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 신앙의 영성을 염원하며'를 주제로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와 이은선 교수(안양대, 교회사) 간의 대담이 19일 오전 서울 도곡동 강변교회(담임 이수환 목사)에서 개최됐다.

김명혁 목사는 매달 교계 원로 지도자 및 신학자들과 함께 한국교회가 회복해야 할 영성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지난 6월 '주일성수 신앙의 영성을 염원하며' 대담 후, 여름을 지내고 3개월만에 대담이 재개됐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큰 축복
'주일성수'와 '새벽기도', '순교' 신앙

먼저 김명혁 목사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큰 축복은 '주일성수'와 '새벽기도', '순교'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저 개인에게 주신 큰 축복도 마찬가지"라며 "저는 신의주 제2교회와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서문밖 교회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따라 이를 몸에 지니고 살게 됐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이신데도, 친히 힘쓰고 애쓰시면서 '기도에 전력하는 삶'을 사셨다. 특히 새벽에, 밤에 기도하셨다(막 1:35, 눅 5:16)"며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기도하신 것은 그가 제일 좋은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심이고,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것은 하나님과만 정미롭게 교통하시기 위하여 그리하신 것(「공관복음」 162-163쪽)'"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는 성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새벽 미명에, 그리고 밤에 힘쓰고 애쓰시면서 '기도에 전력하는 삶'을 사신 것을 생각하면, 새벽기도와 밤 기도에 게으른 우리들은 너무너무 부끄러워서 머리를 들 수 없다"며 '새벽기도'에 전력한 한국교회 신앙의 선배들을 돌아봤다.

'한국교회 아버지' 길선주 목사, 새벽기도도 시작해
죄 회개와 부흥 사모의 기도, 평양대부흥 이끌기도
'한국교회 대표 순교' 주기철 목사도 새벽기도 강조
신년과 고난주간 '특별' 새벽기도회와 산 기도 전력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어릴 때부터 새벽기도
안락이나 풍요, 병 고침과 상관 없이 생명 불어넣어

첫째로,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이다. 그는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길선주 목사님으로부터 시작됐다. 그가 1906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조사로 일하고 있을 때 어느 장로와 새벽기도를 시작했고, 한 달 동안 기도하면서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며 "교회는 곧 매일 아침 규칙적으로 새벽기도회를 갖기로 했다. 새벽 4시에 종이 울렸고, 신자들이 새벽 4시 30분에 모여 죄를 회개하며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고 설명했다.

김명혁 목사는 "길선주 목사님으로부터 시작된 한국교회의 새벽기도는 죄를 회개하며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죄 회개와 부흥 사모의 기도'였다"며 "그 절정으로 나타난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의 특징이 바로 눈물과 회개의 기도였다"고 강조했다.

둘째로, '한국교회 대표 순교자' 주기철 목사이다. 그는 "길선주·김익두 목사님의 기도의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주기철 목사님은 새벽기도에서 은혜를 받아 회개하면서 중생을 체험했고, 새벽기도를 계속하면서 교회를 부흥 발전시켰고, 새벽기도를 계속하면서 일사각오의 신앙을 굳게 지켰다"며 "그는 교인들에게 '새벽기도회는 은혜가 가장 많은 시간이므로 모두 나와 기도하라'고 권면했고, 단 한 번도 새벽기도회를 빠진 일 없이 기도회를 인도하고 기도했다"고 설명했다.

김명혁 목사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김명혁 목사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김 목사는 "주기철 목사님은 '특별' 새벽기도회를 자주 하셨다. 신년과 고난주간에 '특별' 새벽기도회를 주관했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도 새벽기도와 산 기도에 전력했다"며 "새벽기도와 산 기도는 주 목사님 목회의 바탕이었다. 그의 기도는 철저하게 성경 중심적, 하나님 중심적,천국 중심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셋째로,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였다. 그는 "손양원 목사님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의 손을 붙잡고 새벽기도를 시작했고, 평생 새벽기도를 계속했다"며 "그리고 주일 성수를 생명처럼 귀하게 여겼다"고 말했다.

김명혁 목사는 "소년 손양원은 동방요배는 물론 주일성수를 위해 주일날 등교를 거부해 벌을 받곤 했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면서도 산 기도와 노방전도에 열심이었다"며 "1939년 7월부터 1950년 9월 순교하기까지, 5년 동안의 감옥 생활을 제외하면 애양원에서 나환자들을 헌신적인 사랑으로 돌보았는데, 그 돌봄 사역은 기도로 이어진 사역이었다"고 전했다.

또 "절망하고 반항하는 나환자들을 기도의 무릎으로 섬겼고, 절망하고 반항하는 나환자들에게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타이르곤 했다"며 "손 목사님은 옥중에서 부모와 아내와 자녀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낼 때마다, '주일을 성수하며 정성껏 기도하라'는 부탁을 하셨다"고 했다.

그는 "손양원 목사님의 삶과 죽음은 한국교회와 나라를 위한 기도와 사랑과 순교의 제물 된 삶과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철저하게 예수님 중심, 십자가 중심, 천국 중심이었다"며 "그의 기도는 현세의 안락이나 풍요, 병 고침과 상관이 없었다"며 "그런데 그 분은 한국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었고, 한국을 굳게 세운 버팀목이 되었다"고 역설했다.

김명혁 목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인 동시에 절대 명령"이라며 "하나님께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셔서, 우리가 새벽기도와 밤 기도의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시기를, 그래서 교회의 갱신과 부흥과 성장을 허락하시기를 바라고 소원한다"고 덧붙였다.

