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리더는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한국교회 리더는 글을 써야 됨을 중요하게 여기거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글을 쓰지 않고도 설교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글을 쓸 줄 모르면 리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글을 쓸 줄 모르면 리더로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교회 리더가 글을 쓸 줄 안다고 할 때, 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은 '논리적 글쓰기'를 할 줄 한다는 뜻이다.

논리적인 글을 쓸 수 있을 때, 설명, 이해, 설득, 공감, 납득하는 설교를 할 수 있는 기본을 갖추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글을 쓸 줄 아는 것이 교인에 대한 예의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글쓰기는 리더의 여부를 결정한다

설교자가 글을 쓸 줄 모르는 것은, 엄밀히 말해 설교자의 책임이 아니다. 이는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요, 신학 교육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교를 하면서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우리나라 학교 교육은 쓰기 교육이 아니라, 암기 교육이다. 읽기 교육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데 쓰기 교육은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나라 교육이 쓰기 교육이 아닌 것은 이유도 모르고 암송하게 하는 노예교육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지성은 그의 책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 교육을 귀족 교육과 노예 교육으로 구분한다. 귀족 교육과 노예 교육의 차이는 하나다. '글을 쓰도록 가르치는가?'이다.

귀족 교육은 책을 읽고 글을 쓰도록 가르친다. 어릴 적부터 독서 교육을 가르치고 독서한 것을 글로 표현하도록 한다. 그 결과 노예 교육을 받으면 절대로 글을 쓸 수 없다. 교회 리더인 설교자가 글을 못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학 교육의 문제다. 신학교는 신학만 가르친다. 논문을 쓰는 법은 가르치지지만 설교를 쓰는 법은 커리큘럼에 없다. 그 결과 설교를 쓸 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글쓰기는 최상의 교육이다. 지력의 정점에 있는 것이 글쓰기다. 그러므로 교회 리더인 목사는 리더이므로,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책만 읽는 바보'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 결과 더 이상 세상을 복음으로 이끄는데 분명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서양에서 글쓰기는 교양인이 갖춰야 할 기준이다

교육의 정점은 글쓰기다. 이를 안 서구 유럽이나 미국의 대학 교육은 글쓰기 교육에 중심에 있다. 그들이 글쓰기 교육을 시키는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교양인으로 사는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적인 리더로 세우기 위함이다.

글쓰기는 교양인으로 사는 데 필수적이다. 조선일보 2008년 11월 4일자 '미국의 글쓰기 교육' 기사를 보면, 미국은 교양인이 되려면 글쓰기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텍스트를 정확하게 읽고 요약하는 능력,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하는 훈련은 ... 교양인이 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아마구치 슈는 그의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교양이 없는 전문가보다 위험한 존재가 없다."

글을 쓸 줄 모르는 것은 교양이 없다는 의미다. 글을 쓸 줄 모르는 설교자는 신학 전문가일지는 모르나, 교양인은 될 수 없다.

여기서 교양인의 기준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서구 유럽이나 미국의 기준이다. 하지만 성직자라면 기본 교양을 갖추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아마구치 슈의 말처럼 교양을 갖추지 못한 결과,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들이 한국교회에서는 당연시 되고 있다.

글을 쓸 줄 알 때,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있다

책을 쓸 줄 모르는 데 글로벌 리더라고 할 수 없다. 논문 한 권을 책으로 출간한 것이 아니라, 10여 권 이상 주제가 있는 책을 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세계적인 리더라 할 수 있다.

설교자는 먼저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 교양인이 되었다면, 그 다음에는 글로벌 리더가 되어야 한다. 성직자는 글로벌 리더의 수준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명문대학은 글로벌 리더를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글로벌 리더 양성을 목적으로 하기에 글쓰기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다.

문성주 박사는 크리스천투데이 2014년 10월 2일 기고한 글에서 미국의 하버드대학교를 이야기하면서, 제목을 '글로벌 리더는 글쓰기에 집중한다'라고 정했다. 그리고 그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하버드대학교는 매주 12시간 정도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다. 독서, 에세이, 자습, 리포트 작성 등을 감안하면 1주일에 30시간 정도 글쓰기에 집중해야 하버드대를 졸업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아가 하버드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학생들은 대부분 "지금보다 글을 더 잘 쓰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학업을 하면 할수록 글쓰기 능력이 더욱 절실해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체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 아이비리그에 속한 대학인 하버드나 MIT 대학들의 교육의 핵심은 글쓰기 교육이다. 글로벌 리더에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교회의 리더는 글쓰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의 리더에게 글쓰기는 일상이다. 그렇다면 교회의 리더도 글쓰기는 것이 일상이어야 한다. 교회 리더의 글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는 게 문제다.

채널A 예능 프로그램 신입사원 탄생기 '굿피플'에서는 인턴 변호사들의 활약이 그려지고 있다. 인턴 변호사들이 하는 일은 주어진 과제를 해내는 것이다. 주어진 과제는 다름이 아니라 글을 쓰는 일이다.

인턴 변호사들은 남의 글이 아니라 자기 글로 의뢰인들에게 브리핑을 하고 변론 등을 작성한다. 소장과 변론을 작성하는 목적은 변론에서 승소하기 위함이다. 만약에 변론에서 승소를 하지 못한다면 변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위협을 받는다.

변호사들이 하는 일은 글을 쓰는 일이다. 설교자도 하는 일이 글을 쓰는 일이다. 글을 썼다고 해서 다 글이 아니다. 글로 변호사가 승소해야 하듯, 글로 교인을 하나님께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글을 쓸 줄 아는 설교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남의 설교를 카피해서 설교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카피 설교를 하면서, 교인들에게 "선하게 살라"고 한다.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의 글로 설교를 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글로 설교를 하는 것은 교양인의 기본이다.

설교 글쓰기, 배워야 한다

설교를 쓰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글을 쓰는 것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글을 배워본 적이 없으니 글을 쓸 수 없다. 나도 설교 글 배운 적 없다. 홀로 10년간의 처절한 싸움을 통해 쓸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설교를 쓰지 못하는 이유는 글을 쓰기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넘사벽'이 있다면, 글을 쓰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어도 글을 잘 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는 글을 쓴다는 것은 도전이자, 모험이다.

글쓰기는 마치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하는 것과 같이 어렵다. 그럴지라도 설교자는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이는 '반드시'라는 부사를 집어넣어도 문제 될 것 없다.

'반드시' 써야 하는 것은 글을 쓸 수 있을 때, 교인을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

최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워렌 위어스비 목사 설교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설교는 교인이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한다."

설교가 교인이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한다면, 설교를 잘 해야 하는 것이다. 설교를 잘 하는 것의 시작은 글을 쓸 수 있는가의 여부다.

설교로 교인을 살리려면,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글을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설교자 자신이 쓴 글을 통해서만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앞에서 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은 논리적인 글을 쓸 줄 아는 것이라고 했다. 그럴 때 설교를 통해 교인에게 들려지는 설교가 출발할 수 있다.

글을 쓸 줄 알면, 한국교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설교 카피'가 아웃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설교로 이룰 수 있는 시작이자 완성이 된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 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 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 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 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 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 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