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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화학의 아버지 로버트 보일의 학문과 신앙

기독일보

입력 Jul 03, 2019 10:08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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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하나님께서 바람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정하시며"(욥기 28장 25절)

 

바람에도 무게가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지금부터 겨우 30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부터 약 4,000년 전에 쓰여 진 성경의 욥기 서에는 하나님께서 바람의 무게를 정하셨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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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서양 철학자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라 했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 주장했다. 엠페도클레스(주전 490~430년)는 물질이 아주 작은 원소로 되어 있다는 질료적 개념보다는 만유가 물, 불, 흙, 공기라는 4 원소로 되어 있다는 주장을 편다. 이들 4 원소는 각각 차가움과 뜨거움과 마름과 축축함이라는 속성으로 나타난다. 원자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가 이들 4 원소로 가득 차 있어 이들 원소들이 쉽게 변형되면서 세상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이것을 4원소설이라고 한다. 물론 이것은 오늘날의 과학으로 보면 맞지 않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이론을 믿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 다른 생각을 지닌 학자도 물론 많이 있었다.

데모크리토스라는 고대 과학자는 물질은 매우 작은 고체 알갱이로부터 시작된다고 지금의 원자론과 매우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17세기에 와서도 많은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 이론에 의심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부정하던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에 관심을 가진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지닌 물질에 대한 기본 생각과 공기의 성질에 관한 신비를 과학적으로 밝혀내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버트 보일이다.

엠페도클레스를 따라 4 원소설을 믿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빈 공간이라든가 진공과 같은 개념을 수용할 수 없었다. 진공의 존재 가능성에 관한 주장은 토리첼리와 파스칼에게서 나왔는데, 이것을 실험으로 확인한 사람도 바로 로버트 보일이다. 그는 수천 회에 달하는 실험을 비범한 통찰력과 끈질긴 인내와 신앙적 정직성으로 이루어내었다. 이렇게 그는 화학의 아버지인 동시에 실험물리학도 본 궤도에 올린 태두(泰斗)였다.

어린 시절 나타난 보일의 천재성

로버트 보일(Robert Boyle:1627-1691)은 아일랜드 리스모아 성 귀족 집안의 열네 번째 자녀였으며 사내아이로는 일곱 번째인 막내로 태어났다. 엘리자베스 1세는 프로테스탄트를 전략적으로 부유케 만들기 위해 일부 가족을 아일랜드로 보냈는데 그의 조상이 바로 그 중에 있었다. 아버지 리처드 보일은 코르크 백작(Earl of Cork)이자 대법관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면서 청교도적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청교도적 신앙을 지닌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에서 자란 보일은 어린 시절부터 일찌감치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로버트는 정말로 큰일을 해낼 아이야. 어린 것이 여섯 나라 말을 할 줄 알다니!"

"벌써 성경을 원어로 읽는답니다. 위대한 신학자가 될지도 몰라요."

보일은 12살 때 이미 영어뿐 아니라 프랑스어와 라틴어, 수학에도 능통하였으며, 헬라어, 시리아어 그리고 구약 성경을 기록한 유대인들이 쓰는 히브리어를 공부하여 성경을 원어로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성경을 읽는 습관은 이때부터 시작해서 그의 생애를 통하여 매일 아침 계속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여덟 살 되던 해, 보일은 지금도 영국에서 유명한 "이튼 학교"에 들어갔다. 많은 영국의 지도자들이 바로 이 학교 출신으로, 당시에는 귀족의 자녀만이 다닐 수 있는 학교였다. 그렇지만 집안이 여유가 있었던 보일은 이외에도 남들이 경험할 수 없는 여러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열한 살 때 가정교사와 함께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는가 하면, 열네 살 때에는 혼자 이탈리아를 여행하였으며, 이튼 학교를 졸업하고 스물한 살이 되어서는 6년간 네덜란드와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에 유학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부유한 그의 환경과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그의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학문에 대한 욕심은 결혼도 잊은 채 평생 동안 계속되었다. 164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보일은 많은 유산을 받게 되었다.

