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민수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심민수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예측된 미래 모습은 가히 놀라움을 넘어 경악스러움을 안겨 준다. 인간의 땀은 사라지고 인간의 콧노래만 남을 것 같은 환상을 자아낸다. 아니 그 콧노래도 기계음이 대신해 줄 것이다. 모든 삶의 국면에 급격한 변화를 만들어 낼 조짐이 눈앞에 선하다. 강박적 성취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저돌적인 경주가 시작된 것이다. 새로운 것이 아니면 모두 다 폐기처분 당할 처지에 놓이지 않을지! 변화에 대한 집착은 이제 전통적인 것, 고유한 것마저 변화를 거부하는 장애물로 외면당할 것 같은 의구심을 자아낸다. 승자독식의 논리가 당연시되는 지금, 도래하고 있는 4차 산업 혁명시대에 선두 자리를 놓칠 경우,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란 전망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분주하고 불안하다. 온갖 포럼과 온라인 매체를 누비는 첨단과학기술의 전령사들이 지상 낙원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처럼 환상을 불어넣고 있다. 이런 사고를 바탕으로 환각적 미래를 그려내는 공상과학영화들은 날개를 달고 다양한 영상 매체들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렇듯 상상이 현실이 될 미래를 전망하면서 변화 상황의 이면을 심도 깊게 진단할 필요를 느낀다.

역사상, 사람들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주어 온 많은 이데올로기들이 존재해 왔고 현재에도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이데올로기들이 존재한다(어떤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났다고 하지만 새롭게 변형된 형태의 이데올로기들이 여전히 상존한다). 먼저 과학만능주의가 그것이다. 오늘날 과학만능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신봉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펼쳐지는 만물 속의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잘 활용하는 과학은 인류에게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만능주의 단계로 들어서면 과학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성을 지니게 된다. 과학에 의한, 과학을 위한, 과학중심의 이념적 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좌지우지하고 인간의 삶이 종속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과학은 인간의 삶에 편리함을 넘어 지상낙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준다. 이로써 과학은 인간에게 구원을 주는 절대적 존재로 둔갑한다. 이 정도까지 가면 과학만능주의는 유사종교 상태가 되는 것이다. 과학의 이기가 인류에게 주는 혜택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궁극적 행복을 약속하며 절대적 의존 상태로 몰고 가는 것, 바로 유사종교 상태의 맹신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종교를 아편으로 몰며 스스로 절대화된 이데올로기성을 드러냈을 때 공산주의는 이미 또 다른 형태의 유사종교가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과학만능주의의 만연 현상을 가속화시키는 것이 인간편리주의이고 물질만능주의이다. 현대의 삶에서 인간의 이기적 본능은 편리함을 제공한 과학에 의존하게 되어 있다. 편리함은 인간에게 잠시의 행복감을 제공한다. 이미 인공지능이 운전 작업을 대신하고 의료수술까지도 의사의 손을 대체하고 있어 멀지 않아 많은 영역에서 보편적인 현상이 될 전망이다. 최상의 편리함을 제공해줄 과학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의 사고 패턴과 판단 기준을 변화시키고 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조금의 불편함도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경향을 갖게 될 것이고 이것은 인류가 만들어온 삶의 양식과 사고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편리함은 미덕이며, 불편함은 악덕이라는 도식의 구도가 인간의 사고 패턴에 매우 광범위하게 자리하게 될 것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해 온 땀 흘림과 수고함과 인내함과 몸으로 섬김은 더 이상 인간의 덕성으로 평가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런 현상은 벌써 젊은 세대들 속에 퍼져 나가고 있다. 쉽게 많이 벌어 쾌락을 추구하며 어떤 불편함도 감수하지 않으려는 생각들이 만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사고구조는 결국 불편함이 없는 세상을 구현하겠다는 단순논리의 이상론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더 편리하고 더 신속하고 더 강력한 에너지를 지닌 사회를 만들겠다는 극단적 단순논리가 지배하는 생각부재의 사회로 치닫게 될 수 있다. 마치 어느 공상 영화에서 미래엔 음식을 만드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고 소화시키느라 에너지를 허비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알약 하나로 식사를 대체해 버린 코미디 영화 한 편을 보는 격이다. 대단히 영리한 자들의 대단한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치아를 사용하지 않으면 치아 근육이 약해져 빠지게 되어 있고 소화기관을 사용하지 않으면 소화기관이 점차 퇴행하게 된다. 인간은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인내하는 것이 자신의 정신과 정서상 큰 유익이다. 그 모든 것을 대신할 세상을 구현하겠다는 시도는 하나를 만족하기 위해 더 중요한 것들을 내다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견된다.

