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진리와 민족을 위한 순교적 자기희생적 삶을 보여줌.

1) 기독교 선조들의 자기 희생적 정신

3·1독립만세 운동은 오늘날의 군중 시위와는 달리 일제의 강압적 무단 정치 속에서 일본 헌병경찰들이 반일 민중들에 대하여 강력한 박해, 체포, 구금, 고문, 심지어 살해까지 감행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위태로운 처지에서 우리 선조들과 민족의 지도자들은 자기 헌신과 희생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위대한 이웃사랑을 실천하신 분들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더욱이 민족 대표들이 33인 서명록에 자기 이름을 올리는 것은 살생부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며, 일제 통치하에서 자기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상실하는 것이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이러한 목숨이 위험한 상황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위대한 사랑의 행동이다. 기독교는 비록 외래종교였으나 신자들과 지도자들은 3·1운동 참여를 통하여 자기 희생적 정신과 삶을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조선 민족의 심층 속에 기독교가 박애의 종교요 민족을 이롭게 하는 종교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이러한 각인은 130여년 지난 오늘날 기독교가 불교나 유교를 제치고 한국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제1종교가 되게 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이러한 순국(殉國)적 정신이 요망된다. 정치가는 정치를 통해 국민생활을 도와주어야 한다. 정치가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정치가 목적이면 국가주의가 된다. 국민이 불안해 진다. 정치는 국민이 잘 살기 위한 수단이어야 한다. 정치가는 당리당략을 앞세우는 파당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기업가는 기업을 통해 우리 사회에 경제적 혜택을 주는 자가 되고, 기업 이윤 자체는 수단이 되고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육자는 교육을 통해 모든 국민의 정신을 일깨워주며, 지식 전달은 수단이며 인격 함양과 인재 육성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국민생활에 정신적 행복을 줘야 한다. 예술은 인간미 넘치는 사회정서와 인간성 실현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오늘날 대한민국은 선진 질서사회로 갈 수 있다.
       
우리 모두 선진 질서사회로 가기 위해, 앞으로 통일한국을 세우기 위해, 3·1운동으로 시작한 국민적·국가적 에너지를 묶어 마음을 열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3·1운동의 정신이고 우리 민족이 가야 할 길이다.

2) 이회영 기독교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기독교 지도자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자가 한일밥방이 되자 가진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만주 무관학교를 세운 우희영 선생과 그 가문의 대표적인 희생정신이다. 그의 가문(家門)은 백사 이항복이 그의 10대조였으며 그 후로 9대조를 제외하고 가문 모두가 정승, 판서, 참판을 지낸 나라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왕조국가에서 근대 시민국가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평소 개방적이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남달랐던 선생은 명예나 지위 욕심이 없어 관직을 거부하고 민중의 계몽과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힘썼다. 본래 상당한 영향력을 소유한 명문가에다 재산도 어마어마했다. 당시 이회영 선생의 집안이 독립운동을 위해 급하게 처분하고 간 재산은 약 40만원 상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현 시세로 환산하면 650억 원에 이르고 당시 시세로 소 13,000마리를 살 수 있었던 거금이었다. 선생의 7형제 중 6명과 일가 50여 명은 경술국치를 전후로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넘어갔고 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 엄청난 재산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학교를 세우느라 8년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해방 후 조국 땅을 다시 밟았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 명에 불과했다. 이회영 선생과 함께 만주로 건너갔던 6형제 중 살아서 광복의 기쁨을 마주한 이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밖에 없었다. 만주로 넘어가기 이전에도 선생은 활발하게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898년에는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민중계몽 운동을 벌였고 안창호 선생, 전덕기 목사와 함께 비밀결사단체 신민회의 주축으로 활동했다. 이상설 선생, 이동녕 선생을 통해 서전서숙 설립을 돕고 상동교회의 상동 청년학원 개설에도 함께하는 등 민족 교육에도 땀을 흘렸다. 해방 후 조국 땅을 다시 밟았을 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 명에 불과했다. 만주로 넘어간 이후 선생은 주로 무정부주의에 근거해 무장독립운동 활동을 펼쳤다. 재 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항일구국연맹 등을 조직하고 한반도와 중국, 일본을 넘나들며 독립의지를 알릴 의거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청산리 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했던 신흥무관학교도 선생이 만주에 남긴 흔적이었다. 그가 남긴 말은 세계 경제 대국으로 나라의 존재감을 찾고 3·1운동 백주년을 맞는 오늘날 우리 후손들에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려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 있는가." 이 정신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에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정신이다.