"고국 아일랜드에 우선 성경을 많이 보내자."

그가 기도하며 결정한 일은 먼저 성경을 고향에 되도록 많이 보급하는 일이었으며, 여러 선교 사업에 헌금도 많이 내어놓았다.

근대 과학적 방법의 개척자요 실험 화학의 아버지, 보일

1654년, 드디어 영국 옥스퍼드에 실험실을 하나 만들었다. 위대한 과학자 보일의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유럽에는 연금술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연금술은 원래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된 것인데, 구리, 납, 주석, 철, 따위의 여러 물질을 한데 섞어서 금 은 따위의 귀금속으로 변화시켜보려는 원시적인 화학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연금술에 얼마나 기대가 크고 관심이 많았던지 심지어는 잘만하면 귀중한 불로장생의 약이나 신비한 물질까지도 혹시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연금술이 16세기에 와서 유럽에서 다시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철이나 구리, 납 등과 같은 흔한 금속을 가지고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을 만들어 어떻게 큰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하는 환상에 젖어 많은 연금술사들은 여러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연금술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성경에 해박한 보일은 이 연금술을 믿지 않았다.

보일은 엄밀한 과학적 방법만이 물질의 원리를 성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이 무작정 신비한 물질을 얻어내려는 연금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보일이 오늘날 화학의 아버지로 불려 지게 된 것은 바로 그가 싫어하던 연금술사에 의한 것이었으니 참으로 세상은 아이러니하다.

1669년 어느 날, 독일의 연금술사 헤니히 브란트는 다른 연금술사들과 마찬가지로 신비한 물질을 찾기 위해서 실험실에서 화로에 불을 피우고는 어떤 액체를 증류기에 넣고 그것을 증발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증류기 아래에 하얀 풀 모양의 어떤 것이 남았는데 땅거미가 지고 방이 어두워지자 그것이 신기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무얼까?"

브란트는 남아있던 액체 속에서 이 침전물을 끄집어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놀랍게도 거기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물질이 큰 돈벌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는 이 신비한 물질을 자랑하기 위해 바다 건너 영국의 찰스 2세에게 갖고 왔다. 찰스 2세는 과학과 학문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찰스 2세에게 이 물질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보일 선생, 이 물질이 과연 무엇일까요? 브란트는 단지 우리 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만 하는군요."

찰스 2세는 당시 함께 과학자 모임을 이끌던 보일에게 이 물질이 무엇인지 밝혀 달라고 요청하였다. 별다른 사전 정보도 없이 물질의 본질을 밝혀낸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부탁을 받은 보일은 철저한 실험을 통해 마침내 이 물질이 무엇인지 밝혀낸다. 그것은 우리의 소변 안에 섞여 있는 물질 가운데 하나인 백린(白燐)이라는 물질이었다. 별다른 힌트도 없이 실험과 관찰에 의하여 이것을 밝혀낸 보일은 정말 뛰어난 과학자였다. 그는 이 업적 하나만으로도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찬양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더욱 잘 알려진 보일의 업적 중에는 우리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 바로 배우게 되는 과학의 여러 법칙 중에 하나가 있다.

"온도가 일정하면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

바로 유명한 보일의 법칙이다. 그는 동물의 방광(15주-생물의 몸 안에서 오줌을 한 동안 저장할 수 있도록 얇은 막으로 된 주머니 모양의 기관)을 오늘날의 풍선처럼 만들어서는 종 모양으로 된 단지 안에 넣고는 진공 펌프를 만들어서 공기를 밖으로 뺄 수 있는 장치를 하였다. 그랬더니 진공 펌프에 의하여 압력을 낮추면 방광 주머니가 부풀어 오르고 공기를 넣면 반대로 주머니가 줄어드는 것이었다. 그밖에도 그는 J자 모양의 관에 수은을 넣어 또 다른 방법으로 압력과 부 의 관계를 실험하였다. 그리고 공기가 불이 타는 데는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물들에게는 무슨 영향이 있는지 알아보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실험을 하였다. 이런 업적 때문에 사람들은 오늘날 보일을 근대 과학을 탄생시킨 '과학적 방법의 선구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보일의 물질에 대한 생각

"원소는 본래 단순한 것이다. 이것은 불순물이 전혀 없는 것이며 다른 물질로부터 만들어지거나 서로 바꾸어도 만들 수 없다."

