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성경으로, 복음으로 돌아가기 보다, 정치적, 사상적 개인주의, 자유주의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아젠다를 마치 복음처럼, 성경처럼 여긴다. 그리고 자신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아젠다에 따르지 않는 이들은 이단처럼 심하게 멸시하고 경멸한다. 하지만 개인주의, 자유주의는 결단코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아젠다를 마치 복음처럼, 성경처럼 설파하는 것에 탄식할 뿐이다.

기독교는 개인을 강조하지만, 개인주의는 아니다. 타자를 위한 희생을 강조하는 기독교가 어떻게 개인주의가 될 수 있겠는가? 기독교는 양을 위해, 친구를 위해, 심지어 원수를 위해서까지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종교다. 교회의, 기독교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본을 보이셨다. 그런데 어찌 기독교를 개인주의적 종교라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세속문화, 세속이념과 사상과 가치관의 영향을 받아 교회가 개인주의로 매몰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성경이, 예수님이 가르치고 살아내셨던 것과 역행하는 것으로, 비기독교적, 비성경적, 비복음적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혼자 살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그 속에 사셨다. 제자들과 같이 먹고, 같이 입고, 같이 자고, 같이 살면서 동고동락하셨다. 모든 것을 제자들과 함께 하셨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a),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고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분은 제자들 가운데,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그래서 제자들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었다. 기독교에서 개인은 매우 매우 강조되지만, 기독교가 개인주의의 종교가 될 여지는 하나도 없다.

또 기독교는 자유를 강조하지만, 자유주의는 아니다. 사전적 정의로, 자유주의는 자유 사상을 최상의 정치·사회적 가치로 삼는 역사적 전통이며, 사회철학적 관점이자 이념이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그 뿌리를 보면, 사상적, 철학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로부터,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찾으면서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에 대한 강조에서 벗어나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며 인간의 무한한 자유를 옹호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개척하겠다는 것이 자유주의의 그 기본 뿌리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이것이 중세교회에 나타났던 비극이었다), 그것에 대해 반발하면서 무신론이나 사신론, 살신론으로 빠지면 더 큰 문제가 생긴다.

모든 자유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로부터, 성경으로부터, 복음으로부터 자유를 외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유주의 신학'이라 하면 거품을 무는 기독교인들이,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한 없이 옹호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매우 기이한 일이다.

정치적으로도 미국에서 좌파를, 민주당 지지자를 리버럴(liberal)이라고 한다. 자유주의자라는 말이다. 미국의 좌파, 민주당 지지자는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노래하고 동성애와 동성결혼, 낙태 등을 옹호하며 기독교 정신으로 태어난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정신과 가치를 무너뜨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리버럴인가?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지켜야 할 원칙과 가치를 가진 이들이다. 그래서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지금 치열하게 자유주의자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데, 한국의 기독교인들 중에 일부는 스스로 자유주의자라 열심히 노래하고 있으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상적, 철학적 빈곤이 낳은 우스꽝스런 모습이고, 자신도 진지한 철학적 고민 없이 그저 다른 사람들의 말에,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에 선동되어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볼 문제다.

자유는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이것은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다.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유다. 사람이 공기 없이 단 한 순 간도 살 수 없듯이, 자유 없이도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 예수께서도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오셨다. 하지만 이것은 죄로부터, 사단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지, 하나님으로부터, 교회로부터, 성경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로, 교회로, 성경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자유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악마시하면서 지나치게 개인주의,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악마에게 다른 한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오늘날 원래 기독교 사회였던 서구 사회를 완전히 망친 주범 중의 하나가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다. 중세의 교회도 매우 잘못되었지만, 계몽주의적 풍조도 극단적이기는 매한가지였고, 지금과 같은 몰락을 가져왔다.

기독교인들이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지 못하고, 사람들이 떠드는 것에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지 못하고 마치 유행처럼 동조하고 앵무새처럼 따라할 때, 교회는 물론 사회의 혼란과 분열과 갈등, 싸움을 부채질하게 된다.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이 딱 그렇다. 페이스북과 유튜브에 들이는 시간을 줄이고, 말씀과 기도에 더 시간을 들이라.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나라와 민족, 그리고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라.

성경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고, 또 복음을 전해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하셨다. 이 시대의 해법, 한국 사회가 가진 문제의 해법은 세속적 철학과 이념, 사상을 가지고 논쟁하고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더 열심으로 교회가 할 일, 기독교인들이 할 일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성경으로,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원수도 사랑해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셨던 길이다.

기독교인들은 특정 이념, 특정 정치세력에 맹목적 지지를 보내기 보다,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을 강조한다고 악마가 아니고, 사회를 강조한다고 악마가 아니다. 자유를 강조한다고 악마가 아니고 평등을 강조한다고 악마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이즘'(ism)'이라고 하는 이름의 높은 견고한 진으로 나타나면, 좌와 우의 진영논리를 넘어서 기독교인들은 치열하게 싸워서 무너뜨려야 한다. 그것이 지옥 문을 여는 악마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이고, 그래서 그릇된 길로 빠질 수 있다. 그들을 사랑으로 품고, 진리를 가르쳐 하나님께로, 교회로, 성경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갈 길이다. 그 길에 빠졌다고 왕따하고, 마녀사냥하고 죽이는 것은 바리새인의 길이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자신도 지금 그릇된 길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너무 깊숙이 빠지지는 않았는지 한 번 진지하게 돌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