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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나리 씨 "탈북과 인신매매, 북송과 수용소…고통의 연속이었다"

기독일보 강혜진 기자

입력 Aug 07, 2019 10:32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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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여성 나리씨. ⓒ오픈도어즈 제공

탈북민 여성 나리씨. ⓒ오픈도어즈 제공 (포토 : )

최근 오픈도어즈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탈북민 나리(가명) 씨의 간증을 소개했다. 아래 이를 정리했다.

나리 씨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자랐다. 이 당시 기아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한 이들의 수는 적게 잡아도 수백 만 명이 넘는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리 씨와 같이 중국으로 탈북한 이들이 많았다. 중국에는 먹을 것과 도움의 손길이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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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바로 아래 여동생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북한에서는 음식이 너무 비싸서 하루에 한끼 먹는 것도 어려웠고, 약 10일 동안 굶은 적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을 때, 중국에 있는 아버지의 친척들에게 도움을 얻고자 했다"면서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나리 씨와 여동생은 중국의 국경 지역인 남양으로 향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친척들과 연락이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중국으로 건너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밀입국을 도와줄 브로커를 찾은 후에도 과정은 쉽지 않았다. 브로커는 북한의 경비원들과 약속을 잡았고, 나리 씨와 여동생은 약속된 시간에 만나 국경을 넘었다.

나리 씨는 "비가 오는 날이었다. 밤 12시 경, 우리는 여성의 집에서 나와 강둑을 건넜고, 특정 장소에 도착했을 때, 경비원이 나왔다. 그는 이미 약속이 되어있던 인물이었다. 경비원이 여성에게 건너라는 신호를 했고, 그녀는 나와 여동생의 팔장을 끼고 강을 건넜다. 물은 매우 차가웠고 거의 허리까지 올라왔다. 우리는 국경을 건너면서 정말 많은 긴장과 두려움을 가졌다"고 말했다.

이어 "처음엔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우리를 도와준 여성을 통해 중국의 한 가정에 머물게 됐다. 그 가정의 딸은 한국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처럼 한국말을 잘 했고, 통역을 맡아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딸이 나리 씨 가족을 좋은 곳으로 데려가준다고 말했고, 나리 씨는 때를 기다렸다. 어느 순간, 그녀를 중국으로 데려다 준 여성은 사라졌다. 대신 중국 소녀가 그녀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한 것이다. 영문을 알 수 없었고,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택시 한 대가 왔고, 두 사람은 아침 일찍 떠나서 오후가 되어서야 어떤 남성들의 집에 도착했다.

"나보다 한 8살 더 되어보이는 남성이 오더니, 이곳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를 도와준 여성은 사라졌고, 우리는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다.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선택권이 없었다. 우린 팔린 것이었다."

나리 씨는 "그 여성이 돈을 얼마나 받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처음부터 우리를 도와줄 의도가 전혀 없었고, 돈을 벌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이 팔려버렸다"고 말했다.

이 때부터 불행이 시작됐다. 나리 씨와 여동생은 낯선 타지에서 인신매매의 희생자가 되어 낯선 중국인 남성과 결혼 생활을 해야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들은 국경 인근에 사는 중국인 남성들과 작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우린 분명히 결혼을 원하지 않았으나 선택권이 없었다. 우리를 지키던 남성들은 돈을 주고 우리를 사왔다고 말했다. 국경 인근이었기 때문에 논밭이 많았고, 정말 많은 일을 해야했다. 새벽 4시나 5시에 일어나 8시나 9시에 들어왔다. 또 우리는 그들과 잠을 자야했다. 저항하거나 도망칠 곳이 없었다. 나와 여동생은 10일 간격으로 임신을 했다. 우리가 강제로 결혼해야 했던 남성들은 친척이었다. 나의 시어머니와 여동생의 시아버지는 친척이었기 때문에 여동생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약 1km 정도 떨어져 지내면서 서로 오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여동생은 18살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자유로웠다. 그들은 나를 더 감시했다. 한 번은 집에 남편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동생의 집에 다녀왔는데, 남편이 집에 있었다. 남편에게 여동생의 집에 다녀왔다고 중국어로 말했지만, 남편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당시 임신한 상태였던 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말했다.

