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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의 신앙과 삶

기독일보

입력 Sep 26, 2019 10:44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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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누구든지 오늘날 교회의 철탑과 십자가를 바라보면 그 위에는 반드시 피뢰침이 먼저 하늘로 가까이 뻗어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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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피뢰침을 발명하여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프랭클린이 말한 이 간단한 격언을 통해, 우리는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사실 프랭클린은 신앙적으로는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누구든 어린 시절 한 번쯤 읽어 본 그의 전기를 통해 필자도 프랭클린의 삶을 무작정 존경하던 적이 있기는 하였지만, 오늘날 우리의 '한국적 신앙의 틀'로 본다면 그가 결코 정통적 신앙의 길을 걸어간 인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편협한 신앙적 틀'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훌륭한 삶을 이어 간 인류사의 위인을 외면해 버리는 과오를 범하는 것은 더욱 마음이 내키지 않았음을 미리 밝혀 둔다.

독실한 청교도 가정

1771년부터 쓰기 시작한 프랭클린의 자서전은 오늘날 위대한 인물들이 기록한 세계의 자서전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서전 중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프랭클린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신앙적 입장에 대해 아주 솔직하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나는 장로교회의 일원으로서 경건한 가르침을 받고 자라 왔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분의 섭리에 따라서 다스려지고 채워진다는 것,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 모든 죄와 악행은 이 세상이나 내세에서 반드시 보응 받는다는 것을 나는 결코 의심하여 본적이 없다. 나는 공식적인 예배에는 잘 참석하지 못했으나 필라델피아에 단 하나 있는 장로교회에 대해, 목사와 그 집회를 후원하기 위해 해마다 규칙적으로 헌금을 잊지 않고 보냈다."

"오늘날 미국의 정신은 프랭클린의 정신"이라 할 만큼 미국의 정치가·사상가·과학발명가로 미 독립선언서 작성에 참여해 미국인들로부터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보스턴의 가난하고 이름 없는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 그의 아버지 조 사이어 프랭클린도 영국 사람이었다.

영국에서 일찍부터 종교개혁 운동에 참여했던 그의 조상들은 가톨릭에 완강하게 저항해 위험한 고비도 여러 번 넘기곤 했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가톨릭에서는 일반인들이 성경을 소유하고 읽는 일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그의 조상들은 성경책을 조립식 의자의 깔개 밑에 펼친 채로 넣어 끈으로 묶어 감춰두었다고 전해진다. 성경을 볼 때에는 혹시 종교 재판소의 관리들이 들이닥치지 않을까 염려하여 가족 중 어린 아이 하나를 창가에 두어 망을 보게 하였다. 프랭클린의 4대 조부는 조립식 의자를 거꾸로 뒤집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성경을 노끈 아래로 책장을 넘겨 가면서 가족들에게 읽어 주었다고 한다.

이런 영향 아래 영국 법으로 금지된 비국교도 목사의 가르침을 받던 그의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1682년 종교의 자유 하나만을 위해 미국의 뉴잉글랜드 땅으로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은 열일곱 자녀 중 열한 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형들은 일찍부터 기술을 배워 생활 전선에 나가게 되었는데, 벤저민은 열 아들 중 하나는 하나님께 바쳐야 된다는 그의 아버지와 큰아버지 소원에 따라 여덟 살이 되던 해 목사를 양성하는 라틴어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특히 믿음 좋은 큰아버지는 자신이 고안한 속기술로 기록해놓은 모든 설교집을 벤자민에게 속기를 가르쳐 넘겨주겠다고 할 만큼 조카에게 커다란 기대를 가졌었다고 한다.

하지만 벤저민 가정의 극심한 가난은 그를 공부에만 매달리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겨우 2년을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둔 벤저민 프랭클린은 아버지의 양초 만드는 일을 돕다가 12세가 되던 해 배 다른 형 제임스가 경영하던 인쇄소에 견습공으로 들어가게 된다.

