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는 멕시코와 엘살바도르 사이에 위치한 국가로 LA에서 비행기로 5시간 거리에 있다. 인구는 1,500만으로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로 꼽힌다. 국토의 많은 부분이 산으로 구성되어 있어 지대가 높고, 환태평양 조산대에 위치해 화산 폭발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 낯선 땅에 한국인과 현지인 사이의 혼혈아이들을 위한 '사랑의 집'이라는 보육원이 있다.

"한국 혼혈아인 쌍둥이를 만나러 갔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와 같이 살래?'라고 물었는데, 제 손을 더 꽉 잡고 놓지 않았다. 7살짜리이고 엄마가 바로 옆에 있는데...'나 안가요. 안갈래요'라고 할 수도 있는데, '가겠다'고 제 손을 꼭 잡았을 때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때,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를 절대 안 버릴 거야.나랑 같이 살자.'"

과테말라 선교사로 헌신한, 현재는 월드쉐어의 이사로 세계 여러 나라의 고통받고 소외된 어린이들을 보듬어 안는 사역을 이어 가고 있는 이정숙 선교사, 그는 그에게 첫 고난이 닥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았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지만 3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다행히 첫 아이를 가졌지만,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인큐베이터 안에 아이를 둔 채 그는 금요 철야기도가 진행 중이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찾아갔고 '아이를 살려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라는 기도제목을 나눈 후,온 교인이 함께 기도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아이는 퇴원했다.

시간이 흐르고, 이정숙 선교사를 위해 기도해주시던 목사님이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신학대에 가라고 하시는 것 같다"며 신학대 원서를 가져오셔서 생년월일을 적어 넣으셨고, 그렇게 반강제로 신학을 공부하게 됐다.

2001년, 한국에서 7년간 전도사로 목회하다가, 연년생이던 아들들이 군대에 들어가면서 그는 잠시 휴가를 다녀와야 겠다는 생각에 남편이 있는 과테말라 땅을 밟았다.

그러나 쉬기 위해 찾아간 곳에서 그를 기다린 건 편안한 쉼과 안식이 아니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기도하고 차에 물건들을 실은 후 아무 시골이나 찾아 다니며 아이들에게 물건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과테말라 선교가 시작됐다.

그러다 한국인들을 모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예배 이후 교인들이 한국인 혼혈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듣게 됐다. 태어나서 아버지를 한번도 본적이 없고, 어머니는 양육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버림받은 것과 다름없는 아이들이었다. 

마침,학교를 시작해 아이들을 받고 있었는데 학교에 한국인 혼혈아이를 둔 엄마가 찾아왔다.그 엄마는 봉제 회사를 다니다가 한국 직원을 만나 아이 낳았는데 아이 아빠는 어디에 갔는지도 모른다며 '아이를 데리고 가서 길러 달라'고 했다.

이정숙 선교사는 혼자 결정하지 못하고 성도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 아이를 데려올까요?' 성도들은 아이를 데려오는 것에 전원 찬성했다. 게다가 그가 살던 건물 1층을 사용하던 테넌트가 야반도주해 공간이 비게 되자, 건물 주인이 이 선교사에게 그 공간을 사용하도록 해줬다.

그렇게 해서 1층에 '사랑의 집'이라는 간판이 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관에서 연락이 줄지었다. 한인 혼혈아이인데 아버지를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제보가 이어지면서 한국인 혼혈아동들이 모여 사는 보육원이 됐다.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키운 이정숙 선교사는 그 아이들을 볼 때,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 목회자라는 것 때문에 참 미안했다고 말한다.

"이 아이들의 소원은 '학교에 갔다와서 아빠와 한번만이라고 아빠와 저녁을 먹어 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너무 평범하고 당연한 일인데, 이들에겐 이것이 꿈이다. 제 자식은 두 아이가 있지만 목회를 하느라 도시락도 제대로 못싸줬고 제대로 양육을 못했다. 그러나 이 아이들에겐 도시락을 싸주고 빨래를 해주고 머리를 빗어주고 '아이들이 정말 잘 자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너무 힘들었지만, 죽을 만큼 힘들 때가 있었지만 사립을 보냈다. 영어도 40~50% 할 수 있고 집에서는 한국말을 할 수 있으니 3개 국어를 하면 살아가는 데 문제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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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기독일보) 월드쉐어USA 15주년을 맞아, 한국 월드쉐어 본부에서 이정숙 이사와 과테말라에서 이지은 지부장이 월드쉐어USA의 LA사무실을 방문했다. 왼쪽부터 강태광 목사(월드쉐어USA 대표), 이정숙 이사, 과테말라 이지은 지부장