"어느 날 밤, 5명의 경비원이 집에 와서 나를 붙잡아갔다. 중국 보안원들이 정식으로 등록돼 있지 않은 탈북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서로 끌려갔고, 거기에는 7~8명의 여성들이 있었다. 한 여성은 보안원들이 강제로 아이를 낙태시킬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너무 두려웠고, 곧바로 나와 아기가 살아남기 매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할머니가 누군가에게 말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분명히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말했고,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울고 있었지만, 나 혼자 입술로 기도했다. 만약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나와 아기를 살려달라고. 2시간 정도 지나서 보안원이 내 이름을 불렀고, 홀로 독방에 갇히게 됐다. 한 시간 후, 다른 이들은 모두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후 북송됐다. 그러나 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강력한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계속 그녀를 때렸고, 집에서의 삶은 고통스러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난 자살을 결심했다. 아이가 조금씩 자라서 4살이 될 무렵, 난 약을 먹고 자살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이가 내게 달려와 엄마라고 불렀다. 북한 사람이기에 완벽한 엄마가 될 수 없었지만, 여전히 아이를 남겨두고 죽을 수는 없었다. 북한에서처럼 굶진 않았으나 이는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었다. 소나 돼지처럼 일했고,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또 2~3일에 한 번씩 매를 맞았다"고 털어놓았다.

이때 나리 씨의 가족들이 중국으로 건너왔다. 어머니는 그녀가 사는 곳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살게 되었고, 교회에 나기기 시작했다. 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리 씨를 교회에 데려갔다.

그녀는 "찬송과 설교를 들으며 정말 많이 울었다. 설교를 듣고 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셔서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정말 계속 교회에 다니고 싶었다. 주일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갔는데 가족들이 반대했다. 가족들은 '교회에 다니면 하나님이 너에게 밥을 주고 돈을 준다고 하느냐?'면서 나를 박해했다"고 말했다.

당시 나리 씨의 가족들은 그녀에게 시민권이나 영주권을 얻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 체류자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중국 당국은 교회에 탈북자들이 많이 모인다는 걸 알기 때문에, 보안원들이 갑자기 와서 신분증을 확인하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는 신분증이 없었기 때문에, 특히 한국인 교회에 나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경찰이 한 번 왔다 가면 사역자들이 이를 우리에게 알려주면서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교회에 갈 수 없을 때는 매우 슬펐다."

그러한 가운데 나리 씨의 가족들에게 비극이 닥쳤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들이 보안군에 잡혀서 북한의 수용소로 보내진 것이다. 가족들은 매우 끔찍한 환경 속에서 구타를 견뎌야했다.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나리 씨의 가족들은 결국 석방됐고, 그녀의 어머니는 다시 한 번 중국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얻은 병으로 결국 사망했다.

중국으로 넘어온 후, 나리 씨의 어머니는 딸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녀는 "중국에서는 항상 노심초사하며 지내야했다. 어머니는 내가 국적을 얻기를 기도하셨다. 한 조선족 여성을 만났는데 그녀가 한국행을 제안하면서 한국에 살고 있는 자신의 며느리를 소개시켜주었다. 마침 그 며느리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어머니와 함께 만났다. 그녀는 우리가 한국으로 올 수 있다면, 신분증을 정당하게 발급받을 수 있다고 말해주었고 브로커를 소개시켜주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나리 씨는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나리 씨는 "가족들 중에 내가 가장 먼저 한국으로 올 결심을 했다. 이는 매우 어렵고 긴 여정이었다. 메콩강을 건너고, 라오스 산을 넘는 등 위험하고 힘든 순간들이 많았다. 어떤 산은 경사가 90도 가까이 되어서 미끌어질 뻔 하기도 했다. 또 어떤 길은 너무 좁았는데 마침 비도 내렸다. 만약 미끌어지면, 우리 모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계속 하나님을 찾았다. 마침내 대만에 안전하게 도착했을 때, 이것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고 전했다.

그녀는 대만에서 한국으로 도착할 수 있었고, 지금도 한국에서 지내고 있다. 그리고 신분증도 발급받았다.

이후 그녀의 어머니와 다른 여동생들도 한국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중국으로 건너왔던 둘째 여동생은 여전히 중국에서 남편과 아이와 함께 지내고 있으며, 나리 씨의 남동생은 북한에 남겨져 있다. 그러나 현재는 연락이 되질 않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그녀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졌다.

오픈도어즈, 탈북민 여성들의 간증
▲한국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나리씨와 가족들. ⓒ오픈도어즈 제공

그녀는 시편 119편 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시라" 말씀을 인생의 요절로 붙들고 있다.

그녀는 "내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할 때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경계가 모호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내 발에 등이며, 세상에서 나의 삶을 비춘다. '내 길의 빛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인생 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빛을 비추신다는 의미다. 낮이나 밤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성경 말씀에 깊어지고 말씀을 더 잘 알수록, 우리 삶의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일에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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