이러한 이회영 선생 일가를 독립운동을 이끈 노블리제 오블리주 정신 실천에는 기독교 신앙이 있다. 그는 유력가문의 양반자제였음에도 남들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남대문시장 상인들이 다니던 상동교회를 다녔다. 그는 그곳에서 복음을 듣고 회심한 후 신앙을 키웠다. 그는 65세에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눈을 감기까지 크리스천으로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았다. 그는 평생을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고 영향력도 상당했음에도 어떤 단체나 모임에서 장을 맡은 일이 없을 정도로 겸손했다. 그는 상동청년회와 함께 민족정신을 품은 기독교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상동청년학원 학감(교감)을 맡았고 상동교회 담임이었던 전덕기 목사와 함께 상동파로 불리며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단체 신민회의 창립 역시 이회영 선생이 속한 상동파와 크리스천들이 중심이었다. 감신대 교수 이덕주는 이회영에 대해 설명한다: "권사 직분을 갖고 상동교회에 다닌 우당 이회영 선생은 아래로부터의 민족운동을 실천했던 사람이다." "그가 명문가 출신 양반이면서도 엘리트 의식을 갖고 낮은 자리에서 서민들을 섬기며 민족을 위해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신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상동교회의 담임 목사 서철은 피력한다: "이회영 선생은 상동교회에서 상동파를 형성하고 대한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항일무장투쟁의 전위대이자 자유정신의 아나키스트셨다." "세상의 재물과 명예를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더 가치있는 것에 목숨을 걸었던 우당 선생 같은 신앙인 한 사람만 있으면 대한민국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희영 선생의 항일 무장 투쟁론이란 반 기독교적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개혁신앙 전통이 말하는 정당한 전쟁(just war)론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일본이 무력으로 국모 민비를 살해하고 고종 황제로부터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9. 공산주의 세력과 단절

일제 강점에 의한 국권 침탈과 수탈은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의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 사상이 민족 좌절감과 절망감에 빠져 있는 한국사회에 스며들 수 있는 풍토를 조성했다.  볼세비키 혁명직후 1918 이동휘를 중심으로 소련의 도움을 받아 한인사회당이 만들어 질 때 강령 가운데 제1조는 "사회주의 국가를 조직한다"였다. 파리 강화회담이 실패로 돌아가고 윌슨의 임기가 끝난 후 미국의회는 국제연맹에 가입하자는 안견을 부결시키고 미국은 다시 고립주의로 되돌아 갔다.  당시 신흥국가요 다른 민족과의 구원(舊怨)이 없는 미국의 민족자결주의 이상은 약소국가들(이집트, 알메니아, 이슬람 국가, 인도, 중국 월남, 한국 등)에 의하여 환영을 받았으나, 당시 1917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은 러시아가 가진 구원(舊怨) 때문에 국제사회에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이 고립주의로 돌아가자 1919년 3·1운동과 같은 시기에 소련 레닌의 콤민테른(공산당 국제화)은 민족자결론을 앞세워 약소민족들을 공략, 공산주의 수출에 나선다.

1920년 이동휘가 소련과 접촉하여 레닌은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 200만 루블을 주기로 하고 이동휘가 파견한 한형권에게 먼저 40만루블을 건넸다. 그때 맺었다고 알려진 한러비밀조약에는 "노농정부와 전 세계인류가 요구하는 공산평등주의를 동양에 선전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에 찬동하고 공동보조를 취한다"고 되어 있다. 이동휘의 비서장 김립은 중간에서 자금을 빼돌렸다. 김구는 사형을 지시했고, 김립은 탄알 일곱 발로 사살(射殺)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통합되면서 '노령정부'의 공산세력이 헤게머니 쟁탈에 돌입한다.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한국 대표단 52명이 몰려갔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공동 단장을 맡았다. 김규식은 대회 연설에서 "극동의 피압박 인민과 혁명 조직은 함께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만세!"라고 외쳤다. 이들은 레닌의 거액공작금을 받아 자유민주세력 이승만 대통령을 축출하고 임정을 장악하려 한 것이다. 그때부터 한민족의 좌우 이념투쟁이 시작되었다.