4월 25일 월드쉐어USA 창립 15주년 감사예배를 위해 한국 본부에서 이정숙 이사가 월드쉐어USA 사무실을 방문했다. 이번 그의 방문에는 월드쉐어 과테말라 이지은 지부장이 동행했다. 그들을 만나 국제구호단체 월드쉐어를 통해 이뤄지고 있는 국경, 종교, 인종을 초월한 나눔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월드쉐어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월드쉐어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UN ECOSOC) 특별협의지위를 획득한 국제구호개발 NGO이며, 순수 한국 NGO이다. 한국국제외교통상부 소속이며 인종, 국가, 종교를 초월해서 전세계에 고통당하는 이들, 어린이들, 재난 당한 이들을 대상으로 활동한다. 사업으로는, 첫째는,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교육을 제공한다. 가난으로 인해 배고픔에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을 구할 수 없는 지역에서는 식수 사업을 진행한다. 집을 개조하고 지붕 설치 등 지역 개발사업, 재난을 겪었을 때 최대한 빨리 나아가서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5~10명 사이의 부모가 없는 아이들, 부모와 같이 살 수 없는 아이들을 데려와서 3살부터 18살까지 키우는 그룹홈을 운영한다.

월드쉐어는 전체 국내 5개 지부, 해외 15개 지부, 협력자 30개 나라, 50만정도의 간접 수혜자가 있다.

-월드쉐어와 함께 일하시면서 느낀 보람은 무엇입니까?

이정숙 이사: 이 일이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고 누군가는 아파하는 사람을 도와야 하는데, 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감사하다.전세계에 가장 고통당하는 이들을 돕기위해 다니기 때문에 그게 제게는 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목회하고 과테말라로 가서 16년 간 선교를 하며 가장 소외된 아이들과 함께 했는데,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그러다가 몸이 안좋아져서 한국에 가서 검사를 했는데 과테말라가 고지대라 몸에 무리가 가서 더이상 거기서 활동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권태일 목사님께서 월드쉐어 이사직을 제의 하셨다. 권 목사님은 월드쉐어를 시작하기 전에 ‘즐거운 집’(1987년 설립)이라고 장애인, 고아, 노인, 거리에 버려진 사람들을 한 집에 데려다 돌보고 계셨는데 그때 봉사를 하러 다녀서 친분이 있었다. 지금은 월드쉐어의 총괄이사로 활동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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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Worldshare) 과테말라 중증장애 아동 복지시설인 드림센터를 개소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과테말라에서의 활동을 간단하게 나눠 주십시오.

이지은 지부장: 월드쉐어의 기본 사업인 아동결연 사업을 하고 있다. 저개발국가의 아동과 후원자가 결연을 맺어, 교육비, 생계비, 의복, 의료비 등을 지원한다. 의료지원 사업으로 일주일에 한번 이상 도시빈민지역에 침술 봉사를 간다. 그리고 공부방 사업을 하고 있다. 방과후 활동으로 시작했는데 장애가 있거나, 가정형편 어려워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오게 됐다. 올해 부터는 중중 장애 아동 데이케어 놀이방을 시작했다. 앞으로는 저희가 공부방이나 교육지원사업을 늘려 가려 하고 있다. 그리고 작년 화산 폭발로 재난이 닥쳤을 때, 긴급구호 사업을 시작했다. 과테말라뿐 아니라 과테말라 주변의 국가들도 비슷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과테말라 지부를 넘어서 중남미 모든 일대를 지원할 계획도 하고 있다.

-월드쉐어 사역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이지은 지부장: 2011년부터 월드쉐어 협력자로 일하며 사역지 아이들을 결연을 시켜서 아동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러다가 2016년에 월드쉐어가 중남미에 지부를 세우려는 계획이 있었는데 저에게 지부장 제의를 하셨다.

-협력 업체가 많이 있죠?

이지은 지부장: 치안이 불안하고, 대부분 우범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시청과 관공서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청과 관공서와 MOU를 체결한다. 그러면 경찰 인력이이라든지 지원을 해준다. 가끔 우범지역에 들어가 지원을 하는 저희를 보며, ‘위험하지 않느냐’고 묻는데, 시청 관계자들과 함께 다니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고, 또 관공서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에서 공신력 있는 단체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도 된다.

한국 분들이 도움을 주시지만, 현지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고, 현지 사람들의 협조를 얻어내지 못하면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현지인들의 마음을 여는 게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한국 분들은 대신 재정적인 도움을 해주시고 계시고, 한인회에서도 도움을 주시며, 현지 봉제업체들은 아이들에게 티셔츠 2~5천장을 지원해 주셨다. 차차 외연을 확장하고 현지의 도움 중심으로 지원사업을 해 나갈 계획이다. 앞으로 현지 장애인 업체와 MOU를 할 계획이다.

