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일상 언어를 사용하셨다

설교를 잘 하는 사람들은 글을 잘 쓴다. 교인과 소통을 잘 하는 설교는 일상의 언어를 사용되어졌다. 설교는 소통이 기본이기 때문에 일상의 언어를 사용해서 전달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설교자들은 신학언어를 사용한다.

설교자가 신학의 언어를 사용하면 교인은 설교가 무척 어렵다. 설교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증 만 커진다. 이는 의학, 법학 전공자의 전공 언어를 비전공자는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인 이동규는 그의 책 《한국인의 경영코드》에서 대화하는 방식을 기준으로 사람들의 유형을 4가지 타입으로 나눈다.

우선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기분 나쁘게 하는 유형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뭐 하나 되는 일이 있을 리 없다.

두 번째는 말도 안 되는 것을 기분 좋게 말하는 유형이다. 주로 혈액형이 '아부형'인 사람이다.

세 번째는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유형으로, 옳은 이야기를 기분 나쁘게 하는 유형이다. 고학력자나 전문가 그룹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이 유형에 속한다.

마지막 네 번째는 옳은 이야기를 기분 좋게 하는 유형이다.

설교자들은 어디에 속하는가? 세 번째 그룹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전문 신학 용어로 어렵게 이야기하면서, 못 알아듣는다고 핀잔을 주는 유형이다.

자신이 어렵게 설교했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설교자는 옳은 이야기를 청중들이 쉽게 들을 수 있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옳은 이야기를 들릴 수 있게 하려면, 예수님의 비유법을 활용해야 한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전문 의학 용어를 처방전에 쓴다. 환자는 그 뜻을 알고 싶지만, 전혀 알 수 없다. 많은 설교가 마치 의사가 의학 용어 쓰듯 신학 용어로 하니, 거의 알아듣지 못한다.

성경은 어렵다.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땅의 사람이 하늘의 언어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전공자가 아니면 힘들다. 교인이 성경만으로 짜인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을까?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 외에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저도 처음 신학을 공부할 때, 한 학기 이상 교수들의 설명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최소한 1년이 지나고부터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금도 신학 용어는 어렵다. 반면 일상 언어는 쉽게 알아듣는다. 일상 언어는 어려운 것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일상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설교를 잘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신학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한다.

설교할 때, 설교자는 신학 용어를 사용해선 안 된다. 교인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신학 용어가 아닌 일상 언어를 사용하셨다. 이는 교인들이 눈높이를 맞추신 것이다. 청중들은 말씀을 쉽게 알아듣자마자, 더 듣기 위해 따라 다녔다.

설교자가 성경으로 시작하고 성경으로 설명하면, 설교자는 은혜가 넘친다. 반면 교인은 복장이 터진다. 성경은 특히 이스라엘 역사와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도 제대로 모르는데, 이스라엘의 역사와 문화를 사용한 설교를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는가? 만약 그 사람이 초신자라면 눈만 깜박이다 집에 돌아갈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풀어냈다면, 설교자들도 하늘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야 한다.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원재료가 아니라 가공된 제품이어야 한다

설교는 1차 산업 품목이 아니다. 2차 산업 품목 이상이다. 3차 산업처럼 교인의 입장에서 맞춰진 서비스 산업이다.

성경의 언어로 설교하는 것은 1차 산업 품목처럼 가공되지 않은 원재료다. 1차 산업 품목인 쌀을 주식으로 먹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쌀을 가공한 밥으로 만들어 먹는다. 거기다 반찬까지 곁들여 먹는다. 성경을 반찬까지 곁들여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가공한 것이 설교다.

아트설교연구원 수업 중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목사의 목회지에서 옥수수를 재배한다. 그 목사는 옥수수를 수확하는 여름철이 되면 무척 바쁘다. 사랑과 수고를 통해 거둔 옥수수를 따서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원재료인 상태로 팔았을 때는 소득이 그리 높지 않았다. 이에 옆에 있던 목사가 옥수수를 쪄서 진공으로 포장해 판매할 것을 권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옥수수를 농장에서 딴 상태로 팔면 개당 400원을 받는다. 하지만 가공을 거치면 2,000원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럼 당연히 가공해서 파는 것이 효과적이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설교란 원재료인 성경을 그대로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교인이 먹을 수 있도록 가공해 먹여야 한다.

이는 설교는 주해가 아니라 적용에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예수님 당시 이야기를 현재를 살아가는 교인들의 삶과 접목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가공이 필수적이다.

성경 읽기는 원재료인 성경을 그대로 읽어주면 된다. 하지만 설교는 가공해서 교인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법을 사용하신 이유다.

아이가 자라면서 먹는 것이 달라진다. 갓 태어났을 때는 모유나 우유만 먹는다. 4-6개월이 되면 이유식을 먹여야 한다. 분유 먹는 아기는 4개월부터, 모유 먹는 아기는 6개월부터 먹이면 좋다.