1923년에는 임시정부가 공산주의로 기울기도 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어려웠던 임정 상황을 회고한다. "임시정부 세운 지 3, 4년이 지나면서 열렬했던 독립운동자들이 하나둘씩 왜놈에게 투항하거나 귀국했다. 한때 천여 명에 이르던 독립운동자들이 점점 줄어들어 수십 명에 불과하니, 최고 기관인 임시정부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상해에선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공산주의자인 통합임정 국무총리 이동휘는 정무회의에서 "나는 그 대통령(이승만) 밑에서 일 안 하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신채호·박용만 등은 이승만을 반대하고 베이징으로 떠났다. 민족주의자 이동녕은 안창호에게 임정을 필리핀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임시정부 문제를 논의했다. 정부 조직을 개편하자는 '개조파'와 정부를 아예 새로 만들자는 '창조파'가 대립했다. 김구는 국민대표회의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6월 6일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한 김구는 "대표회 자체의 즉각 해산을 명한다"는 '내무부령 1호'를 공포했다.

김구는 임정(臨政)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그는 공산주의와는 선을 그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어느 날 이동휘가 김구에게  말했다: "적은이(아우)도 나와 같이 공산혁명을 하는 것이 어떠하오?" "공산혁명을 하는데 제3국제당(코민테른)의 지휘명령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하여 김구는 단호하게 말했다: "불가능하오."  "우리 독립운동이 어느 제3자의 지도 명령의 지배를 받는 것은 자존성을 상실한 의존성 운동입니다.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씀을 하심이 옳지 못하니 선생의 자중을 권고합니다."  "이동휘는 불만스러운 낯빛으로 나와 헤어졌다." 이즈음 이승만이 발표한 '공산당의 당부당' 논문(1923)은, 마르스크 공산당선언과 레닌의 폭력혁명선언에 정면 대항하는 세계최초의 '반공선언'이었다.

공산주의는 러시아, 중국, 일본을 통하여 세 가지 경로(이루쿠츠크파, 상해 또는 서울파, 일본 유학생파)로 침투되었다. 이 세 파를 통하여 1925년 제 1차 조선공산당 조직에 성공하였다. 당시에 공산주의자들은 독자적 민족운동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초기에는 레닌의 지령을 받아 대체로 타협적 민족운동이든 혁명적 민족운동이든 반대하지 말고 합작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조선공산당은 1925년 10월 합작운동에서 갑자기 정책을 바꾸어 반기독교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조선청년총동맹" 산하의 "한양청년연맹"이란 좌익단체가 1925년 11월에 8일간 열린 제2회 조선주일학교대회에서 반기독교강연회를 열었다. 대회 도중 11월 27일 갑자기 공산계열의 반기독교운동의 광고가 나붙고 전단이 뿌려졌다. 그러자 주일학교 대표들이 순서 집행을 중단하고 반기독교 강연장으로 몰려가 광고물을 찢고, 좌익들과 충돌하여 큰 소동이 일어났다. 조선공산당은 1년 뒤인 1926년 12월 긴급집행위원회를 열고 성탄절을 '반(反)기독교날'로 제정하고 맹렬한 반기독교운동을 조직적으로 한다는 중대결의를 하게된다. 그리하여 공산주의자들은 무신론자들로서 교회를 비판하였음으로 교회에 침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 총독부도 공산주의 활동을 금하였음으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 만주와 러시아로 떠났다. 기독교 민족지도자들도 중국, 만주, 러시아로 망명했으나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공산주의자들과는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오늘날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남북 모습은 밤과 낮처럼 확연히 다르다. 공산왕조체제를 지닌 북한은 반(反)역사적이다. 북한의 선전 매체 '민족끼리'는 "3·1 민족 봉기는 외세(外勢) 의존에 물젖은 상층부들이 구차스러운 방법으로 독립을 얻으려고 시도하다 실패했다"고 깎아내렸다. '김일성 중심 사관(史觀)'대로다. 오늘날 북한은 5개 정치범 수용소를 두고, 최소 8만명에서 최대 12만명을 수용하고 있으며,  김일성(할아버지)·김정일(아버지)·김정은(아들) 3대가 세습통치하고 있다. 세습 독재로 주민의 인권을 말살하는 오늘날의 북한사회는 100년 전 일제 군국주의 노예의 사슬을 깨뜨리려 궐기했던 3·1절 선조들이 외쳤던 민주 자유 평등 국가의 모습일 수 없다.

