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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치’가 한국교회의 전통적 입장은 아니다”

기독일보 김진영 기자

입력 Jul 15, 2019 10:06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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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기독교의 정치참여에 대해’ 김명구 교수

김명구 교수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에 있는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적어도 우리 기독교 역사를 놓고 봤을 때 ‘정교는 분리해야 한다’거나 ‘교회나 목사는 정치에 참여하면 안 된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기 어렵고, ‘비정치가 한국교회의 전통이었다’는 것도 맞지 않다”며 “그야말로 어느 한 쪽의 입장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김진영 기자

김명구 교수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에 있는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적어도 우리 기독교 역사를 놓고 봤을 때 ‘정교는 분리해야 한다’거나 ‘교회나 목사는 정치에 참여하면 안 된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기 어렵고, ‘비정치가 한국교회의 전통이었다’는 것도 맞지 않다”며 “그야말로 어느 한 쪽의 입장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김진영 기자 (포토 : )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전광훈 목사)의 이른바 '시국선언문'은 교계 안팎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낳았다. 그러면서 '정교분리란 무엇인가?' '기독교의 정치참여는 가능한가?'와 같은 논쟁에 불을 붙였다. 이에 한국교회 역사학자인 김명구 교수(연세대 이승만연구원)를 만나, 지난 130여 년 동안 우리 기독교가 이 땅에서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되짚었다. 아래는 김 교수와의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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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분리, 1907년 평양 선교사들이 공식화
그러나 서울 선교사들에겐 선교-정치 밀접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개념은 언제 생겼나?

"그것이 공식화 된 것은 1907년이다. 평양대부흥 운동이 일어난 후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주로 그런 입장을 가졌다. 왜 그랬는지 이해하려면 당시 한반도와 그 주변의 정세를 먼저 알아야 한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과 조약을 체결했다. 을사늑약이다. 그러자 우리나라에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런 의식이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선교사들의 태도가 둘로 나뉜다. 서울에 있던 선교사들은 그런 움직임에 동조했던 반면 평양의 선교사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서울이든 평양이든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은 대체로 비슷했다. 그들 대부분은 19세기 영미 복음주의 노선에 있었다. 교회는 정치적이어선 안 되고 단지 영혼 구원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복음을 전했던 환경, 즉 서울과 평양의 그것은 서로 완전히 달랐다.

서울에서 활동했던 알렌이나 언더우드,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은 자연스레 왕실과 연결됐다. 이들의 선교전략은 학교나 병원을 통한 교회의 확장이었으므로 왕실의 도움이 필요했다. 왕실 역시 이들을 통해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선교사들은 당연히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 학생들의 적지 않은 수가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던 게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또 서울 사대문 안에 양반, 즉 유학 지식인들의 수가 약 30%나 되었던 것도 이 지역 선교사들이 정치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국권 회복을 갈망하던 지식인들을 만족시켜 선교의 뿌리를 내리려면 그래야 했을 것이다.

이 때 선교사들이 중·고등학교만이 아닌 대학을 세우려 했다는 데서도 정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서울은 한국의 중심이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총 집결지다. 선교사들이 대학을 세우려 했던 건 정치를 비롯한 한국의 전 영역에서 기독교 리더를 양성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정치는 선교와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평양은 그렇지 않았다. 유학 지식인들의 수는 고작 0.2%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중앙 정부의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평민들이었다. 서울 주민들에 비해 영적으로 복음을 보다 더 잘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굳이 정치에 개입할 필요 없이 순수하게 복음만 전해도 될 환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의 병합이 거의 확정된 상황에서, 섣불리 일본에 맞섰다가는 자칫 추방될 위험도 있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될 바에야 차라리 '정교분리'를 선언하는 것이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평양 선교사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일종의 선교전략적 판단이었던 셈이다."

