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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적분 발견한 ‘천재 중 천재’ 라이프니츠의 신앙

기독일보

입력 Jun 12, 2019 10:23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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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팔방미인 가운데는 명인이 없다(?)

세계 역사를 살펴보면 가끔 보통 사람이라면 한 가지의 경우도 꿈꾸지 못할 위대한 업적을 다방면에 걸쳐 쌓은 인물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산업 기술 사회에서는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팔방미인 가운데는 명인이 없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어떤 법칙이라도 항상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프랭클린이나 캘빈(윌리엄 톰슨)경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은 바로 그런 인물들이었다. 필자는 우리 민족 역사 최고의 인물인 세종대왕도 당연히 그 범주에 든다고 본다. 그런데 그런 예외적 인물 가운데서도 라이프니츠는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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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재다능한 인물들이 그렇듯이, 라이프니츠도 관심의 분야가 너무도 다양하여, 신앙도 그의 관심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루터파 교인으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철저히 믿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몇 가지 중요한 일에 관여하고 삼위 일체 하나님을 옹호하는 글을 쓰기도 한 인물이었다.

또한 역사상 그가 아이작 뉴턴과 더불어 최초의 미적분학 발견에 대한 공로를 가지고 감정적 논쟁을 벌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사실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애초부터 그렇게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주위 사람들이 부추긴 면이 더욱 강하다. 여기에는 영국과 독일의 자존심과 민족적 감정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마치 광개토대왕비의 해석과 조작 여부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자존심 싸움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의 창조 이후부터 뉴턴이 태어날 때까지의 모든 수학을 없애버려라. 그러면 뉴턴은 다른 분야에서 더욱 훌륭한 일을 많이 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한 이 말은 그가 뉴턴을 얼마나 뛰어난 과학자로 평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철학자가 된 철학자의 아들, 라이프니츠

빌헬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tz:1646-1716)는 뉴턴보다 4년 늦은 1646년 7월 1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철학 교수였다. 여섯 살 때 라이프니츠는 아버지와 사별하지만, 이미 어린 나이에 부친의 역사에 대한 정열을 이어받으며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서적 속에서 독학으로 라틴어와 헬라어를 터득하였다. 그의 가족은 독실한 루터교 집안이었다.

1661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들어가 법률학과 철학, 수학을 배운 그는 역사나 논리학에도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20세에 법학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했으나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학위 수여가 거절된 뒤 교수직을 포기하고 1666년에 마르트돌프 대학으로 옮겨, 다음 해 법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뉘른베르크에 가서 마인쯔 후국의 법조계와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1673년에는 물리학의 논문으로 런던 왕립협회의 회원으로 추대되었고, 1700년에는 프랑스 과학 학사원의 외국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와 동시에 베를린의 학사원 건립을 건의하여 초대 원장이 되기도 한다.

진정한 미적분의 발견자는 누구인가?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논쟁 전말

라이프니츠는 1672-1676년 까지 4년 동안 마인츠 후국의 외교사절단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676년 말에는 하노버 공(公)의 고문관과 도서관장을 지내었다. 그가 뉴턴과 서신 왕래를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뉴턴의 고백에 따르면, 그가 미적분에 대한 착상을 한 것은 1666년 런던에 페스트가 크게 번져 고향에 내려가 있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미적분 체계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70년이나 지난 1736년이었다.

라이프니츠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1675년 미적분을 발견하였으며, 이 이론의 정식 출판은 11년 후인 1677년 7월 11일이었으므로, 뉴턴보다 공식 출판의 연대만 가지고 따진다면 훨씬 빠른 셈이다. 심지어 뉴턴의 유명한 저서 「프린키피아」(우리 말 제목으로 전문 제목을 번역하면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 1687)에도 미적분은 전혀 언급되거나 사용되지 않고 있었으니 조금은 이상한 일이다.

그렇지만 미적분의 개요에 대해서는 이미 1669년 무렵부터 가까운 친지들에게 일부 알렸다고 전해지므로, 우리는 이 위대한 과학자 뉴턴의 말을 그대로 믿을 뿐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유가 어떻든 공식적 발표와 실용화는 라이프니츠가 훨씬 빨랐다는 것이 증명되는 셈이다.

뉴턴이 라이프니츠에게 보낸 첫 편지에 보면 '6acc?4s9t12' 등 뜻 모를 기호가 쓰여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애너그램(철자 바꾸기 놀이) 수수께끼 문자로, 이것을 풀면 라틴어로 바로 미분 방정식의 원리에 관한 설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677년, 라이프니츠는 뉴턴에게 답장을 쓰게 되었다. 여기에는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미분 방법이 dx, dy 등의 기호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문제는 뉴턴 편지의 애너그램이 미적분을 뜻한다는 것이 사실인가 하는 점이다. 아무튼 라이프니츠는 1677년에 출판한 적이 있는 미적분의 이론을 1684년 다시 한 번 정식 공표하게 된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에게 반감을 지니고 있던 스위스의 수학자 드 듀리에는 1699년, 그만 왕립협회에서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이 뉴턴의 생각을 도용한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이에 화가 난 라이프니츠는 1705년, 뉴턴이야말로 자신의 미적분 개념을 훔쳐간 장본인이라고 말해 버렸다. 둘 사이의 감정싸움은 이렇게 번져 갔다.