10. 교회의 공신력 높아짐: 사회적 지도력의 위상 가짐.

1919년 일본총독부의 한국교회 탄압은 교회를 말살하기는커녕 오히려 급속한 성장을 초래하였다. 3·1운동 후 일반대중들은 물론 양반계급과 지식인 계층까지 교회를 쳐다보았고, 교회 의 지도력을 존중하고 인정했다. 이들은 교회가 항상 민족의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기독교는 교회라는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으며,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언급한대로 기독교 인사들은 당대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애국자가 된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당시 국민들은 3·1운동에 참가한 기독교인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당한 엄청난 박해와 희생을 목격하고 이들을 영웅시하고 순교자로 생각하였다. 기독교는 여태까지 외래종교라는 멸시의 대상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민족에 독립을 가져다 주는 선한 종교로 여기게 되었다. 민족 대표 33인을 배출한 천도교·기독교·불교는 조선시대에 배척받거나 천시됐다. 하지만 이들 종교는 민족운동의 대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관리와 양반 출신의 인물들이 근대화와 교육과 의술(醫術)을 가져온 기독교에 입교해 기독교는 근대적 국민이 주도하는 종교 단체로 변모했다. 3·1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기독교 단체나 일반인이 운영하는 보통학교와 중학교·고등보통학교, 전문학교, 일본과 중국 등지의 대학에서 수학하면서 서구의 근대적 기독교 사상을 수용했다. 지역적으로는 평안도를 비롯한 서북 지역 출신이 많았는데, 이 지역 국민 중에는 '자립적 중산층'이나 자본가로서 기독교인들이었다.

당시 기독교인은 인구의 1.5%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거대한 민족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그런데 오늘 기독교 인구는 20%에 육박한다. 그러나 사회적 영향력은 그때와 비교해 보면 빈약하다. 안타까운 현상이다. 당시는 독립운동이었고 일제의 총칼에 의한 박해가 있었으나 이를 감수하고 한국교회는 참여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사회적 참여(반동성애, 반낙태 운동, 북한 인권 및 탈북민 지원 운동 등)에서 당시의 어려움이 없으나 사회적 책임감, 사회적 신뢰도에서 당시보다 뒤떨어지지 않나 생각된다.

11. 한국교회의 하나 됨 실현: 교파주의 교회 아닌 하나의 그리스도 몸 된 교회

3·1운동에서 한국교회는 하나의 교회라는 사실을 실현하였다. 한국선교 초기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두 선교회는 하나의 한국교회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결국은 이루지 못하고 교파주의 교회가 되어버렸다. 각기 자기 교파의 확충을 위하여 경쟁했으며 그러나 3·1운동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하나라는 의의(意義)가 다시 표면화되었고  실현되었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는 3·1 운동 봉기를 오산학교 교장인 기독교의 이승훈과 의논했다. 장로교 지도자 이승훈 장로는 감리교회 지도자들과 협의해서 추진을 결정하겠다고 대답하고 실천하였다. 그래서 3·1운동은 어느 교파가 주도권을 쥔 것이 아니라 협력하여 이루어졌다. 33인 독립선언서 서명자들 가운데 기독교 대표자는 16명(장로교 7명, 감리교 9명)으로 함께 민족의 대표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3·1운동 참여에서 장로교와 감리교는 하나가 되었다.

북장로교, 북감리교, 남감리교의 네트워크를 통해 33인 민족대표 가운데 16명이 가담했으며, 교회와 학교들이 있어 인적 자원을 정교하게 동원해 만세시위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서울지역 3개 교단 소속 교회는 연합단체인 YMCA 등과 유대 관계를 맺었고, 나아가 3.1운동을 통해 큰 규모의 연대를 이어갔다. 각 교단이 네트워크로 구성돼 포물망으로 3.1운동이 불붙듯 번져갔다. 당시 감리교회는 연희전문, 이화학당, 배재학교 그리고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3.1운동 모의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장로교회 역시 3.1운동에 적극 참여해 수난을 당했다. 당시 연동교회는 대표적 3.1운동의 거점기지 역할을 했다.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옥에 갇혔던 김 마리아를 비롯해, 김백원, 함태영, 이혜경, 정선희, 이정숙, 김영순, 신의경 모두 연동교회 교인이었다.