'구령' '구국' '구령-구국' 세 축으로 발전
'교회·목사, 정치 안 돼' 주장하기 어려워

3.1운동
▲1919년 당시 덕수궁 대한문 앞 만세운동 모습. ⓒ독립기념관

-그랬다는 건 당시 '정교분리'가 교회의 통일된 입장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렇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에 나선 33인의 민족 지도자 중에서도 길선주 목사를 비롯해 기독교인들이 많지 않았나? 평양 선교사들 입장에선 이 역시도 정치 개입이어서 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나선 기독교인들에게 '구령'과 '구국'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교회의 사명은 개인 구원에서만 그치지 않아야 하고 나라를 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게 그들의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저항의 정신이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해방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목사와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참여했다. 그들은 그것을 '건국운동'으로 여겼다. 이승만 대통령도 기독교이었고, 함태영 부통령은 장로교 목사였다. 이후에도 한경직 강원용 목사 같은 이들이 정치에 자주 개입했다. 특히 강원용 목사의 책 「역사의 언덕에서」는 온통 그런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한경직 목사는 5.16의 정당성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 사절로 갔으며,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70년대 민주화 회복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오늘날 역시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들을 중심으로, 가령 광우병 사태나 촛불시위 등 정치에 굉장히 많이 참여하고 있지 않나?

그렇기에 적어도 우리 기독교 역사를 놓고 봤을 때 '정교는 분리해야 한다'거나 '교회나 목사는 정치에 참여하면 안 된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기 어렵고, '비정치가 한국교회의 전통이었다'는 것도 맞지 않다. 그야말로 어느 한 쪽의 입장이었을 뿐이다."

-"'구령'과 '구국'이 하나였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구령이나 구국, 어느 한 쪽만 따로 주장하지 않았다는 게.

"선교 초기 개인 구원과 국가의 구원이라는 문제가 서로 날카롭게 대립했었다. 즉 '교회는 오직 개인의 구원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주장과 '사회 구조의 변혁 및 구국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 맞섰다. 특히 후자는 기독교를 단지 구국을 위한 도구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도 이었다. 그런데 그 둘을 분리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본 기독교인들 역시 존재했다. 이들은 '나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만큼 조국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언급했던 이승만이나 함태영, 한경직, 강원용 같은 이들이다. 각자의 신학적 색깔은 조금씩 달랐지만 구령과 구국이 하나였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았다. 기장을 태동시킨 김재준 목사도 그런 신앙을 가졌던 인물 중 한 명이다. 초기 기독교 역사는 이런 세 축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함태영 부통령 3.1운동
▲3.1 독립운동으로 인해 투옥됐던 故 함태영 부통령. 그는 장로교 목사이기도 했다. ⓒ이승만연구원

해방 후 '구국'은 '반공'으로 표출
교회 일각 '민족지상주의' 염려돼

-일제를 경험하며 자연스레 '구국'의 신앙이 싹텄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해방 후 구국 신앙은 어떤 양상을 띠었나?

"반공(反共)이었다. 기독교는 신 자체를 부정하는 '유물론'을 허용할 수 없었다. 특히 6.25를 지나며 그런 정서는 더욱 강해졌다. 당시 북한 인민군이 전쟁 발발 후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9월 28일 퇴각하기까지, 단 3개월 여 동안 희생된 기독교인들의 수가 일제 때의 그것보다 약 세 배나 더 많았다. 한국 기독교는 이런 신학적, 역사적 이유로 인해 반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를 하나 들자면, 천주교의 경우 1947년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을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공동위원회가 구성됐을 때, 소련의 대표가 남쪽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환영대회까지 준비했었다. 한국 천주교의 이런 모습은 당시 로마교황청이 공산주의를 비판했던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나름 이유가 있었다. 다름 아닌 북한에 있는 천주교회를 보호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들의 기대와 전혀 달랐다. 북한 정권은 함경도에 있는 덕원수도원을 강제로 폐쇄하고 신부들을 가두었다. 이후 천주교는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선 신앙의 자유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고, 이 때부터 북한을 강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반공을 기치로 개신교회와 연합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그 중에서도 소위 '진보'라는 그룹 안에 민족지상주의가 깊이 들어와 있어 걱정이다. 물론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 민족을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한국교회를 '민족교회'라 부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복음은 민족보다 위에 있는 개념이다. 하지만 민족지상주의적 관점에서 복음은 민족의 하위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 민족끼리' 반드시 하나 돼야 하고, 이를 위해 통일은 꼭 이뤄야 한다는 게 민족지상주의자들이 생각이다. 때문에 통일을 위해서라면 기독교일지라도 공산주의와 대화해야 하고,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하나가 돼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들이 한국교회의 반공사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미 냉전이 붕괴된 마당에 그런 식의 반대는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북한에 있던 교회가 쫓겨난 이유도 북한 정권은 우호적이었는데 교회가 일방적으로 이를 거부한 탓이라고 주장한다. 통일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일단 북한 정권의 실체를 인정하자고 한다.   