물질 만능주의는 이미 철학자들에게 있어서도 많은 논의가 전개되어온 문제이다. 물질주의는 진화론적 사고, '정신보다 물질이 우선 된다'라는 주장, 물질에 의해 인간은 행불행이 정해지게 된다는 생각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빅데이터를 인간의 두뇌보다 월등하게 잘 다룰 수 있는 슈퍼컴퓨터, 인간의 부조리와 불합리 현상을 완전히 제거할 인공지능 등에 의한 획기적 사회 진보는 인류가 그동안 역사를 통해 축적해온 인간 정신의 근본과는 동떨어진 현상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 DNA에 집적되어 있는 모든 유전자 조작까지도 문제로 보지 않는 유물론적, 기계중심적 사고의 확산을 더욱 가속화 할 것이다. 물질 만능주의의 치명적인 문제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그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며 물질적 진보에 의해 그 정신은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인간에겐 물질적 풍요, 편리함의 극치, 과학적 진보 등을 통해 인간 구원, 세상 낙원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환상을 비전으로 제시한다. 최근 역사에 만연되어 왔던 여러 이데올로기들이 유사종교로 치닫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현상이 여기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밀려오고 있는 4차 산업 혁명시대엔 어떤 문제들이 발생할까? 어느 시대에나 급격한 변화의 결과들을 기민하게 감지하고 이를 앞서 선점하여 소수의 특권층으로 부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민초들은 뒤늦게 좇아가느라 숨 막히는 경쟁구도 속에 내몰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회적 이슈들 특히, 직업을 잃은 실업자의 급격한 증가,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 갈등, 새로운 구도 변화에 따른 부적응 등, 각종 사회적인 문제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혼란의 가증 속에서 상상이 현실이 될 미래에 교계는 어떤 모습으로 반응하게 될까?

(1) 디지털 세속 모드이다. 트렌드를 재빠르게 읽고 파도타기를 즐기는 재주꾼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첨단 디지털 혁신 시대에 굳이 시대와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만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를 거부하는 태도는 전구가 발명되어 가정마다 보급되던 시절에, 그런 인위적인 것은 자신들의 전통과는 다르다고 하여 초롱불을 켜고 살던 문명거부자들과 진배없는 모습일 수 있다. 자연스럽게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적응과정에서 남들보다 먼저 트렌드 따라잡기에 모든 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주객이 전도되고 교회와 목회의 본질이 훼손되는 양상이 벌어지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또 다른 양상은 신비주의적, 종말주의적 모드이다. 불안하고 갈등이 많은 혼란한 시기에는 사회부적응자들의 현실도피적 성향을 악용하는 종말주의자들, 신비주의자들이 날뛰곤 한다. 기독교 안에 종말적 신앙요소, 신비적 신앙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적 불안심리, 위기의식을 이용하여 왜곡된 종말관과 현실을 거부하는 신비주의가 날뛸 때 사람들의 내면은 매우 불건전해진다. (3) 정치권력화 모드도 한몫을 차지하게 될 전망이다. 급변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갖 사회적 이슈들을 자신들의 정치세력 구축화에 이용하려는 권력 지향적인 사람들이 교계에도 있게 마련이다. 사회적 이슈에 교계가 무책임해서는 안 될 것이나 사회적 이슈만을 좇다 보면 신앙공동체의 본질로부터 이탈할 위험성이 항상 상존해왔다는 점을 역사는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위험천만한 시대에 교회가 참으로 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혼란과 불안이 가중되는 시대에 정작 하나님의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미래를 맞이해야 할까? 첫째로 하나님 나라의 교회로서 뚜렷한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 미래의 세상은 '개인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더욱 극단적 개인주의와 절대적 상대주의로 치달으면서 '죄성을 지닌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지워버리려 할 것이다. 첨단이니 진화니 하는 명패를 내걸고 창조 질서를 훼손하는 온갖 조작 행위들로 말미암아 인류가 역사 속에서 만들어 왔던 보편적인 윤리마저 헌신짝처럼 내어 버리게 될 것이다. 벌써부터 이런 조짐이 공상과학 영상물들과 미래 소설 및 미래 예측서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퍼져나가면서 이제는 당연하다는 식의 사고가 만연되고 있다. 이런 시기에 교회는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을 더욱 명확히 하여야 한다. 이 시대는 그 어느 시기보다도 세상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우리만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기준과 규범과 실천이 일관성 있게 드러나야 한다. 고리타분한 과거 전통 고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 성경에 기초한 가치추구, 신앙적 신념 체계의 확립 등, 한마디로 우리의 정체성이 뚜렷하게 나타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아무리 지성과 과학을 운운하여도 윤리적으로는 자신의 몸 하나도 관리하기 어려운 미숙한 존재에 불과하다. 미숙한 세상을 성숙한 교회가 지탱해야 할 때이다. 성숙한 교회의 모습은 바로 정체성의 확보를 통해 가능하게 된다.