3.1운동 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각기 교파의 주도권을 추구하는 교파주의 교회로 선교활동했으나 3.1독립선언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한 민족 안에서 하나됨을 실현하였다. 장로교와 감리교 지도자들과 교인들은 함께 독립만세에 참가하여 민족의 자존감을 드러내었고, 일제 헌병 경찰로부터 박해받고 피해를 함께 입었다.

12. 선교사와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3·1운동과 한국 존재가 국제사회에 알려짐

일본의 국제외교로 인하여 한국민족의 존재와 독립 권리는 당시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이 때에 한국교회는 기독교적 네트워크를 통하여 한국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해외로 나간 한국 주재 선교사들과 YMCA운동 지도자들, 국제선교협의회, 세계주일학교 연맹 등 국제 기구를 통하여, 그리고 해외에 나간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통하여 3·1독립운동과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재가 해외에 알려졌다. 이러한 방식으로 한국교회 선교사들은 국권이 상실된 식민지배 하에서 한국민족의 존재와 정체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대변자의 역할을 하였다.

3·1운동은 일본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는 것에는 실패했고 교회는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나라의 존재와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는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에는 미국 및 캐나다 선교사들을 통하여 세계로 연결된 네트워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독립시위에 나선 군중들을 다루는 일본경찰의 비인간적 야수적 방법은 전 세계언론과 양심의 규탄 대상이 되었고 일본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谷川 好道) 총독을 경질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한반도 통치에 대한 일본의 식민정책과 방법을 재평가하게 되었고 많은 양보를 이끌어내었다. 그리고 조선인들도 스스로 당시 세계 5대강대국에 오른 군국주의 일본과 싸운다는 것은 자살행위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1운동의 전민족적 단결시위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민족을 위한 희생정신과 인내심과 나라사랑과 충성심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문제 위위원회는 3·1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한 한국교회에 대하여 1919년 4월 30일 다음같이 평가하였다: "...다수의 목사, 장로 및 학생, 이름 있는 평교인들이 지금 감옥에서 형고를 겪고 있다는 것이 바로 예수교의 영향이 전국에 미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라 봅니다. 예수 교인만이 현시점에서 국제정세에 정통하여 민족 자결의 횃불을 들겠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예수교인만이 참혹한 식민정책에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유일한 부류의 한국민이 올시다."  3·1운동은 한일합방 후 10년 동안 쌓이고 쌓인 민족적 수치를 말끔히 씻어 버리고 국제사회에서의 한국민족의 자존감을 회복하였다.

13. 기독교 교단의 협력 및 타종교와의 공존

3·1운동은 종교운동이 아니라 애국운동이었다. 그래서 모든 종파, 즉 기독교, 불교, 천도교, 대종교 등이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3·1운동에서 일치와 협동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기독교인 장로교와 감리교는 전통종교인 천도교, 불교와 협력했다. 3·1운동 직전 단계에서는 평양의 선우혁(鮮于赫)과 서울의 이갑성(李甲成)에 의해 기독교 중심의 독자적 독립운동이 준비됐고, 1919년 2월 이승훈 장로에 의해 천도교와 불교가 합류해 거족적 운동으로 확대 발전했다. 3·1운동에 영향을 미친 일본 도쿄 2·8독립선언 역시 주체는 학우회였지만 실체는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3·1운동은 처음에는 천도교와 기독교에 의하여 따로 따로 추진되었다. 천도교의 경우 교주 손병희가 2·8선언의 사실을 듣고 이에 찬동했다. 그러나 그의 참모들은 천도교만으로는 동원력이 부족하니 기독교와의 협력을 제안했다. 당시 천도교는 신자수는 무려 3백만명이었으나 동원력이나 조직력에서는 기독교보다 훨씬 약했다. 당시 기독교 신자수는 234,703명이었으나 조직력이나 의식화 및 동원력에 있어서 천도교를 훨씬 능가했기 때문이다.

천도교측의 최남선은 기독교측의 이승훈을 만나서 공동운동을 제안하였다. 이승훈은 오화영, 박희도, 정춘수 등 기독교 인사들과 비밀회의를 하여 "우리는 이 기회에 종교와는 관계 없이 국민의 자격으로 할 것이다"는 결정을 하였다.기독교는 3·1운동을 초교파, 초종교적 이념의 민족 독립운동으로 간주하여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왜 타 종교와 함께하느냐'며 부정적인 분들도 있었지만 남강과 (3·1운동을 막후에서 주도한 독립운동가, 법조인, 정치인으로 목사가 된) 송암(松岩) 함태영(咸台永)이 설득하면서 앞장섰다.

