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시는 1965년 '목포 시민의 상'을 제정하고 첫 수상자를 정하기 위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압도적 지지를 받은 한 명. 바로 일본인 윤학자(尹鶴子, 1912~1968) 여사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던 시절, 조선총독부 관리가 된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온 그녀는 목포에서 음악교사로 일하다, 훗날 남편이 될 윤치호 전도사를 만난다. 윤 전도사는 1928년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목포에 공생(共生)원을 세웠다.

부부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같은 기독교 신앙을 따라 갈 곳 없는 많은 아이들을 품었다. 특히 윤학자 여사는 6.25전쟁 당시 남편의 행방불명에도 불구하고 홀로 남아 공생원을 지켰다. 우리 정부는 그녀의 공로를 인정해 1963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일본인으로 한국인과 결혼했으며, 기독교인이었고, 다른 나라의 아이들을 마치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했던 그녀. 이런 헌신적 모습에, 1968년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무려 3만여 명의 목포시민들이 장례식에 참석해 그 죽음을 애도했다고 한다.

본지는 윤학자 여사의 아들인 윤기(尹基, 77, 일본명 타우치 모토이田内基) 윤학자공생재단 회장과 인터뷰했다. 현재 일본인으로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으며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와의 인터뷰는 이메일로 진행됐다. 아래는 그와의 일문일답.

병든 아이 업고 가 '살려 달라' 애원하던 어머니
전쟁 중 행방불명 아버지 기다리며 공생원 지켜

-먼저 본인 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한국의 공생복지재단과 윤학자공생재단의 심부름꾼이고 일본 '마음의 가족'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사회복지 시설을 필요한 지역에 만들어 운영하고 있으며 '유엔 세계 고아의 날' 제정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재일한국인 고령자들의 보금자리인 '고향의 집'을 만드는 일에도 헌신하고 있습니다. '고향의 집은' 현재 도쿄, 교토, 사카이, 고베에 있습니다. 올해 11월 6일이면 '고향의 집' 개설 30주년이 됩니다. 그 동안 이곳에서 돌아가신 분들 가운데 22명은 가족이 없습니다. 이에 '고향의 집' 뒷뜰에 '평화와 기도의 정원'을 만들어 그 망향의 마음을 달래주고자 합니다."

-어릴 적 보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어땠나요?

"저는 목포에서 태어나 바다와 섬을 보며 자랐습니다. 제가 어릴적 어머니는 몸이 약하신 편이었어요. 그럼에도 집 없고, 부모 잃은 아이들을 열심히 돌보셨습니다. 아이들 먹일 것이 없으면 죽이라도 먹이기 위해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셨습니다. 병든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던 어머니의 모습도 기억납니다. 무엇보다 늘 진심어린 기도를 하셨습니다.

6.25전쟁 당시 어머니는 영양실조로 죽어 간 아이를 위해 슬퍼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수 소독한 옷을 입히시고는 그 곁에서 하룻밤을 주무셨어요. '세상에 태어나 부모의 사랑도 못 받아 불쌍하다'며 '하룻밤이라도 곁에 있어주고 싶다'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500여 명이나 되어서 그들을 일일이 다 사랑해 주지 못한 것에 어머니는 항상 미안해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왜 해방 후에도 한국에 남아 고아들을 돌보셨나요?

"해방 후, 어머니는 할머니를 일본에 모셔다 드린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아버지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셨고, 공생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을 당신의 일평생 사명으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가 행방불명 된 이후에는 주위 사람들이 '남편도 없고 전쟁통에 혼자 살기도 어려우니 공생원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들어가라'고 했지요.

그러나 떠나지 못하셨던 것은 아버지가 언젠가는 돌아올거라 믿으셨던 까닭입니다. 혹여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자신이 없으면 '얼마나 실망하실까' 하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어미니는 많은 이들에게서 칭송을 받으셨지만,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은 따로 있었습니다. '여보, 나 없는 동안 수고했소.' 바로 아버지의 이 한 마디였습니다."

외할머니의 믿음이 두 분 결혼 가능케 해
사랑 주기만 했던 어머니, 이제 사랑 받아

-어머니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 기억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니셨고,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봉사하셨습니다. 음악 선생님이 되고부터는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는 등, 교회에서의 생활을 매우 행복해 하셨던 것 같습니다. 빛 바랜 앨범 속 어머니 사진들은 모두 교회에서 찍은 것 뿐입니다.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 여사 부부 ⓒ공생복지재단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 여사 부부 ⓒ공생복지재단

어머니의 신앙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던 제 외할머니의 영향이 있었습니다. 외할머니께서는 한국인과의 결혼에 대한 주변의 심한 반대로 고민하는 딸에게 '결혼이란 국가와 국가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인간이 하는 거다. 천국에는 일본 사람도 한국 사람도 구분이 없다. 모두가 형제 자매다'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러한 외할머니의 신실한 믿음이 두 사람의 결혼을 가능케 했고, 어머니를 한국으로 시집보내며 '믿지 않는 일본 사람보다 믿는 한국 사람이 더 좋다'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다시 못 만나더라도 천당에서 만나자'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외할머니는 말년에 홀로 천송원이란 양로원에 계셨는데, 외출했다가 길을 잃어버리면 항상 교회로 돌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가신 분이셨습니다."

-어미니는 공생원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셨나요?

"어린 시절 철 없는 마음에 어머니를 원망하면서 자랐습니다. '난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났는데 왜 공생원의 아이들과 함께 키우며 내게 특별한 애정을 주지 않느냐. 어머니 눈에는 자기 자식이 보이지 않느냐'고 말이죠. 어머니는 공생원의 모든 아이들을 자기가 낳은 자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공생원 아이들에게 '사회에 나가 자립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준다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보상 같은 것은 바라지 않으셨어요.