돌쯤 되면 밥을 먹인다. 밥을 먹어야 하는데 여전히 모유나 우유를 먹는다면, 건강에 불균형이 생긴다. 10살 짜리 아이가 여전히 모유를 먹는다고 생각해봐라. 이는 끔찍하다.

설교자도 마찬가지다. 설교는 2,000년 전 이야기를 오늘날의 이야기로 교인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설교는 시대, 사람, 상황에 맞게 가공이 필수다. 가공되지 않았다면 이는 설교가 아니다. 설교에서 중요한 적용에 주안점을 두기 위해 시대, 사람, 상황에 맞게 가공해야 한다.

예배당 채플 의자 교회 자리 예배 목사 마이크 집회
▲한 교회 예배당 모습.

예수님의 비유법을 설교에 활용해야 하는 이유

예수님은 비유법을 사용해 설교하셨다. 그렇다면 설교자들도 설교에서 예수님의 비유법을 사용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비유법을 사용하신 이유는 비유는, 비유가 모르는 세계와 아는 세계를 연결해 주는 다리와 같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즉 영적인 세계와 이 땅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최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물론, 고전이나 불경 등에서도 비유법을 많이 활용한다. 이유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를 사용하면 하나님의 세계를 땅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 비유법을 사용할 때, 땅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

예수님의 비유법은 최고의 글쓰기 방법이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신학 교육은 예수님의 비유법을 뜻풀이로만 가르친다. 한 가지 더 배워야 한다. 바로 예수님의 비유법을 활용한 글을 써야 한다.

미국 작가인 샘 혼(Sam Horn)은 그녀의 책 <사람들은 왜 그 한 마디에 꽂히는가?>에서 교인들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세 가지 있다고 말한다.

첫째, 비유적인 이야기다. 이는 짧고 간단하면서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 청중이 많을 때 좋은 방법으로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이야기 방법이다.

둘째, 촉매제가 되는 이야기다. 이는 구체적인 이야기로 시사점을 던져 주어 청중에게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다. 즉 통찰력을 주는 이야기가 된다.

셋째, 재미있는 이야기다. 가장 흔히 이야기라고 하는데, 인물 묘사가 풍부하고 대개 우스운 내용이 많으며, 개인이나 조직의 특성들을 구체적으로 담아낸다. 이 방법은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인상 깊은 장면을 순간적으로 포착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교인들이 만족하는 이야기 중 첫째로 든 것이 '예수님의 비유법'이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설교자가 청중들이 만족하는 설교를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고 말한다. 하지만 세 가지 모두를 사용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셋 중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한다면, 첫째 방법인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를 택하라고 한다. 이 예수님의 비유법은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들려지는 설교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예수님의 비유법을 글로 쓸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설교하실 때 비유로 설명하셨다. 이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첫째, 비유로 하신 말씀의 뜻을 해석해야 한다. 둘째, 설교 글을 비유로 사용해야 한다.

신학교는 오직 비유의 한 가지 뜻만을 신학생에게 가르쳐 왔다. 목회자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은 이렇다. 신학 교육은 현장에서는 그리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학교 교수들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설교자들을 가르치다 보면, 설교에서 논증의 중요성을 거의 모른다. 오직 설명으로만 설교를 한다. 설교에 논증이 없다고 하면, 논증이 엄청 많다고 한다. 이는 설교가 글이라는 것을 도외시한, 전형적인 신학 교육의
불일치 때문이다.

설교는 말이라고 해 왔다. 글 없는 말은 결국 설교자의 독백으로 그칠 확률이 크다. 아니, 글을 쓸 줄 모르기에 말이라고 하는지 모른다.

글 없는 말은 정신없는 몸과 같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꺾인 꽃'과 같다. 이는 야고보서 2장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와 같은 말이다.

저는 많아 봤다. 아니 아주 많이 봤다. 글 없이 말만 하고 있던 설교자들의 목회 현장을! 그들의 목회는 피폐했다. 그들은 목회에는 희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글은 '타고난다'는 등, 상식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예수님의 비유법은 듣는 교인들이 가장 잘 이해 되게 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설교자들은 이 방법을 배워서 설교 글쓰기에 사용해야 한다. 비유법을 설교 글쓰기에 사용하면 교인들은 어려운 성경을 쉬운 설교로 받아들이게 된다.

최고의 방법을 놔둔 채 최악의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어리석다. 우리는 어리석은 설교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법을 사용하는 것은 지혜로운 설교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설교자가 되는 방법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최고의 설교 방법인 비유법을 주셨는데, 소수만 사용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설교자들은 대부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이 비유법을, 세상의 글쟁이들은 대부분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법, 당신의 설교를 설교답게 해 준다. 예수님의 비유법은 해석은 물론, 글쓰기에서도 최고다. 예수님의 비유법으로 글을 쓰면, 당신의 설교를 교인들이 들으려 고개를 쭉 뺄 것이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