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존엄 사이
(Photo : 기독일보) 폭력과 존엄 사이

'폭력과 존엄사이'는 은유 작가가 7명의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를 만나 그들의 삶을 기록한 인터뷰집이다. 한 사람의 인생과 그 가족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간첩 조작은 의외로 간단했다. 영장도 없이 국가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고문을 버티면 ‘가족을 데려다 똑같이 고문하겠다’고 협박한다. 그렇게 공장에서 찍어내 듯 간첩이 만들어졌다. “모든 폭력이 발생하는 원리가 그렇듯이 가해자는 ‘그래도 되니까’ 조작한 것이고, 피해자는 ‘그래도 되는 사람들’이니까 조작 대상이 됐다.”

김순자는 11년전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하러 친정에 머물렀던 게 문제가 되어 ‘삼척고정간첩단’이 되었다. 그곳에 북한 공작원으로 남파된 외당숙이 은거하고 있었는 이유였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그가 먹고 살기 위해 한 보험 영업은 간첩활동이 되었고, 영업 실적 1등으로 회사에서 보내준다는 일본 여행은 그가 조총련(북한 중심의 재일 조선인 단체)을 만나기 위한 공작이 되었다. 수사관들이 조총련과의 접촉을 묻자 그는 “조총련이가 여자예요? 남자예요?”라고 물었다.

1930년생 박순애는 문학을 사랑한 법대생이었다. 6.25만 아니었으면 그는 변호사가 되었을 거라고 말한다. 전쟁으로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재일교포인 남편을 따라 일본에 갔다가 불법체류자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무 이유도 모른 채 간첩이 되어 12년을 복역했다.

이성희는 해방 전 한국에서 수의사가 되었고 동경대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울릉도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17년을 복역했다. 그는 울릉도에는 가본 적도 없었다. 유학생 시절, 관광시켜준다는 말에 3박 4일 북한을 방문했다는 이유였다. 1심 판사는 사형을 선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15년을 선고해도 된다. 근데 만약에 15년을 주면은 내가 옷을 벗어야 한다. 판사를 못하게 된다.”

어부였던 김흥수는 59년과 63년 두차례 강제 납북되었다는 이유로 14년 후인 1977년에 체포되어 간첩이 되었다. 그를 고문한 사람은 ‘인간백정’ 이근안이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독재정권 시절 4건의 ‘간첩 검거 유공’을 포함, 16차례의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는 이근안에 의해 조작된 간첩 혐의로 12년을 복역했다.

애틀랜타성결교회 김종민 목사
(Photo : 기독일보) 애틀랜타성결교회 김종민 목사

제주에 살았던 김평강은 4.3사건의 피해자였다. ‘젊은 사람은 있으면 그냥 다 죽이니까’ 살기위해 김평강을 비롯한 제주 사람들은 노 젓는 배나 통통배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갔다. 그리고 돌아와서 재일교포 간첩으로 조작되었다. 그를 잘 아는 교포들이 한국 재판정까지 찾아와서 무죄를 증언했다. 당시 구형을 맡았던 검사는 눈동자의 흔들림도 없이 판사에게 “모든 것이 애매합니다만 사형에 처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7년 12일을 복역했다.

그림을 잘 그렸던 고졸 노동자 고(故) 심진구는 ‘왜 노동자는 일해도 가난한가’를 고민했다. 그 꾸준한 물음과 사유를 정리해 ‘선진 노동자의 임무’라는 글을 썼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그를 고문했던 사람은 안기부 대공수사단장 정형근과 이름을 감추고 여우, 불독, 독사, 곰이라고 불리우던 네 명의 고문 기술자들이었다. 그는 20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그들의 얼굴을 캐리커처로 그려 고발했지만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가난했던 김용태는 열네 살 때 매형을 따라 오징어 잡이 배를 탔다가 북한 경비정에 의해 피랍되었다. 돌아온 후, 납북 13년 만에 돌연 간첩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고문을 24일까지 버텨냈다. 고춧가루 고문, 물고문, 전기고문, 손톱 밑에 큰 바늘을 찔러 넣는 고문. 재판 과정에서 그의 무죄가 계속 드러나자 검찰은 법정이 아닌 판사 집무실로 그를 끌고 가서 비밀 재판을 열어 13년을 선고했다. 그가 끌려갔을 때 네 살이었던 아들은 아버지가 간첩이라는 이유로 경찰 시험에서 떨어지고 한강에서 투신자살했다. 아들 나이 열 아홉 살이었다.

이 책의 말미에는 1948년부터 2014년까지 과거 간첩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두 페이지가 넘게 빼곡하게 적혀 있다. 몇 명인가 세어보려 했으나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책에 나온 일곱 사람들과 같은 억울한 사연들이 있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은 국가 폭력에 의해 무너졌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고 붙잡고 살아왔다. 그 삶의 존엄한 무게가 읽는 이에게 긴 침묵을 가져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