그러나 이는 교회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정말 북한 정권이 교회에 우호적이었는가? 지금까지의 역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웅변하고 있다. '교회가 자유로울 수 있어야만 비로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게 바로 기독교인들의 믿음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앙의 자유가 없는 북한을 통해 오늘날 낱낱이 증명되고 있다.

공산주의는 기독교가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것이 1920년대 한국 기독교가 공산주의를 겪은 이후부터 비교적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유지했던 입장이었다. 당연히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기장을 이끌었던 김재준 목사나 강원용 목사도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태극기 휘날리며 6.25
▲6.25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영화 스틸컷

'보수 원조' 송진우 한민당의 '경제 민주주의'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확실히 '보수' 내지 '우파'여야 하나?

"'보수'와 '우파'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문제는 우리나라에 아직 이에 대한 분명한 정의와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소위 '진보'로 분류되는 한 유명한 정치인이 TV에 나와 '나는 보수'라고 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이처럼 '보수'의 정의가 제각각인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지식인들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다만 이 주제와 관련해 한 가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한국 보수당의 원조라 불리는 '한민당'(한국민주당)에 의외로 사회주의자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송진우가 당수였을 때였다. 당시 한민당이 핵심 가치로 내세웠던 세 가지가 있었는데 자유민주주의, 반공, 경제 민주주의였다. 마지막 '경제 민주주의'에서 갸우뚱 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한민당에 사회주의자들이 많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송진우의 한민당은 공산주의는 용납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라 할 수 있는 경제 민주주의는 포용했던 것이다.

사실, 한민당의 경제 민주주의는 YMCA에서 출발했다. 여기에 월남 이상재의 제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복음주의'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복음주의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가장 중요한 죄로 여겼다면, 사회복음주의자들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에겐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경제적 분배가 중요한 가치 중 하나였다.

이에 대해 이상재는 '공산주의가 남의 것을 억지로 강탈해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이라면, 우리가 가진 것을 스스로 나눠주는 것이 기독교의 사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정신을 보수의 원류라는 송진우의 한민당이 채택했고 제2공화국 때까지 내려온다. 이승만의 농지개혁도 이런 사상에 기초해 있다. 무엇이 진정한 보수인지, 기독교가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김명구 교수는

월남 이상재 연구로 2003년 연세대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교수, 서울YMCA 병설 월남시민문화연구소 소장, 해위 민주주의연구원 운영위원, 감리교 산하 한국선교전략연구소 부소장으로 있다. 감리교 목사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월남 이상재의 기독교 사회운동과 사상」(2003), 「소죽 강신명 목사」(2009), 「해위 윤보선의 생애와 사상」(2011), 「서울YMCA 100-110년사」(2014),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백년사」(2015, 공저), 「복음,성령,교회-재한선교사들연구」(2017), 「한국 기독교사Ⅰ」(2018) 등 10여 편에 이른다. 2013년, 영국 에딘버러대학(The University of Edinburgh)은  'Nationalism, Religion and Democracy'를 책으로 출간했고, 2019년에는 그의 논문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Edinburgh with a focus on Yun Posun'을 에딘버러대학 저널에 등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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