남강은 기독교 신앙의 넓이와 깊이를 가진 분으로 타종교 지도자들을 포용한 큰 그릇이었다. 남강은 천도교, 불교 지도자들과 종교합작을 주도하였다. 3·1운동 막바지에도 다시 독립선언론과 독립청원론이 팽팽하게 맞붙어서 합작이 결렬 위기에 이르게 되자 이승훈, 안세환, 함태영 등 평신도들이 목회자들을 설득하여 전체적인 방향을 선언쪽으로 규정하는데 성공하여 이로써 기독교와 천도교의 합작이 이루어졌다.  특히 "당시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지도자들이 제목을 '독립선언서'로 할 것인가, 아니면 '독립 청원서'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나뉘었다. '독립 청원서'로 하자고 주장한 목사들은 일제의 침략을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고 회초리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독립선언서'로 하자고 주장한 목사들은 '누구에게 독립을 청원할 것인가'라며 독립선언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이 논란에 있어서 남강이 선언론과 청원론 두 가지를 포괄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당초 독립선언문 발표 시기가 고종의 장례식 때문에 3월 2일이 추진됐지만, 그날이 주일이었기 때문에 천도교의 양보로 3월 1일이 결정됐다고 한다. 민족대표 33인 중 일부 목회자는 천도교와 함께 운동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어 선언문 발표 현장에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선언문에 서명하고 만세시위를 계속해서 독려했다. 대승적 참여였다. 당초 독립선언서 발표 장소로 탑골공원을 예정했지만 학생들이 모일 거라는 소식에 청년들에게 닥칠 불상사를 막기 위해 태화관으로 급히 장소를 바꾸었다. 민족대표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와 양보, 배려를 솔선수범했다. 종교의 차이는 독립이란 대의(大義) 앞에 아무 장애가 되지 않았다. 진정한 종교는 교리가 우선이 아니라 공동선이요 대의가 우선이다. 이것은 기독교 정신과 통한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잠 21:3).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잠 21:21).   

14. 민족운동이었으나 박애, 자유, 평등, 타종교와 협력, 세계평화 등 인류보편주의 지향

3·1운동을 일으킨 우리 민족의 정신은 온 민족이 단결하여 조국의 자주 독립과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고 나아가 인도주의와 세계 평화를 실현하려는 정신이다. 독립선언서는 자주독립사상, 자유평등사상, 민족주의사상, 인도주의사상, 세계평화사상 등을 대외에 천명한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선포한 것은 대일본정부에 보내는 통고문 성격이었으며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하는 독립청원서로서 조선의 자주독립사상을 기초로 명시한 것이었다.

3·1운동의 주역인 남강은 철저하게 예수 정신으로 비폭력적 방법을 따랐다. 예수 정신은 독립운동의 방법론만이 아닌 그의 행동의 양식이었다. 예수 정신은 비폭력이 전술전략이 아니라 신앙의 실천이었고 원수 사랑이었다. 이승훈 장로는 민족주의를 넘어선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조선의 독립은 조선만이 아닌 일본과 중국까지 포함하는 주변국과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그는 평화 안에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비폭력은 원수까지 녹여내는 사랑이었다. 비폭력 사랑과 평화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이승훈 장로 같은 폭넓은 지도자가 있었기에 (천도교와 불교 지도자들과 함께하는) 3·1독립선언이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민족자결주의와 평화운동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이며 인류가 줄기차게 추구해온 생존운동이었다. 스위스 출신 독일 천주교 신학자 한스 큉은 『세계윤리구상』(Weltethos)에서 제안하기를 "세계 윤리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Kein Überleben ohne Weltethos).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의 평화는 불가능하다.(Kein Weltfriede ohne Religionsfriede). 종교 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 간의 평화는 불가능하다.(Kein Religionsfriede ohne Religionsdialog)."고 했다. 최근에 와서는 그는 세계 종교에 대한 기초연구 없이는 종교 간의 대화는 불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종교 간의 대화와 평화를 위해서는 종교학적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타종교를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타종교의 경건성과 도덕성을 인정한다. 공공선과 사회의 도덕성을 위하여 고등종교와 협력할 수 있다. 인류보편주의는 기독교 복음의 유일성과 배치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유일성은 인류보편주의와 부합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유일한 대속자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갖는다.