이번에는 옥스퍼드 대학의 존 케일 교수가 라이프니츠를 원색적으로 비난하였다. 화가 치민 라이프니츠는 케일의 발언을 취소하라고 영국 왕립협회에 제소하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당시 왕립협회장은 바로 뉴턴이었다. 뉴턴이 구성한 조사위원회는 곧 조사에 착수하게 되는데, 1715년 최종 조사의 결론은 당연히 뉴턴이 미적분의 최초 발명자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계속된 두 사람의 감정싸움은 두 사람의 사후까지 지속되어, 영국과 독일 양국 국민간의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져 갔던 것이다.

정설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늘날 일반적 평가는 미적분의 발견은 뉴턴이 조금 빨랐으나 발표와 실용화는 라이프니츠가 먼저였다는 쪽으로 정리되어가는 듯하다. 그러나 보다 더 정확한 정설은 이 두 사람이 각각 독립적으로 미적분을 발견하였다고 말해야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미적분에 관한 공적만큼은 라이프니츠에게 좀 더 공을 돌리고 싶다. 설령 뉴턴이 미적분에 관한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해도 라이프니츠의 발표와는 너무 긴 시간적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라이프니츠도 자신이 이것을 공표하기 이전 어느 시기부터 이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먼저 발표한 라이프니츠에게 좀 더 무게를 실어주는 것이 옳다고 본다. 아무튼 만일 미적분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과학적 성과들은 여러 부분 발전이 훨씬 지체되었거나 많은 이룩된 업적들이 불가능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라이프니츠의 신앙

1687년부터 1690년까지 의욕적인 활동을 계속한 라이프니츠는 독일 전역을 비롯한 유럽 각지를 여행하게 되는데, 이탈리아에서는 교황으로부터 바티칸의 사서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로는 교인 수가 많지 않은 개신교도였던 그로서는 이 일을 승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가톨릭이 파문한 루터교도가 아닌가!

오히려 그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통합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한 독특한 인물이었다. 당시는 양 교회가 분열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으므로 그는 어떤 극적인 화해를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30년 전쟁에 따른 인류에 대한 혐오감의 반작용으로 분열된 그리스도인들의 화해의 시도를 통하여 어떤 성취감을 꿈꾸었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나 가톨릭과 개신교의 화해가 그렇게 단순한 일만은 아니었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1683년, 신·구교 통합을 위해 독일 하노버에서 개최된 회의는 서로 양측이 주도권을 쥐려다가 결국 그만 무산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값있고 선한 일에 당연히 선한 결말을 기대하곤 한다. 하지만 어쩌면 역사의 흐름은 전혀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이 사건은 오히려 양측에게 더욱 완고한 고집과 상호 비난과 증오심만을 키워준 격이 되고 말았다. 급기야 1688년에는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간의 유혈 참사가 영국에서 일어나고 만다.

이런 종교적 갈등은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으니, 그 끈질긴 애증의 관계에 묘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성경은 가인과 아벨의 하나님께 대한 충성 경쟁에서 빚어진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신앙인 사이의 분열에 대한 그의 애타는 심정은 프로테스탄트교파인 루터파 교단과 개혁 교회의 통합을 위한 노력으로도 이어졌으나, 이것 또한 가톨릭과의 통합 못지않은 험난한 길임을 그는 곧 깨닫게 되었다.

라이프니츠가 철학에 뜨거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이런 종교인들의 어두운 모습을 거듭 경험한 이후부터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철학에 몰입해서도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주가 무한한 수의 모나드(Monad, 단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모나드설로 잘 알려진 만물에 대한 그의 해석 방법에는 가장 낮은 무(無)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높은 존재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단자들과 우주 전체의 조화를 예정 조화의 원리라고 했다. 이렇게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며 그 창조 세계는 자연과 은총이라는 두 질서에 의해 완전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예정 조화설>로 설명되고 있다. 그가 볼 때 이 세상은 분명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한 가장 복 되고 조화로운 최고의 가능한 세상이었다.

하나님은 진지하기 때문에 최선의 가능한 세계가 어떠한 세계인지 알고 있었으며, 선(善)하기 때문에 바로 그런 세계를 원하였고, 또한 전능하기 때문에 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러니 "이 세상은 창조주가 생각한 가능한 최선의 세계다"라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논리였다.