그렇게 사랑을 주기만 하셨던 어머니가, 이제는 한일 두 나라의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아들인 저로서는 그저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주님의 축복에 감사합니다."

공생원 아이들 "일본인이어도 우리들의 어머니"
40년 간 이웃 위해 사신 부모님, 그 유업 이어...

-해방 후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또 6.25전쟁 당시 고초를 당할 뻔 했지만 공생원 아이들과 목포 마을 주민들이 어머니를 보호해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고생을 하기 위해서 태어나신 것 같습니다. 해방 후 일본인 어머니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라며 고역을 치르셨습니다. 그러나 공생원 아이들이 '일본 사람이어도 우리들의 어머니'라며 눈물을 흘렸고, 마을 사람들은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울면서 '지금 살아 있는 이 목숨은 너희들이 살려준 것이다. 진실이란 국가와 민족이 달라도 통한다'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6.25전쟁 때, 아버지는 북한에서 내려온 인민군들에 의해 인민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아버지의 사형집행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인민군은 아버지를 인민위원장으로 임명합니다. 그 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이 물러가자 아버지는 인민위원장을 지낸 죄로 옥에 갇히셨습니다. 이후 피난 갔던 목사님들이 돌아와 '윤치호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기독교인이다. 그는 고아들을 두고 피난갈 수 없어 할 수 없이 인민위원장을 승락한 것'이라고 진정서를 넣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3개월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이후, 고아들의 식량을 구하러 광주로 떠났던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생일은 알아도 돌아가신 날을 모르고 있습니다."

-회장님은 얼마 동안 한국에 사셨나요?

"40년간 한국에서 살았습니다. 지금도 제 마음은 한국에 살고 있고, 일본은 단지 출장 중이라 생각합니다. 금년으로 설립 91년을 맞이하는 공생원은 1928년 아버지 윤치호 전도사가 설립해 홀로 10년, 1938년 어머니와 결혼한 후 둘이서 함께 13년, 1951년 행방불명 된 아버지를 기다리며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 홀로 17년, 이렇게 부모님은 총 40년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제가 1968년 그 유업을 이어 받았습니다. 어릴적 어머니를 원망했지만, 이젠 그 분의 삶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한일 관계, 共生의 정신 기억했으면
진정한 이해와 화해, 기독교의 사명

-요즘 한일 관계가 많이 어렵습니다.

"제 가슴은 찢어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서로 사랑하며 '같이 살자'는 '공생'(共生)의 정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어려운 때 아무 역할도 못하고 있어 그저 부끄럽기만 합니다. 기시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는 어머니에게 '한일간의 파도가 높아지면 현해탄 한 가운데서 파도를 잠재울 사람은 당신'이라 하였습니다. 일본의 정치인이 사회사업을 하는 어머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국가간의 큰 일도 결국 인간애, 즉 사랑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고생원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빛 바랜 사진 앞에서 사진을 찍은 윤기 회장. 사진 속 가장 키가 큰 이가 바로 그의 아버지 윤치호 전도사다. ⓒ김진영 기자
아버지와 고생원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빛 바랜 사진 앞에서 사진을 찍은 윤기 회장. 사진 속 가장 키가 큰 이가 바로 그의 아버지 윤치호 전도사다. ⓒ김진영 기자

-최근 한일 관계와 관련해 특별히 교회와 기독교인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진정한 이해와 화해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양국 기독교인들의 사명이고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화해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겁니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용서하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진심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서로 마음의 문을 여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앞장 서서 하나가 되어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두 나라 관계의 위기를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사랑의 기도는 세계를 움직인다.' 일본의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냉전을 종식시킨 고르바쵸프와 부시 대통령 사이의 연결 고리도 로버트 슐러 목사였습니다."

-끝으로 못다한 말씀이 있으시다면?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 내외분이 오사카에 오셨을 때, 환영회를 겸한 동포 간담회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했습니다. 이것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하려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 내외분! 저는 한국계 일본인 윤기입니다. 91년 전 기독교 전도사였던 (아버지) 윤치호는 공생원을 설립했습니다. 고아를 돌보는 윤치호를 시민들은 거지대장이라 불렀습니다. 미소를 잃어버린 고아들에게 음악선생이 필요했을 때, 윤치호에게 일본인 음악선생 타우치 치즈코(윤학자)가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6.25 때 윤치호는 행방불명 되어 일본인 윤학자는 온갖 고난을 넘어 3천명의 고아를 키웠습니다. 그 어머니가 너무 지쳐 56세로 그만 쓰러져 병상에서 제게 한 말은 '우메보시(매실로 만든 일본의 전통 요리-편집자 주)가 먹고 싶다'는 일본말이었습니다. 돌아가시자 목포시민들은 불쌍히 여겨 최초의 시민장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언론은 '그날 목포는 울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중략)...

부모님이 세우신 유달산 기슭 공생원에는 오부치 총리가 심은 매화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이희호 여사님은 '고향의 집' 교토에 무궁화 꽃을 심어주고 한국에서 복지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끊임없이 견학을 오고 있습니다. '고향의 집'은 단순한 복지시설이 아니라 한일간 올바른 역사를 이해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잊어서도 안됩니다. 일세 교포들의 피와 땀과 눈물 위에 우리들이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님! 그 어떤 경우에도 '다 같이 살아가자' '더불어 살아가자' 외에, 인류 평화를 유지할 철학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공생주의자 거지대장' 윤치호의 꿈을, 문 대통령님의 활약으로 지구촌에 두둥실 뜨도록 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