1661년 보일이 출판한 「의심 많은 화학자」라는 책에 기록된 이 말은 연금술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며, 물질의 근원이 무엇인지 잘 모르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물질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확히 알려주는 놀라운 과학적 선언이었다. 이것은 훗날 또 다른 영국의 유명한 그리스도인 과학자 돌턴에 의하여 원자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일은 근대 과학이 출발하는 데 귀중한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본래 보일은 무신론적 철학에서 유래한 원자론이나 유물론이라는 단어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대신 보일은 미소체(微小體, corpuscle)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좋아했다. 보일은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물질과 함께 다른 크기와 모양을 가진 수많은 작은 조각들을 나누어 놓고, 각각 다른 방식으로 운행하도록 설정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즉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원자를 전혀 변화시키지 않고 유지하여 왔을 거라고 본 것이다. 지금의 현대물리화학으로 생각해보면 이 생각은 고유의 원소를 강조할 경우 긍정적이기도 하고 원자가 깨어진다는 면에서 반론도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어찌되었든 원자라는 말에 담긴 비 신앙적 요소를 제거하고 싶었던 보일 신앙의 보수적 편린을 그의 언어 사용에서조차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무신론 철학에서 온 "원자론"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원자론"을 결국 지지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형상과 성질의 기원, Origin of Form and Qualities』(1666) 서문 참조).

성경은 집 마다 지으신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창조주 하나님이라 했다. 따라서 보일은 당연히 자연의 기계적 질서가 하나님의 설계를 웅변하는 증거로 보았다(롬 1: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일은 르네 데카르트나 피에르 가상디(1592-1655)처럼 신과 천사, 악마와 같은 영적 존재가 있음을 확신하였기에 인간 영혼불멸설을 믿었고 자연에 대한 기계론적 설명의 범위는 제한하였다. 즉 그는 신학으로까지 학문 영역을 확대할 마음까지는 없었던 듯하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물질은 우연이 아니요 무의미하게 운행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물체에 부여한 운동을 따라 섭리와 계획 속에 있음을 과학자로서 증거 하는 일이었다. 굳이 표현한다면 그는 자연(과학)에 대한 기독교 과학 사상가였다.

보일의 신앙

그런데 보일은 이외에도 남모르는 선행을 일평생 실천하며 경건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17 세기 크롬웰 통치 시 영국에는 "보이지 않는 대학"(Invisible College)이라는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은 유명한 학자들이 함께 모여 여러 가지 토론도 하고 연구도 하며 사귀는 그런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1662년 찰스 2세에 의하여,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영국의 유명한 왕립협회로 발전하였는데, 이곳의 회원들 중에는 보일의 조수로 있었고 현대물리학의 개척자였던 로버트 훅과 유명한 뉴턴도 있었다. 보일은 뉴턴보다도 열다섯 살이나 위였는데, 돈이 없던 뉴턴이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이 기록되어있는 책을 낸다고 할 때 선뜻 그 비용을 감당할 만큼 정이 많고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였다.

더욱이 그의 신앙에 관한 열심은 매우 유별나서, 앞에서도 밝혔듯이 하루도 성경 읽기를 거르는 날이 없었으며, 성경을 직접 번역도 하였고,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보일 강습소'까지 세울 정도로 열심이었다.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뉴턴처럼, 보일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창조 세계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밝혀 보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으며 재산도 많이 물려받았던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탐욕과 쾌락만을 위해 살았다면 그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일은 결코 자만하거나 탐욕적이거나 방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기를 절제하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값지게 사용할 줄 알았다.

이렇게 평생을 청교도적 삶을 실천한 로버트 보일은 1691년 12월 30일, 예순 여섯 살의 나이로 빛나는 삶을 마감하고 주님의 품으로 떠났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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