-이지은 지부장님은 '대한민국 해외봉사상'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지은 지부장은 2018년 12월 12일 한국국제협력단(KOICA)가 주관 하에 ‘제13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해외에서 일년에 9명에게 수여된다.

이지은 지부장: 과테말라 선교사로 사역하며, 월드쉐어에서 일하며 꿈꾸던 것들이 있었는데, 지부장으로 일을 하면서 여러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중에 지난해 과테말라 후에고 화산이 분출하면서 아직도 이재민이 3천명 정도가 대피소에 거주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탁상공론이 아니라 그곳에 정말 가 보자’는 생각에, 긴급재난 안전청에 가서 수장을 만나서 현장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위험해서 절대 안된다’며 허락 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부탁했더니 허락을 해줬다. 한참을 올라가고 있는데 소방차들과 안전요원들이이 역주행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소방차 한 대가 저희를 갑자기 막아서며 ‘2차 폭발이 일어나서 그곳에 있던 구조대로 철수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의 눈빛이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눈빛이었다. 영화 부산행에서 본 좀비에 쫓기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듯 했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람들과 차량이 거리에 가득 몰려 오고, 핸드폰 신호가 다 끊기고, 차들의 행렬이 거리에 가득차,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립됐다.

그날 이후로 그 도로 자체가 폐쇄됐고, 저희는 재난안전청으로 돌아가서 현지 재난안전청과 계속 대화를 나누고, ‘정말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뭘까’를 고민하고 논의했다. 저희는 구조 장비를 지원했다. 화산재가 뜨거워 군화도 단 30분이 지났을 뿐인데 다 녹아서 신을 수가 없게 됐다. 안전화, 핼멧 고글, 무릅 보호대 같은 장비를 준비해서 재난안전청을 통해 소방대원들에게 전달했다. 그게 과테말라 현지에서 화제가 되었고, 저희 유니폼에 태극기가 있었는데, 한국 구조단체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한국 대사관에서 저를 추천을 해주섰다. 저는 아예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상을 받게 되었다.

이정숙 이사 : 내가 볼 때는 어려운 일을 했기 때문에 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테말라에 가보면 많은 이들이 이지은 지부장을 좋아한다. 현지에서 이미 쌓아온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상을 받은 거라 생각한다.

월드쉐어
(Photo : worldshare) 과테말라 푸에고 화산 폭발로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다.
월드쉐어 이지은 지부장
(Photo : Worldshare) 월드쉐어 과테말라 이지은 지부장은 과테말라 후에고 화산이 폭발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재민이 되었을 때 긴급재난 안전청을 찾아가 현장을 도울 방법을 논의했다.

-월드쉐어의 현장을 나눠 주실 수 있습니까? 여러 나라들에서 활동하고 있죠?

이정숙 이사: 제가 사역을 다니는 곳은 가장 힘들고 가장 낮고 가장 고통 받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저는 물질은 모두 내려 놓고 살던 사람인데, 한두번은 그런 곳에 가면, 물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가서 봤을 때, 이 아이가 분명히 사람으로 살려고 태어났는데,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서 이 아이가 이렇게 살아가야 될까 하는 이런 아이들을 많이 봤습니다. 사람으로 생각할 수 없는 정도의 고통 가운데 있는 아이들이 많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 기가 막힌다. 그랬을 때 제가 해야할 일이 정말 많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이 아이 한 명이라도 더 도울 수 있을까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제 주변에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맣은데 욕심이 많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다. 후원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도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이 많다. 제가 성격이 쾌할한 사람인데 그런 데 다녀오면 3일 4일 우울증이 온다. 그런 곳만 일주일동안 보니까. 세상이 참 공평하지 않다. 한국에서 버리는 음식이 허다한데, 지구 다른 한 편에서는 빵 한쪽이 없어 숨을 헐떡이면 겨우 연명해 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에 슬플 때가 있다. ‘하나님의 눈으로는 어떻게 볼까?’ 이런 신경이 많이 쓰인다.

-월드쉐어USA를 맡고 있는 강태광 목사님, LA 지역의 한인 사회가 월드쉐어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강태광 목사(월드쉐어USA 대표): 2004년에 월드쉐어가 미국에서 시작했는데, 아프리카, 중남미가 급해서 미국을 세워나기지 못했다.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15주년이다. 중남미를 책임지는, 중남미를 돕는 중개소로서 월드웨어 USA가 세워질 수 있도록 활동할 것이다. 국내에서는 홈리스, 미혼모를 사랑하고 돌보는 일에 관심을 갖고 접근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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