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년 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속수무책.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 파죽지세. 우리에게 남은 건 부산 포항 등 남쪽 끄트머리 일부에 불과했다. 또 한 번 나라를 잃게 될 절체절명의 순간. 마침내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의 서막이 오른다.

불타는 집과 피난의 황망함이 있던 폐허. 경북 의성에서 나고 자란 19살의 청년은 친구들과 자원입대를 결심한다. '나라가 없어질 지도 모르는데, 생명 부지에 안달해서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총 한 번 잡아본 적 없던 이 학도병은, 그날 저녁 주먹밥 하나로 배를 채우고 '포화 속으로' 뛰어든다. 맥아더의 진격이 있던 바로 그 때, 그 무더웠던 여름.

육군 6사단 수색대. 그가 배치됐던 부대다. 속절없이 밀리던 전세는 다시 뒤집혔다. 북진을 거듭했다.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올랐다. 통일을 목전에 두는 듯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반전이 일어난다. 종공군의 참전. 전세는 또 기울었다.

계곡을 타고 오르던 우리 군은, 몸을 숨긴 채 능선을 따라 남하하던 종공군에게 포위되고 만다. 그도 그 속에 있었다. 대오를 정비할 겨를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이윽고 부상을 당했다. 다리가 부러졌다. 평양에 있던 야전병원에 몸을 뉘었다. 하지만 퇴각을 피할 수 없었다.

문제는 다리였다. 누군가 자신을 옮겨야 살 수 있었다. 일군의 청년들이 나타났다. '기독청년 봉사대'라는 완장을 찼다. 공산 치하에 숨어있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이 그를 진남포 항구까지 날랐다. 거기에 덴마크와 스웨덴이 보낸 병원선이 도착해 있었다. 이걸 타고 이틀 항해 끝에 부산 육군병원에 다시 몸을 맡겼다. 12월 7일. 그도 몰랐던 날짜는 어느새 해를 넘어가려 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아득한 기억이다. 머리칼은 셌고, 기력은 쇠했다. 67년이 지나 86살이 된 김정섭 장로. 그 때 다리를 다쳐 수술을 받고 병상에 있다가 제대를 했다. 이후 38년을 교직에 바쳤다. 지금은 사단법인 한국기독교학교연합회 사무국장으로 있다. 6.25 한국전쟁 67주년을 며칠 앞두고 참전용사인 그와 마주했다.

-자원입대를 했을 당시 교회를 다니셨나요?

"모태신앙인이었지요. 의성에서 1905년에 설립된 삼분교회를 다녔습니다. 같이 입대했던 친구들 중에도 교회 다니던 이들이 있었어요. 지금은 새문안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오래 다녔지요."

-그 때 교회 분위기는 어땠나요?

"전쟁통에 교회라고 다를 게 있나요. 일단은 나라부터 구하고 봐야 한다, 다들 그랬지요. 이걸 막지 못해 공산화가 되면 신앙이고 뭐고 못 지키니까. 교회도 숱한 수난을 겪었어요. 남한이고 북한이고 할 것 없이 많은 교회가 파괴 됐습니다."

-공산화를 언급하셨는데, 6.25는 어떤 전쟁이었나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세력 간의 이념투쟁이었지요."

-교회도 반공에 앞장섰지요?

"그럴 수밖에요. 공산주의가 뭡니까? 하나님을 부정하는 유물론적 사관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와는 섞일 수가 없지요. 지금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있나요? 없잖아요. 물론 기독교의 정신은 어느 한 이념에 갇히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지만, 공산주의는 반대해야 하는 겁니다."

-유엔군이 참전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까요?

"아마 없겠지요. 6.25가 발발하자마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즉시 소집됐고, 북한군 철수를 요구했어요. 그래도 멈추지 않으니까 참전까지 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 오묘한 점이 있어요. 당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5개 나라였는데,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참전이 어려웠다고 해요. 마침 소련이 회의에 나오지 않은 겁니다. 신기하죠. 나왔으면 반대했을 테고, 그럼 우리나라가 어찌됐을 지.... 저는 하나님의 은혜이자 섭리였다고 믿습니다. 우리나라를 지키시려는."

김정섭 6.25
▲김 장로는 "북한에는 굶주리며 자유를 억압당하는 우리 민족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모습이 허물어졌다"며 "그들을 하루빨리 그 고통어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 종교의 자유도 찾아주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민간 차원의 인도적 지원은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진영 기자

-낯선 땅에서 많은 외국 군인들이 죽었습니다.

"참 감사해요. 특히 미군 전사자가 많아요. 요즘 미국을 두고 이런 말 저런 말 하지만, 이건 꼭 기억해야 해요.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쓰라린 기억이지만 모두 잊지 말고 후대에 가르쳐야 할 역사인 겁니다. 무엇보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결코 잊어선 안 되지요."

-그런데 점점 잊히는 듯 합니다.

"나이든 어른들도 그러니..., 젊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저처럼 참전했던 용사들도 얼마 남지 않았지요."

-같이 입대했던 전우들도 생존해 계신가요?

"있긴 하지만, 그 때 많이 죽었어요. 저는 다행히 목숨을 구했는데, 살아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에게 미안하기도 해요. 북진했다가 퇴각하면서 죽은 이들 중에는 시체 수습도 못한 이들이 있지요. 현충원에 위패만 있는 이들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래도 그들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거니 고마워요."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서 통일이 되어야겠습니다. 통일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왜 통일을 해야 하느냐'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에는 굶주리며 자유를 억압당하는 우리 민족이 있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모습이 허물어졌지요. 그들을 하루빨리 그 고통어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종교의 자유도 찾아주어야 하고. 그런 점에서 민간 차원의 인도적 지원은 꼭 있었으면 좋겠어요. 배고픈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고쳐주는 건 기독교인의 의무니까요. 그런 뒤 완전한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겠지요. 결국 이를 이루시는 건 하나님이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