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 )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미국 뉴욕 주의 중심부인 해밀턴(Hamilton)에는 콜게이트대학(Colgate University)이 있다. 바로 콜게이트의 이름을 딴 대학이다. 1819년 설립된 콜게이트 대학은 약 70년 동안 콜게이트가(家)의 지원으로 1890년 지금의 콜게이트 대학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이 학교는 뉴스위크지가 뽑은 25개의 신 아이비리그 대학에 선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U.S. 뉴스 앤 월드 리포트지가 발표한 미국의 Liberal Arts College 16위에도 선정된 바 있는 미국의 명문대학이다. 이 콜케이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영국의 한 가난한 소년

오래 전, 미 뉴욕의 맨해튼으로 가려고 나룻배에 오른 18세의 한 영국 소년이 있었다. 아주 가난한 소년이었다. 참으로 비참하고 불행한 소년이었다. 유년 시절 그의 가정은 항상 중환자실 같았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필자도 10살 때 가장인 부친께서 중풍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처럼 늘 안방의 내 곁에 누워있었기에 그 심정을 잘 이해한다.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늘 심한 기침이 멈추지를 않았다. 하지만 이 소년에게도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

'나는 꼭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부모님 병을 고쳐드려야 한다.'

소년은 어려운 처지에도 반드시 부자가 되어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소년이 18세 성인이 되었다. 성인이 되는 의식을 마친 소년은 동네 어르신을 찾았다.

한 노인의 충고

"할아버지, 제가 이제 성인이 되었어요. 가난한 제가 이 험한 세상을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요!"

노인이 소년에게 물었다.

"소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야! 네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지?"

청년이 된 이 소년이 대답했다.

"할아버지, 비누와 양초를 만드는 일만큼은 제가 자신이 있습니다."

노인은 조용히 이 청년의 손을 잡고 격려와 충고를 해주었다.

"윌리엄!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거라. 너는 꼭 성공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단다. 내가 하는 이 말을 꼭 들어야 한다. 네 사업의 주인은 예수님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네 어머니의 신실한 믿음이 윌리엄 너에게도 있다는 것을 내가 잘 안다. 훗날 사업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네 수입의 10분지 1은 반드시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그건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몫이란다."

미국으로의 밀항과 생명의 은인

청년은 이 할아버지의 충고를 가슴에 꼭 간직한다. 그리고 영국에서 미국으로 떠나는 배에 몰래 오른다. 밀항이었다. 하지만 그만 승선자들을 검표하는 선원에게 그는 발각되고 만다.

"어린 것이 감히 배 삯도 안내고 배에 올라타다니---"

소년이 애원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편찮으십니다. 저는 돈이 없답니다. 그러나 꼭 돈을 벌어야 해요. 뉴욕으로 보내주신다면 평생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마침 그 배의 선장은 신앙심이 아주 깊은 사람이었다.

"그 아이를 용서해 주게! 내가 이 아이를 책임지겠네!"

선장은 불쌍한 이 소년을 자기의 양자(養子)로 삼았다. 선장의 도움으로 그는 무사히 미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장의 주선으로 미국에서 비누제조 회사에 취직까지 할 수 있었다. 그는 열심히 일하여 지배인이 되었고, 얼마안가 곧 비누회사의 주인이 된다. 이 사람이 바로 오늘날 세계적 치약 상표가 된 콜게이트 사를 만든 윌리엄 콜게이트(william Colgate, 1783-1857)였다.

콜게이트와 십일조의 복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가 평생을 실천한 것이 있었다. 바로 그의 어머니와 노인의 말을 평생 잊지 않고 수입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콜게이트는 '하나님과의 계산'이라는 장부를 만들어 수익금의 10분지 1을 장부에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어찌 보면 계산 빠른 사업가답지 않은 대책 없는 지독한 신앙의 결심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익은 날로 늘어갔다. 회사는 점점 더 확장되어 치약과 화장품까지 생산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그의 이름을 상표로 붙인 "콜케이트 치약"은 세계적 상표가 되었다.

처음 그는 수입의 10분지 1을 바쳤으나, 그 다음에는 10분의 5를 드렸다. 나중에는 아예 수익금 전액을 하나님 사업에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그의 사업은 오히려 날로 커졌다. 훗날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콜케이트는 이런 말을 즐겨했다고 알려져 있다.

"나의 성공 비결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 교육받아 온 십일조 생활에 있습니다. 수입의 10분의 1은 항상 구별하여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 두었고 나머지 10의 9를 가지고 사업에 투자했습니다. 한 때, 하루의 수입이 네 사람이 겨우 옮길만한 무게의 큰 금덩이만 했을 때에도 저는 십일조 바치기를 주저하거나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른쪽 주머니에는 십일조, 왼쪽 주머니에는 이익금을 담는다"는 말은 콜게이트 사를 상징하는 표어가 되었다. 콜게이트 사에는 한때 십일조를 관리하는 직원만 30명이나 되었다고 전해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라기서 3장 10절)

콜게이트의 브랜드 가치

놀랍게도 오늘날 콜게이트 사는 치약과 세제류를 생산하는 세계 최고의 회사가 되어 있다. 처음 유리병에 담아 판매(1873) 되던 치약을 튜브에 담아 뉴욕에서 시판(1896)한 것도 콜게이트였다. 이 제품은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고 콜게이트를 최고의 치약 회사로 만들었다.1990년대 중반 영국에서 세계 최고 기업들에 대한 인기를 조사한 적이 있다. 바로 회사 이름의 브랜드 가치(brand value) 조사였다. "콜게이트" 사의 세계적 브랜드 가치는 얼마나 되었을까?

향수 제조로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프랑스의 샤넬이 52위, 세계적 스포츠용품사로 유명한 독일의 아디다스가 53위였다. 햄버거로 유명한 버거킹은 61위, 이탈리아의 유명한 의류회사 베네통의 이름의 가치는 75위였다. 그럼 콜게이트의 브랜드 가치는 얼마였을까? 놀라지 말라! 이들 세계적 유명 상표들보다도 더 위인 50위였다. 그리고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최고 재벌 그룹인 삼성의 브랜드 가치가 바로 뒤인 51위였다.

물론 21세기 들어 이들 브랜드 가치 순위는 일부 바뀌었다. 삼성은 더욱 뛰어난 브랜드 가치를 가진 세계적 회사가 되었다. 하지만 콜게이트 사의 명성 또한 자신들이 제조하는 치약 등의 방면에서 그 명성은 여전히 독보적이다. 1806년 회사가 설립된 이래 200여 년이 흐른 콜게이트 치약은 석박사급 연구원만 수천 명에 달하고, 연간 매출액이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글로벌 그룹으로 우뚝 서 있다. 매일 전 세계 6억 이상의 인구가 이 회사의 제품을 사용하고 있으며 시장 조사 회사 칸타르 월드패널(Kantar Worldpanel)의 2015년 보고서에 따르면 콜게이트는 전 가구 중 절반 이상이 구매 한 세계 유일의 브랜드였다. 전 세계 시장 동업종 점유율은 거의 50%로 점유율 2위 브랜드인 코카콜라의 점유율보다도 높았다. 콜게이트 브랜드의 저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콜게이트는 오늘날 콜게이트-팜올리브(Colgate-Palmolive)라는 이름의 미국 다국적 기업으로 가정, 의료, 개인위생 용품의 생산 및 배급 분야 글로벌 최고 기업의 명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이런 세계적 회사를 일궈낸 콜게이트의 경영철학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첫 번째 실천이 바로 "철저한 십일조"였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