뉴턴이 미립자들은 의식을 가지지 않은 단순한 힘을 보여준다고 본 반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정신의 개체들로 '지각'과 '욕구'라는 두 개의 기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모나드는 정신의 개체들이었다. 한때 좀 더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뉴턴적 사고가 옳고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철학적이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양자역학 시대를 맞고 21세기 정보통신의 시대가 오면서 뉴턴의 역학도 일부 무너져버렸다. 그러면서 혹시 미시 세계도 단순한 물질적 힘만이 아닌 정보를 가진 입자가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깊어지고 있다(MIT 핵물리학 박사, 제럴드 슈뢰더의 <신의 과학> 참조). 물질의 이면에 에너지가 있고, 에너지의 이면에 어쩌면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는 생명과 미시세계에 대한 궁극적 실체와 본질에 대한 암시는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물질의 실체에 오히려 다가가고 있는 듯 보이니 정말로 천재들의 생각의 폭이란 보통사람들이 평가하기엔 정말 벅차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의 철학적 해석과 통찰력은 할레대와 마르부르그대 교수였던 크리스찬 볼프(1679-1754)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1729-1781) 등을 거쳐 오늘날 라이프니츠를 독일 철학적 전통의 창시자의 위치에 올려놓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철학적 사고는 전통적인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도 필자는 그와 같은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사상은 일부 범신론적 철학이 그 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글은 누구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질적 판단을 떠나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존경받는 인류가 배출한 위대한 과학자의 하나님에 관한 인식과 고백을 다루려는데 목적이 있다. 그가 철학자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철학은 구원 계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연 은총 속에 있는 자연 계시의 일부일 뿐이다. 그가 인간과 달리 하나님의 존재는 영원한 진리이자 절대적인 필연성을 가지며 따라서 모순율의 지배를 받는다고 한 것은 철학자가 찾을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신앙 고백이었다. 그 나머지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 십자가 신학과 신앙 고백은 당연히 성경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종교개혁자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었다.

지난 1995년 10월말 기독교 한국루터회(루터회 총회는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 개혁 주일로 정하고 있다)는 종교개혁 478돌을 맞아 <세계를 빛낸 루터란>을 선정 발표한 적이 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와 최초로 한국을 방문한 독일 출신 개신교 선교사 구출라프(1803-1851), 두 차례에 걸쳐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던 본 회퍼 목사(1906-1945), 음악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 변증법으로 유명한 헤겔(1770-1831), 덴마크의 시인이자 국민교육자 니콜라이 그룬투비 목사(1783-1872), 덴마크의 유명한 동화작가 안데르센(1805-1875), 낭만파 작곡가 멘델스존(1809-1847), 유명한 기독교실존철학자 키엘 케골(1813-1855) 등이 선정 되었는데 라이프니츠는 당당히 첫 번째 순번의 루터란으로 선정되었다. 루터교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오늘날 루터도 복음주의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일부 가톨릭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루터를 하나님이 쓰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개신교인이 있는가? 또한 루터란들을 개신교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는가? 라이프니츠에 대해서도 글쓴이는 독자들이 그런 눈으로 보아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볼 때 천재로서의 라이프니츠의 신앙은 그의 성격과 통하는 요소가 있다고 보여 진다. 즉 다재다능한 천재였던 그는 신앙조차도 가톨릭, 개신교 가릴 것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종합하여 조화하려고 시도를 할 만큼, 누구도 감히 꿈조차 꾸지 못했던 과감한 시도를 가능케 한 천재적 사고의 소유자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천재 중의 천재,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가 넘나든 분야는 수학과 종교와 법학과 철학 이외에도 역사, 정치, 문학, 논리학, 형이상학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뛰어난 계산기를 발명하기도 했다. 파리 주재 외교관으로 일할 때였다. '라이프니츠 같은(as like as Leibniz)', 잘 쓰이지는 않지만 이 말은 특급 천재라는 의미를 지닌 관용구다. 잘 쓰이지 않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도무지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와 필적할 만한 인물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대체 얼마나 뛰어났기에 그럴까. 이진법 산술체계를 개발해 컴퓨터를 비롯한 디지털 문명의 기초를 닦고 미분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조차 극히 일부의 업적일 뿐이다. 수학자이며 철학자ㆍ신학자ㆍ법률학자ㆍ물리학자인 동시에 정치인ㆍ외교관으로도 이름을 날린 그는, 독일어와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심지어는 한자의 독해까지 가능했다고 한다. 과학의 기본 법칙인 에너지보존법칙을 최초로 예견한 것도 그였다. 이런 그를 두고 후대의 '학문 군주' 프리드리히 대제는 이런 평가를 내렸다. 그는 '대학 그 자체'다.

그의 사고의 폭과 넓이를 헤아린다는 것은 실로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는 신이 선하다면 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인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성의 진리를 선험적(先驗的, a priori)인 것으로서, 경험에 선행하거나 그것과 독립되어 있는 생득적 지식으로 보았다. 그리고 사실의 진리는 후천적(後天的, a posteriori)인 것으로 보았는데, 논리나 수학적 추론이 아닌 제한된 시간 속에서 경험으로부터 추출되는 지식으로 보았다.

이런 다재다능한 라이프니츠의 말년이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지극히 범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은 조금은 신기함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마지막이란 결국 대동소이할 뿐이다. 이게 바로 인간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역시 천재 중 천재임은 맞는 가보다. 오히려 라이프니츠의 천재성과 독특한 신앙적 통찰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조명을 받고 있으니, 그는 정녕 사후의 훗날까지도 내다보았던 팔방미인이 아니었을까? 그는 정말 탁월하고 훌륭한 루터란이었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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