성도들 자발적 실천으로 시작된 새벽기도,
한국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으로
새벽기도, 부흥회 또는 사경회와 관계 밀접
부흥운동, 성서 연구와 기도에 의한 결과물
중생한 교인들, 견딜 수 없어 주님 앞으로
새벽기도 샤머니즘적? 목회자들 책임 크다

이은선 교수는 "한국교회의 가장 독특한 신앙생활 가운데 하나가 새벽기도회이다.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성도들의 자발적 실천으로 시작돼, 한국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체 교회가 새벽기도를 실시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총평했다.

이 교수는 "물론 오늘날에는 과거보다 새벽기도회가 점차 퇴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는 이 새벽교회 신앙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며 신구약 성경과 교회사 속 새벽기도를 살피고, 특히 한국교회 차원의 새벽기도 역사와 현황 등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복음이 수용된 초기부터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해, 1930년대에 이르면 전 교회적으로 시행하고 있다"며 "이말테 선교사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새벽기도는 백홍준이 1880년대에 개인적으로 매일 했다는 기록이 있고, 1892년 동계 신학반 학생들이 새벽기도를 했으며, 장대현교회 마펫과 한석진이 1883-1896년 사이 매일 아침 일찍 같이 기도했다"고 말했다.

이은선 교수는 "옥성득 교수에 따르면 강진교회 사경회 가운데 새벽기도회가 시작됐다. 1898년 2월, 강진교회 겨울 사경회 강사였던 리(Lee) 목사와 휘트모어(Whittemore) 목사의 보고서에 새벽기도회 기록이 나온다"며 "이것이 사경회에서 있었던 최초의 새벽기도회였다. 한국인들이 개척한 교회에서 한국인들 주도로 새벽기도회가 시작됐고, 이후 여러 사경회에서 간헐적으로 새벽기도회가 열렸다"고 했다.

또 "학생들도 나라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새벽기도회를 만들어 진행했다. 이는 1904년 9월 이화학당 부흥회 선교 보고에 나온다"며 "이화학당 새벽기도회는 학생들이 나라와 민족의 위기 가운데, 신앙적인 성장을 도모하며 선교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새벽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이은선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이은선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새벽기도 운동이 활성화된 것은 잘 알려졌듯 1893년 설립된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1905년 가을부터 길선주 장로가 했던 새벽기도이다. 그는 "길 장로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을 걱정하며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기 시작했고, 같은 교회 장로인 박치록이 동참했다"며 "날이 갈수록 여러 교인들이 호응해 기도하기 시작, 얼마 후에는 300-500명이 모였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분명한 것은 새벽기도가 부흥회 또는 사경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부흥운동이 성서 연구와 기도에 대한 교인들의 밑바탕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라며 "새벽기도 운동은 성령 체험을 하고 중생한 교인들이 기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주님 앞에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가슴 찢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하나님께 자신과 가족과 교회와 국가와 목회자들, 그리고 이웃을 위해 한없는 눈물로 뜨겁게 기도했던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새벽기도회가 한국교회 정규 집회 형태로 자리잡은 것은 초기 부흥운동 기간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 전체가 시행하지는 않았고, 개인이나 일부 교회가 필요한 경우 기간을 정해놓고 했다"며 "그러다 1930년대 들면서 매일 새벽기도회가 시행됐다. 성결교회는 1939년 교단에서 매일 새벽기도회를 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특새'를 하다 매일 새벽기도회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은선 교수는 "6.25 전쟁 전후의 새벽기도는 국가 존망의 위기 속에서 진행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가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전쟁 이후 전국 교회에서 새벽기도회가 시행됐다"며 "1960년대 중반부터는 민족 복음화를 기도 제목으로 삼았고, 이를 토대로 1970년대 민족복음화대성회가 여의도 광장을 중심으로 전개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최근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한국교회 신앙의 열정이 식어지면서, 점차 새벽기도도 약화되고 있다. 심지어 '개혁신앙'을 내세우며 새벽기도회를 비판하는 움직임도 있다"며 "한국교회 성장에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던 새벽기도회의 전통을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혹자는 새벽기도회가 '새벽 예불이나 샤머니즘에서 나왔기에 문제'이며, 그래서 '기복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며 "그렇지만 새벽기도회가 이러한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 복음이 전해진지 100년이 넘었는데도 새벽예배가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기복적 요소가 남아있다면, 목회자들이 잘못 가르친 것이고 한국교회가 기도를 잘못 해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앞으로 한국교회는 새벽기도회에 있어, 그날 설교를 통해 들은 말씀을 중심으로 공적 기도를 적극 진행하면서, 각자 개인적 문제들을 성경 말씀에 근거해 해결받기 위한 사적 기도를 병행해야 할 것"이라며 "성경은 말씀과 기도가 교회가 성장하는 가장 근본 원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말씀에 근거한 새벽기도회를 통해 성장한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오히려 새벽기도를 하기 좋은 환경이 됐다. 새벽기도의 핵심은, 하루를 시작하면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토대로 하루의 삶을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기도의 훈련의 장이 되는 것"이라며 "새벽은 하나님과 성도들이 교제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고, 그 교제가 말씀에 근거해 이뤄진다면 가장 바람직하다(요 15:7)"고 제언했다.

더불어 "한국교회가 해결이 절실한 시대적 문제들을 기도제목들로 정해, 교단 또는 한국교회 전체가 기도한다면, 더 놀라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가 사회가 직면한 저출산, 세대와 사회 계층간의 갈등, 남북한 통일, 한일 갈등, 세계적 선교 사명 등을 위해 새벽마다 적극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