15. 3·1운동 후 한국교회는 비정치적이고 내세주의적 신앙으로 흐르게 되었다.

3·1독립 만세운동은 일제 경찰의 강제 진압에 의하여 좌초되었다. 한국교회는 3·1운동의 실패와 좌절 후에 비정치적이고 내세주의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는 3·1운동이 의도하지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한국교회에 미친 부정적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민족 독립의 서광은 보이지 않고 교회는 일제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고 독립운동은 실패와 좌절로 끝났다. 이러한 한계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는 정치적 운동을 통한 현세적 해결보다는 미래적이고 종말론적 해결을 모색하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1920년대 들어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하는 종말론적 설교를 선호하게 되었다.

선교초기부터 한국교회는 보수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미국선교사에 의해서 창립되고 지도받았기 때문에 초기부터 내세적이고 보수주의적인 경향을 취해왔다. 당시 선교사들도 일본 총독부와의 마찰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비정치화 작업을 지속적으로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너무 급속히 뭉치지 말고, 정치화하지 말고, 세력화하지 말라고 설득하였다.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분노의 힘이 속에서 내연(內燃)하면 반드시 외연(外燃)해서 폭발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일본으로 하여금 박해의 구실과 수난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비정치화 운동이 나오게 되었다. 이 운동은 1907년의 신앙대부흥운동에서 1)영적 각성운동 2) 성경 읽기 운동 3) 도덕운동으로 금주운동, 도박안하기 운동 4) 새벽기도회 운동 5) 사경회를 통하여 신앙부흥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이 때 길선주, 김익두 같은 대 부흥사들이 배출되었고 1905년부터 1907년까지 2년 동안 교인이 200%이상 증가되는 부흥이 일어났다. 1907년 대부흥운동에서 기독교로 회심한 지도자들은 독립협회가 강제해산이후 비밀결사조직인 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평북 이승훈, 평남 안태국, 횡해도 김구, 함경도 이동휘, 안창호, 전덕기), 1912년 105인 사건, 그리고 1919년 기미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민족운동을 신앙운동으로 전개하였다. 105사건이란 신민회를 타도하고 배일 사상이 강한 선천 정주 평양 등 서북출신 기독교 지도자 제거를 위해 데라우치 총독 살해 음모사건으로 날조한 사건이다.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고 출옥한 인사들 상당수가 기미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의 강한 탄압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민족 독립운동을 신앙운동으로 간주하고 3·1운동에 전교회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3·1운동 후 독립운동에서 실패와 좌절을 맞본 후 한국교회는 정치적 활동에서 벗어나는 비정치화의 길을 걷게되었다. 이는 독립운동을 포기한 것이라고 보다는 방법을 세상적인 방법보다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의 방법을 추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일제 군국주의의 종식은 하나님의 간섭에 의하여 초래되는 것으로 염원한 것이었다. 민족적 위기 속에서 교회가 답을 주어야 한다는 한국교회의 역사적 신앙적 책임의식은 3.1운동 전과 같이 후기에도 방법만 달라졌을 뿐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비정치화 작업의 일환이란 3·1운동 직후 장로교와 감리교는 대약진 운동으로 부흥운동을 하였다. 이 때의 설교 내용은 "죄와 회개, 믿음과 장차 올 심판 "등이었다. 교회로 하여금 종말론적 전향으로 몰아간 것은 옥중 신자들의 신비적 체험이었다. 대표적 예가 3,1운동의 33인 대표 중 한 사람인 길선주 목사였다. 그는 3·1운동 대표자로 독방에 갇혔고, 감옥에서 구약을 일곱 번, 신약을 세 번 읽었다. 특히 요한계시록을 8백 번 읽어서 거의 암기하다 싶이 했다. 석방 후에 그는 사경회를 인도했는데 요한계시록을 강의했고, 그의 계시록 해석은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전천년주의 해석이었다. 그는 재림신앙을 강조하였고 예수의 재림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비정치화와 종말론적 신앙은 1930년대와 40년대 중엽 일제 말기에 이르기까지 일본 군국주의에 의하여 박해를 받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지도록 하였다. 이렇게 된 것은 한국교회가 박해의 암울한 시대를 통과해 나가는데 필수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신앙적 형태의 한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