팔방미인 독서광

어린 시절부터 유난히 책을 좋아하던 프랭클린은 16세 때부터 신문에 '사일런스 덕우드 부인'이라는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 같은 그의 저술활동은 훗날 문학과 과학뿐 아니라 예술, 정치, 종교, 교육, 철학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10대 시절 잠시(1723년) 형과의 의견 불일치로 필라델피아로 갔다가 이듬해 영국 런던을 방문하면서 견문을 넓히기도 했던 프랭클린은 스물한 살 때 기술자들과 기업인들의 토론 모임을 만드는데, 이것은 오늘날 미국 철학회의 시발이었다.

그의 저작 중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은 26세부터 시작되었는데, 여기에는 상식적이고도 재치 있는 경구(警句)와 함께 해가 뜨고 지는 것과 달이 뜨고 지는 위치, 기상 예보뿐 아니라 교회 예배일과 기념행사 등을 담아 금세 유명해졌다. 이 달력은 1758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여기에는 10대 시절 일찌감치 형 제임스가 발행하던 신문인 「뉴잉글랜드 신보」의 발행인이 되는 등 여러 경험을 쌓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그가 만든 조합 도서관은 필라델피아 도서관의 시발이었고, 1736년에는 난로를 개량하여 열효율을 크게 높인 오픈 스토브도 발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 최초의 보험회사인 필라델피아 화재 보험 공동 금고를 만드는가 하면, 소년 시절부터 인쇄소에서 일하던 자신의 손마디 통증을 통해 이것이 납 중독에 의한 것임을 밝혀내는데, 오늘날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는 직업병이나 공해 문제를 기술 발전이 미천하던 200여 년 전 지적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은 그가 얼마나 다방면에 관심을 지닌 다재다능한 인재였으며 뛰어난 천재였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피뢰침 실험

1752년, 드디어 프랭클린은 유명한 연(鳶)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 번개와 전기의 방전은 동일한 것임을 증명하게 된다. 바로 그 해, 이것은 번개의 피해를 막는 피뢰침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실용화되었고 세계 각국으로 신속히 전파되어 나가, 번개로부터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전기의 플러스와 마이너스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장본인도 바로 그였다. 이런 여러 가지 공로로 인해 프랭클린은 영국 왕립협회의 회원과 프랑스과학 아카데미의 회원도 되었다.

1753년에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최초 우체국장이 되어 미국 우편 제도의 기초를 닦기도 한다. 우체국 수를 대폭 늘리고 역마차를 도입하여 소포 업무를 개시한 것도 그였다. 이런 경력으로 인해 프랭클린은 훗날 독립 후 노령의 나이로 체신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프랭클린의 미국 독립 의지는 구체적으로 싹트기 시작하는데, 1757년에는 펜실베니아의 이익을 위해 영국에 다시 파견되어 식민지 자주 과세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1764년에도 영국을 방문한 프랭클린은 인지조례(印紙條例)의 철폐를 주장하여 정치인으로서의 수완을 보였다.

여러 번 영국을 방문하면서 프랭클린은 산소를 발견한 영국의 유명한 과학자요 비국교도의 목사였던 프리스틀리와 교제를 갖기도 하고, 퀘이커교도에게도 호감을 갖는가 하면, 사순절을 굳게 지키는 등 신앙과 관련된 여러 계기를 갖게 되지만, 그 이상 그의 믿음에 어떤 획기적이고 극적인 변환이 이루어진 증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다만, 프리스틀리 목사와의 만남은 프리스틀리가 훗날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영국에서 신변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위기에서 벗어난 후, 1794년 신앙의 자유가 있는 미국으로 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프리스틀리에게 펜실베니아 대학의 교수직을 제안한 것도 프랭클린이었다. 프리스틀리는 프랭클린의 영향으로 전기와 관련된 여러 편의 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프랭클린이 프리스틀리 목사에게 보낸 편지(1780년)를 보면 프랭클린은 과학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며 자신이 너무 일찍 태어난 것을 탓하며 과학의 진보에 아주 긍정적 신념을 가지고 있음을 피력하고 있다.

