게 "설교 준비, 생명을 걸고 하십시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설교에 생명을 거는 것은 논리적인 설교부터 생명을 걸어야 한다.

논리부터 생명을 걸라고 하면 설교자들이 아래와 같은 말을 할 것이 예상된다.

"논리가 뭐 중요한가?"

하지만 논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는 논리가 중요한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가? 그 중 한 가지는 논리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만약 논리가 좋지 않다면, 그들은 성경을 읽다가 덮을 것이다.

성경은 논리가 완벽하다. 그 말은 설교자도 성경처럼 논리 있게 설교를 해야 한다는 말로 적용할 수 있다. 논리에 생명을 거는 것, 밀레니엄 세대들이 존재하는 한 생명을 걸고 갖춰야 할 요소다.

소통은 논리로부터 시작된다

설교는 소통되어야 한다. 설교의 소통은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백정미는 그녀의 책인 《힘들어도, 울고 싶어도 포기할 순 없어, 내 인생이니까》에서 소통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

"소통은 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소통은 이해로부터 시작된다. 즉 소통은 서로가 이해하고 이해가 될 때 된다. 청중이 설교에 관여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설교가 이해가 되어 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제 한 회원이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설교가 들려야, 교인들은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설교가 들린다는 것은 이해를 넘어, 하나님과 청중 간에 소통이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소통이 되려면 가장 먼저 갖출 것이 논리다.

설교자는 성경 해석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논리도 적확해야 한다. 그럴 때 한국 교회가 이 세대를 품어낼 수 있다.

지금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설교다. 논리가 없는 설교 말이다. 이해가 안 되니, 소통의 부재로 교회가 방향성을 잃고 있다.

소통은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신영준과 고영성이 쓴 책인 《뼈있는 아무말 대단치》에서 소통의 달인 되는 3가지 비결을 이야기한다.

첫째, 신뢰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물론 신뢰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한 번 신뢰를 얻으면 소통에 마법이 펼쳐진다. 신뢰를 얻으려면 '언행일치'를 해야 한다. '솔선수범'을 해야 한다. '도덕적 권위'를 세워야 한다.

둘째, 높은 공감 능력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공감의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아는 것이다.

상황에는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이 있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체대로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훈계하는 사람을 '꼰대'라고 부른다. 이런 꼰대는 나이와 상관없다.

셋째, 논리적이어야 한다.

조직에서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논리적으로 소통해야 한다. 그 결과 논리적으로 소통하려 최대한 노력한다. 논리적이기 위한 방법은 별로 없다. 꾸준한 독서와 글쓰기 그리고 잦은 토론이 필요하다.

신영준과 고영성도 소통은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이 설교자들과 부딪히는 순간, 힘을 잃는다. 이는 설교자에게 설교가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접목되기 힘든 영역이기 때문이다.

밀레니엄 세대들이 설교에 관여할 것이다. 지금보다 더 깊숙이 관여할 것이다. 젊은이들이 관여하면 성인들도 관여할 것이다. 이런 불행한 일이 교회나 설교자에게 없기를 소망한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