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한 달 동안 제 목회 생활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목회의 현장 여러 곳에서 갑자기 밀려오는 회의감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단순한데, 하나도 제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직면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벽 앞에 서 있었습니다.

2. 끊임없는 질문들이 생겨났습니다.

조국 전 장관의 논란과 태극기 부대와 촛불 시위의 격돌 현장 가운데에 살아가는 젊은 목회자이면서, 한 명을 모두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비전을 실행해야 하는 달꿈학교 교장과 선생님으로서, 누구도 감당 못할 큰 상처를 이제 딛고 일어나 치열하게 살아가는 생명샘교회를 섬기는 책임 목사로서, 지역의 소통과 쉼터로서의 역할, 달꿈학교를 위한 디딤돌의 역할을 감당해야하는 카페 사장으로서, 무엇 하나 나는 내 자리에서 과연 제 역할을 감당하는가?

3. 설리 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지게 했습니다.

예전에 청년부에서 유서쓰기를 했었습니다. 몇몇 청년들이 유서를 읽으며 울었습니다. 대다수 청년들이 남긴 말은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였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니, 우리는 그제서야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한 것뿐입니다. 상처를 주면서도 몰랐던 겁니다.

내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달려갈 때는, 그로 인한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얼마나 많은 이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악플러들이 자신이 누구인 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안도감으로 죄를 짓고 있음을 망각하고 있듯이, 우리도 그렇게 누군가를 아프게 하면서 살아가지요.

왜 우리는 설리 씨가 그런 비극적 선택을 하도록 방치하고, 아니 그제서야 뒤늦게 후회하고, 미안해할까..., 마음이 먹먹합니다.

4. 최근 슬럼프를 지나며 두어 번 생각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마음 하나는, 물러섬입니다. 최근의 주변 상황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또 어제는 조국 전 장관이 물러남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도 했듯, 때로는 그 물러섬이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어쩌면 목회 현장과 학교 현장에서 제가 물러서는 것이 교회와 학교를 위한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역할은 다 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더 이상 내가 하는 것이 주님 뜻이 아닐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5. 예전에 한 청년이 문제보다 존재가 귀하다는 것은 알지만, 문제가 더 크게 다가오면 어떻게 하냐는 질문을 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당연히 문제보다 존재가 귀하지만, 때로 현실의 문제들은 존재보다 크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문제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시 그 존재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상황들과 맞물려, 내가 잠시 멀어지는 것이 여러모로 맞지 않는가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저를 바라보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제가 책임져야 할 상황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들은 물론,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므로 결단하기가 힘들었지요. 이럴 때마다 어려운 것은 상담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6.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어떻게 버티는가 묵상하면서, 지난주 아트미션에서 준비한 난민 어린이 돕기 자선 바자회 콘서트를 다녀와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정리되지 않은 마음 그대로, 물러섬과 거리둠의 간격을 어찌해야할까 고민하던 중, 하필이면 오는 주일 설교 예정이던 목사님의 설교가 갑자기 취소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설교 준비를 위해 시간을 쓰기도 부족한 상황에서, 운전대를 잡고 돌아온 시간은 벌써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그런데 오는 길에 뒤에서 누군가 말합니다. "달 좀 보세요. 완전 동그래요." 운전 중이라 흘깃 봤는데, 정말 둥글둥글했습니다.

7. 문득 제 상황과 연결지어 생각이 들어 마음으로 대화했어요.

'달아 달아, 너는 왜 그리 모양까지 바꾸어가며 그곳에 있니. 네 몸부림이 얼마나 처절하니. 그렇다고 별 한 조각 니 곁으로 가지 않잖아?'

저 달은 왜 저리 모양까지 바꾸어가며 처절할까. 몸의 절반이 깎이는 반달이 되면서까지. 아니 온 몸 사라지고 손톱 하나 남은듯 초승달이 되어도, 그리 하면서까지 밤 하늘에 있는 이유가 뭐냐며 대꾸 없는 달을 괴롭혔습니다.