둘째로 미래 사회의 상대주의적 윤리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지속적인 연구 및 통합적 교육 실천이 교계 전반에 걸쳐 이루어져야 한다. 미래 사회의 윤리적 행태가 기독교적 관점과 가치에 비추어 어떤 차이와 문제점을 지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지속적인 연구와 교육 실천이 절실하다. 기독교적 원칙에 따른 구체적인 윤리 기준의 확립 및 그 공론화가 절실하게 요청된다는 말이다. 세상이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때 사람들은 저마다 삶의 변화에 적응하느라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혼란이 가중되면 될수록 더욱 필요한 것이 삶의 실천에 대한 분명한 기준과 지침이다. 생명윤리 문제, 인간의 본질 탐구에 대한 문제, 진정한 행복의 문제, 물질과 정신의 관계 문제 등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밝혀야 할 사안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물론 이런 주제는 이전에도 개별적인 차원에서 일부 연구 모임에서 다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제는 세속적 삶의 변화가 인간의 정신사적 근간을 흔들어 놓을 만큼 급격하다. 이런 전반적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 이제는 교계 전체의 통합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시대의 문제에 대한 성경적 기준점을 마련하는 일들이 교계의 학자, 전문가 그룹에서 이루어지도록 교계 전체가 다방면의 연구 지원과 실천 강령의 제정에 발 벗고 나서야 할 것이다. 이 작업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교회의 제사장적 역할을 감당하는 일이기도 하다.

셋째로 미래 사회의 거짓된 신화에 대항하는 교회의 선지자적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문명 변화의 근간을 이해할 수 있는 기독교 철학 분야와 과학기술 분야의 통합적 전문가들이 출현해야 한다. 교회 내에는 사회 각 분야에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이 세상 변화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세속 문화, 사회 변화 이면에 있는 이데올로기적 코드를 파헤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 하는 과학 기술 문명 이면의 거짓된 신화에 대한 기독교 철학적 분석이 가능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 때 창조과학운동이 일어나면서 진화론에 매몰되었던 학문과 교육 측면에 기독교적 변증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4차 산업혁명 시대(북미권에서는 디지털 혁신시대로 지칭함)가 가져올 삶의 이면에 숨어있는 반기독교적 가치와 방향을 분석하고 진단할 수 있는 통합적 전문가들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고도의 디지털 혁신의 전문적 과학 기술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기독교 철학의 소양을 지닌 전문인들이 기독교계에 양성되고 확보될 필요가 있다. 최근 미국의 소설 창작용 AI 프로그램 제작 업체가 개발 도중에 개발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파를 탄 적이 있다. 개발 포기의 사유가 인상적이다. AI가 거짓 내용을 사실적인 내용인 것처럼 만들어 가더라는 것이다. 개발 프로젝트를 중지하고 더 이상의 개발을 포기하였다 하니 이 개발자들은 매우 현명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 교계는 이단 조사기관들을 통해 교리적 이단을 찾는 데 집중해 왔다. 지금부터는 거기에 머물 것이 아니라 교계가 모두 나서 우리의 삶을 오도하는 현실 세계의 혼합주의적 문화의 위험성까지도 밝혀내어 '아니오'를 선언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와 가치에 대한 상대주의적 사조의 영향 가운데서 펼쳐지고 있는 모든 조작 기술, 의료적 IT 기술 등에 깔려 있는 온갖 물질만능, 과학만능의 이데올로기성을 파헤쳐 그 문제의 근원을 경고해야 한다.

넷째, 도도한 세속문화적 흐름과 사상적 조류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영적 권위가 회복되어야 한다.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치려면 사회에서 교회가 지탄받는 대상이 아니라 존경받는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이다. 최근의 교계 모습을 보면 "존경의 대상"과는 매우 거리감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사방에서 교회의 낯 뜨거운 행태들이 폭로되고 있다. 이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선별할 때다. 최근에 한국 내 소규모 일부 교단들이 속한 한국 기독교계의 한 단체의 대표가 마치 기독교계 전체를 대표하는 양, 기자회견을 열어 불필요한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이 구설수에 올랐다. 이를 지켜보다 결코 관망만 할 수 없었던 교계의 원로들이 공개적으로 언론 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시의적절한 행동이었다. 몇몇 학자들이 문제를 제기했거나 진보계열에 속한 몇 교회가 나서 반발하였다면 사회로부터 아무런 관심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기독교계에 평생 목회자와 학자로 섬기면서 자연스럽게 권위를 인정받아 왔던 원로들이 나서서 일반 사회인들조차 공감할 수 있는 논리와 표현 방식으로 기독교계 본류의 입장을 발의하자 사람들은 불필요한 오해를 덜 수 있었다. 참된 권위가 인정될 때 세상은 교회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이 흘러가도록 하는 데 있어서 교회의 권위 회복은 필수적이다.

급변하는 시대에는 언제나 변화에 적응 못한 수많은 낙오자들과 직업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넘쳐나게 된다. 이런 시기에 교회는 여리고 길의 선한 사마리아인일 수밖에 없다. 상처 난 가슴을 싸매어 주고 생명 없는 것에 의존하다가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들의 진정한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유토피아적 망상으로 인간의 본성까지 훼손시키는 거짓된 비전에 대항하여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안겨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가치는 정신이 고갈된 첨단 기술 문명에 대한 참된 대안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