프랭클린의 신앙

프랭클린은 1739년 필라델피아를 방문한 아일랜드 출신의 선교사였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의 설교에 크게 감동하여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털어 헌금하는가 하면, 그의 설교에 감화된 주민들의 변화된 모습을 감동적으로 자신의 자서전에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신앙 하나 때문에 뉴잉글랜드로 이주한 그의 부모의 독실한 청교도적 믿음을 따라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스스로 13가지의 계율을 정해 놓고 이것을 지키려고 애쓰며 살았는데, 이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정의로우며, 진실 되고 근면하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절제된 삶을 살려고 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이것은 분명 오랜 신앙적 훈련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마지막 계명으로서 겸양의 모범으로 예수님과 소크라테스를 따르자는 계명을 기록해 놓고는 이 모든 것이 습관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였다고 한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한 덕목들인지도 모른다. 좀처럼 개인적 신앙 고백을 하지 않은 그였지만 지혜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따라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솔로몬의 잠언을 인용하며 고백을 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신앙의 독특성을 찾아볼 수 있는 한 가지 증거가 될지 모르겠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여, 참된 지혜를 더하여주소서. 나의 결단에 힘을 더하여 주시고, 지혜가 명하는 대로 행할 수 있는 결심을 갖게 하여 주소서. 당신의 다른 자녀들에게 내 마음 속의 임무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이것이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에 내가 행할 수 있는 한 가지 보답이옵나이다."

자신이 정해 놓은 계율에 따라 하루의 24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적어놓은 그의 작은 수첩에는 하루의 시작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로 시작됨을 분명히 기록해 놓고 있음도 볼 수 있다. 이런 자세한 내용이 적힌 자서전의 집필을 시작한 것은 프랭클린이 65세가 되던 1771년이었다.

그리고 1776년, 미국의 독립전쟁 시에는 가장 나이 많은 혁명가로서 활약하며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 위원이 되어 토마스 제퍼슨을 도왔고, 그 해 청교도 국가 미국이 탄생하면서 프랭클린은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사람 가운데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프랭클린은 미국의 독립 이후에는 파리 조약의 전권 대사로도 활약하고, 펜실베니아 주지사로 미국 헌법을 만드는 최초의 헌법 회의에도 참가하게 된다.

"하나님이 하루를 지금의 두 배로 만들어 주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가 그의 아내에게 했다는 이 고백을 통해 우리는 프랭클린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살았는가를 알 수 있다.

"일생을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지나온 일생 중에서 잘못된 부분을 고쳐서 다시 살고 싶습니다."

이 고백처럼 프랭클린은 욕심도 많고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가끔 기도문으로 이용하였다는 영국 시인 톰슨(1700-1748)의 다음 기도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빛과 생명의 아버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여,
나에게 선한 것을 가르쳐 주시고 주님의 형체를 보여 주소서.
어리석은 것,
덧없는 것,
약한 것,
모든 비천한 것에서 나를 구해 주소서
지혜와 평화와 순결의 덕으로 제 영혼을 채워 주소서.
거룩하고 충실하며 결코 시들지 않는 축복을 주소서."

프랭클린은 어린 시절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가장 즐겨 읽었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 이것은 아마 그의 가족의 신앙적 분위기가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밝혔듯, 프랭클린은 그의 부모나 윗세대만큼 청교도로서 신앙적 의미의 치열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시대는 프랭클린의 선조들이나 부모 세대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에는 가장 미국적인 청교도 정신이 살아남아 있음도 또한 사실이다. 이 점이 조금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신앙의 모든 것은 인간이 기준이 아니다. 모든 것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이다. 프린스턴 대 교수를 역임한 과학사학자 찰스 길리스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생애는 청교도의 헌신과 열의가 종교의 에토스로부터 과학의 에토스로 이행된 것으로, 청교도 윤리가 과학과 정치라는 세속적 활동으로 돌려진 보기로 미국인을 고무하는 데 사용되었다고 했다.

기독교인이 전 인구의 30퍼센트 가까이 된다는 최근 우리 사회의 도덕과 윤리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치열한 삶을 이어 간 그의 생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우리의 학교 교육이 기계적으로 영어나 수학 문제를 하나 더 풀어주는 것보다, 한 시간만이라도 위인들의 모범된 삶을 통해 학생들을 교훈하는 것은 어떨까?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한 시간만이라도 읽어 주었다면 우리 사회가 이처럼 삐걱거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필자는 해보게 된다. 참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는 프랭클린과 같은 철저하고 정직한 인물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1790년, 프랭클린이 늑막염으로 사망하자 온 미국 국민은 진심으로 슬퍼하였으며, 미국 정부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러 그의 서거를 애도하였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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