고고한 달은 그런 대화를 거는 제게 대답할 시간 없는 듯, 그저 빛을 발할뿐입니다. 그 빛이 냉정하게 느껴집니다.

8. 그러면서 마음을 달리 먹었습니다.

'버텨야겠다. 그래, Understand. 그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몸부림쳐야 하는거구나. 누군가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렇게 있어야 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버티지 않으면 안되는 자리가 있다. 그래, 불과 몇 주 전 이정하 시인의 낮은 곳으로 시를 읽지 않았던가.' 스스로를 격려하며 말입니다.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몸부림쳐보자 결의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평안이 온 것은 아닙니다.

9.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말씀을 마무리하고 기도하던 중, 갑자기 마음 가득 위로의 따스함이 채워집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한승아, 달은 몸부림친 적 없어. 자기 몸을 바꾸려고 몸부림치지도 처절하지도 않았어. 그냥 그대로 언제나 그 자리에 주어진 대로 살아가고 있단다.

초승달이건 반달이건 보름달이건, 어떤 모양이건 달은 달이여서 행복해서 그 자리에 있단다."

10. 마음에 밝은 빛이 가득 들어찹니다.

달빛이 자신의 마음을 빛으로 채워주는 듯 합니다.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심을 믿는 순종의 마음이구나. 보름달인 상태에서도 온 몸 다 깎인 초승달이 다시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이미 비움의 달이구나.

이것이 다윗이 걸어갔던 베레스 웃사의 현장이구나. 몸부림친 것 같지만 순종의 길이었구나. 그저 주어진 대로, 그 길을 느리더라도 걸어갔구나. 그래서 어느 날 나같은 사람이 초승달을 봐도, 반달을 봐도, 보름달을 봐도 행복해지도록, 별빛 한 조각 그 곁으로 가지 않아도 너는 행복했구나.'

그리고 하늘을 묵상해 보니, 별조각도 달도 모두 각자 자기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떨어져서 자기 빛을 발합니다.

11. 제 자리가 가진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릴 때가 있습니다. 마음 아파도 보름달처럼 환히 드러내야 할 문제도 있고, 가슴 졸여도 초승달처럼 자기 온 몸을 가리우듯 가리워줘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하는 현장은 조금 특수한 곳이라 생각했던것이 교만이었지요. 내가 일이 많다는 것이나, 주변 사람이 안 바뀐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이예요.

어떻게든 버텨야지 하는 그 마음 그대로가, 제가 가진 욕심이었습니다. 그 마음은 어찌 됐건, 내 힘으로 하려 했던 자기가 주인된 타작마당이니까요.

내 지식과 경험에 의지하고 판단한 것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있으려고 하는 것도, 사람이 주인된 현장입니다.

내가 주인된 현장은 늘 아픔이 따릅니다. 웃사를 죽이시듯, 그래서 다윗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주님의 역사가 있으니까요.

카페에서 ‘알바’하고 있는 류한승 목사.
카페에서 ‘알바’하고 있는 류한승 목사.

12. 사랑하는 여러분, 별조각 하나 제 곁에 없다 해도 모든 것 드러내는 둥근 달이건, 제 몸 다 깎인 초승달이건, 빛이 되는 달이 되면 그걸로 감사한 하루를 살고 싶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십니까. 홀로 고고히 오늘도 어둔 밤을 비출 달빛을 통해, 주님이 여러분에게도 따스한 목소리를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달은 한 순간도 몸부림친 적 없어. 그저 주어진 대로 순종했을 뿐이야. 달은 그래서 행복해. 너도 행복하기를."

얻고자 했던 것이 있다면, 잠시 내려놓으세요.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그것은 별 게 아닙니다. 정말 귀중한 것들을 손에 쥐기 위해 여러분이 탐했던 그 실과를 손에서 내려놓을 때, 참 자유함이 다시 찾아올 것을 믿습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